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아띠뜰란 호수
우리에게 조금 낯선 이름의 나라인 과테말라에는 아띠뜰란이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아띠뜰란, 발음마저도 예쁜 이 호수는 뾰족한 화산들로 둘러 쌓인 거대한 칼데라 호수이다. 혁명가 체 게바라도 이곳에서 쉬던 중에 혁명을 꿈을 접을까 생각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용하고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변에 훨씬 높은 화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1500m가 넘는 고지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아도 같은 위도대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서늘하면서 햇볕은 따뜻한 봄날 같은 날씨를 가진 곳이다. 온화한 고산 기후 덕분에 호수 주변에는 쉽게 커피나무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유명한 과테말라 커피를 어디서나 맛볼 수 있으니,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완벽한 여행지가 있을까?
호수 주변에는 예수 제자의 이름을 딴 열두 개의 마을이 있다. 그중에 산 페드로, 산 마르코, 파나하첼은 과거 히피들의 안식처에서 지금은 중남미를 여행하는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마을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그중에 산 페드로(San Pedro la Laguna)에 머물렀다. 산 페드로가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유는 아름다운 아띠뜰란 호숫가의 조용한 마을이라는 점도 있지만 스페인어를 가장 저렴하게 배울 수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든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숙소, 식당, 버스 터미널 등에서는 간단하게나마 영어가 통하는 경우가 많지만 중남미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스페인어를 제외하면 어떤 언어도 쉽게 통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중남미를 장기 여행하는 많은 여행자들이 과테말라에 들러서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달간 스페인어를 배우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1:1 개인 교습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받을 수 있는 데다가 주변 풍경까지 아름다운 산 페드로가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 부부도 멕시코를 여행하면서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온몸으로 느꼈기에 남은 중남미 여행을 위해 짧게나마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쉬자는 생각으로 산 페드로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 강인한 체 게바라도 혁명의 꿈을 접을까 고민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아띠뜰란의 풍경은 학업의 꿈 정도는 단숨에 접게 만들었다.
산 페드로 마을은 걸어서 3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작은 곳이다. 산 페드로 화산이 호수와 맞닿는 언덕에 자리 잡은 마을에는 호수를 따라 작은 여행자 거리가 만들어져 있고, 호수 선착장에서 이어지는 오르막을 따라 작은 커피점과 전통 민예품 가게 몇 개를 지나면 산 페드로 시장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아침이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상인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되는 이 시장은 과테말라 현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가감 없이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서나 쉽게 커피 농장을 찾을 수 있다. 빨갛게 여문 커피체리들이 열린 나무들과 넓은 공터에 노랗게 말라가는 생두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갓 수확한 신선한 원두로 내린 기가 막힌 향의 커피도 맛볼 수 있다. 지금도 산 페드로를 떠올리면 청명한 호수의 이미지와 함께 향긋한 커피 향이 느껴지는 듯하다. 커피 한잔을 들고 살랑살랑 호수를 따라 걸어서 인근 마을인 산 후안을 다녀 올 수도 있고 배를 타거나 카약을 타고 호수 건너 마을을 가볼 수도 있다. 심지어 말을 타고 호숫가를 거니는 일도 산 페드로에서는 평범한 일이다.
우리 부부는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멋진 테라스를 가진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 매일 아침이면 테라스에서 푸르스름한 물안개 사이로 화산들이 병풍 속의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는 호수를 만날 수 있었다. 산 사이로 해가 뜨면 샛노란 빛의 줄기가 호수를 가로지르고, 빛이 퍼져감에 따라 안개가 사라지면서 짙푸른 호수가 드러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마을을 걸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자리를 발견하면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 보면 어느새 옆 마을에 가있기도 했다. 여행 중에 휴가라는 말이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장기 여행을 하다 보면 이동하고 적응하는 일에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멍하니 쉬고 싶을 때가 많다. 마침 조금 지쳐 있던 시기에 아띠뜰란에 머물게 되면서 마음에 티끌만큼의 재촉함이 없이 하얀 백지처럼 쉴 수 있었다.
