영국에서 디자인 대학원에 다닐 때

by 바이올렛


제목_없는_아트워크 3.png 나의 비주얼 씽킹 (바이올렛)



회사 생활을 하다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분명히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며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맞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 인생에 의미 있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몇십 년이 흐르고, 정년퇴직할 때에 뒤를 돌아보고 얼마나 후회할지가 미리 보이는 듯했다.


회사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는 방법이 분명 있었을 텐데, 나는 끝내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이번 공부는 부모님의 기대나 타인의 시선, 점수에 맞춰 적성에도 맞지 않는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원하는 분야를 선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바로 '디자인'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하는, 디자인 공부


디자인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크레파스 병정을 그리던 초등학생 때의 꿈과 이전에 참여했던 색채 교육과 컬러리스트 자격증도 한몫 하긴 했지만, 마음속에만 가지고 있던 막연한 동경도 크게 작용했다. 털털한 복학생들 사이에서 대학생활을 했던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 하는 공부는 꼭 내가 해보고 싶은, 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공부를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강했었다. 그것이 디자인 공부였다.


유학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결정을 내리자 모든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할 수 있다고 마음먹고 꼭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준비 과정에서 찾아오는 어려움도 장애물이라기보다는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버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시절이다. 주말에는 영어 학원에 다녔고, 평일 퇴근 이후 시간에는 영어 학원 숙제를 하면서 시험 준비를 했다.


모두가 쉬는 주말에 영어 학원 한편에 앉아서 어린 학생들과 공부할 때의 그 기분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어쩌면 학원 강사님과 비슷했을 내 나이는 당시의 나에게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어린 학생들도 귀엽게만 느껴졌고 그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자체가 덩달아 신이 나고 기분 좋았다. 스터디 그룹에도 참여해서 추가로 공부했다. 이 모든 노력이 영국에 가서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과 닿아 있었다. 아마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두근두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 지났지만, 교수님들께 오랜만에 연락을 해서 추천서를 받기도 했다. 교수님께 전화드리기 전에 스스로 유학이 왜 가고 싶은지, 가서는 어떤 공부를 할 것인지, 돌아와서는 어떻게 우리나라에 기여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오랜만에 전화드린 교수님들께서는 반갑게 맞아주시며 나의 유학 결심을 진심으로 응원해주셨다. 아마 교수님들께서도 당시의 나처럼 수십 년 전에 꿈에 부풀어 추천서를 받고 유학길을 떠나셨을 거라 생각하니 남몰래 동지의식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게 학교에 지원하기 위한 서류도 하나씩 준비해나갔다.





대학원에 앞서 어학과정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에서


본격적인 대학원 과정에 앞서서 영어를 보다 능숙하게 구사하기 위한 어학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과정의 마지막에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학 과정이 끝나고 대학원에 가면 여러 상황에서 영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해야 될 텐데 두려워하고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하는 전 세계에서 온 유학생들이 프레젠테이션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더 탐구하고 싶은 분야, 앞으로 꾸준히 해도 지루하지 않을 분야를 선택해서 준비해보라고 하셨다.


내게 그런 분야는 무엇일까? 나는 뭘 좋아하지? 나는 남들 앞에서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곧 시작될 대학원 과정과 연관성이 있어서 학업에도 도움이 될 만한 주제는 뭐가 있을까 한참을 생각하던 끝에 '어떻게 색채가 브랜드 충성도를 강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발표하게 되었다. 색이 가진 힘, 브랜드 정체성과 색의 관계, 소비자의 심리를 자극하는 브랜드 컬러의 비밀에 대해서 공부하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다. 이미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좋아서 하는 공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마음 그대로 대학원에 입학해서 공부를 시작하던 하루하루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디자인'이 무엇인지? '브랜드'는 무엇인지? '전략'은 무엇인지? '소비자'는 어떻게 세분화하는지? 어떻게 소비자에게 '브랜드 충성도'를 갖게 할 수 있는지를 배우던 그 시간은 마치 신세계를 발견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매일이 새로운 과정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읽어야 할 전공 서적들과 이해해야 될 강의안, 꽉 짜여진 개인 과제와 조별 과제가 어렵고 때로는 막막하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해보면, 그렇게 책 속에서, 세계 곳곳에서 온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 사이에서 같이 지식을 나누고 지혜를 발견하던 그 시간이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었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1등부터 꼴등까지 적나라한 성적표가 공개되는 환경, 재능도 취미도 존중받지 못하고 그저 달달 외워서 시험만 보던 분위기, 시험이 끝나면 책을 모두 버리고 외웠던 지식도 다시는 상기해보지 않던 공부 습관, 우열반 학생들은 특별 대우를 받고 성적으로 반을 나눠서 학생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던 환경에서 벗어나서, 좋아서 하는 공부, 관심 있는 분야는 끝도 없이 파볼 수 있었던 학교의 지원과 환경, 학생과 평등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교수님과 조교, 학과 사무실의 직원들을 보면서 진짜 교육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았었다.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할 수 있었고, 잘 준비된 환경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던 행운은 내가 디자인, 브랜딩, 색채에 대해서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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