이처럼 향긋하고 한가로운 작은 마을에 우리 부부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식당이 있었다. 구두 수선점 만한 크기의 작은 가게는 이름을 알리는 간판도 없고 문을 열고 닫는 시간도 일정치 않았으며 일주일에 절반은 아예 장사를 하지도 않았다. 도깨비 가게 같은 그 노점은 간단한 덮밥과 꼬치구이를 파는 일본 식당이었다. 내 입맛이 저렴한 탓도 있겠지만 세계 어디를 가나 일식당에서 실망해 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 발견하자마자 변변한 테이블도 없는 그 식당에서 덮밥을 시켜 건너편 길가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식사를 했다. 가게 건너편에 앉아서 식사를 하며 가게를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식당 주인은 대머리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일본인 아저씨였는데 오랜 기간 여행을 다니다가 아띠뜰란 호수에 반해서 수년째 산 페드로에 살고 있다고 했다. 닭꼬치를 굽고 덮밥을 만드면서도 아저씨는 연신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그러다가 흥이 오르면 우쿨렐레를 들고 거리로 나와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고는 했다. 열려있는 시간보다 닫혀있는 때가 더 많은 가게의 벽에는 매일 저녁 열리는 길거리 공연과 파티 시간이 마치 메뉴판인 듯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저씨는 연주하는 요리사가 아니라 요리도 하는 아티스트였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세상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하고 싶진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그 보상으로 주어지는 돈을 이용하여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라 생각했다. 간혹 정말 좋아하는 취미를 업으로 이어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지만, 좋아하는 일이 돈벌이가 되었을 때는 그 역시 스트레스가 된다고들 말했다. 그런데 아띠뜰란 호숫가의 작은 노점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사람을 만나버렸다. 비록 세속적인 기준으로 좋은 돈벌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면서 즐기고, 딱 필요한 만큼만 일을 하고는 기타를 연주하면서 삶을 즐기는 그를 보면서 우리 부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라는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었다. 어떤 이는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재능을 펼치는 것을, 또 다른 어떤 이는 세상의 발전에 기여하는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그도 아니면 사회의 일원으로 역할에 충실하며 평범하게 사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삶을 직접 보니, 앞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는 정답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는 항상 정답을 강요했기에 그렇게 정답을 찾아 열심히 살아왔는데, 갑자기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 버리고는 느끼는 당혹감과 막막함. 여행 중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또래의 여행자들을 많이 만났었다.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의 약속을 깨는 일만 아니라면 어떤 삶의 방식이라도 옳고 그름으로 나눌 문제가 아니라 각각 존중받아야 한다 생각이 들었다. 내 선택을 다른 이의 기준으로 비교할 필요 없이 내가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사회적인 명예나 경제적인 부, 권력의 수준으로 내 인생의 점수를 매길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려면 내가 어떨 때 행복한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아내와 함께 세계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다는 이유가 컸었다. 나 혼자였다면 이런저런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면 끝이겠지만, 결혼을 하고 인생의 동행이 생기니 중요한 방향에 대한 결정을 위해서는 가치관의 조율이 필요해졌다. 이 여행을 계획하는 것 만해도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의 생각을 정리했었는데, 남은 인생에 대한 방향을 정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할까?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함께 보고 듣고 느끼면서 어쩌면 쉽게 생각이 좁혀질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점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산 페드로에 머문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평소처럼 테라스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시는데 근처에서 한국어로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우리처럼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부부 여행자였는데 우리와 다른 점은 자전거 여행자라는 점이었다. 자전거 여행자들을 만날 때마다 매번 감탄과 감동을 느꼈는데, 이번에는 부부 여행자라니 정말 놀라웠다.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같은 곳을 바라보며 달렸을 그들도 어쩌면 두 사람 만의 길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은 함께 가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