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 횡단 크루즈
세계일주를 준비하면서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 중에 하나가 대륙간 이동 방법이었다. 스타 얼라이언스나 원월드와 같은 항공사 연합에서 판매하는 Round the world 티켓을 이용하면 적절한 비용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항공권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계획했던 경로는 아시아에서 유럽을 거쳐 북미로 가서, 다시 남미에서 아프리카를 거쳐 아시아로 돌아오는 계획으로 한 방향(서→동 또는 동→서)으로만 이동해야 하는 규칙이 있는 세계일주 항공권에 적합하지 않았다. 요즘은 세계 어디에서나 합리적인 가격의 저가 항공편을 찾을 수 있어서 아시아나 유럽의 경우는 대륙 내에서 이동하는 항공권은 가격 부담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는 대륙간 이동의 선택지에는 서비스가 좋은 대신에 약간 비싼 메이저 항공사들 뿐이었다. 뻔한 항공편 말고 대서양을 건너는 특별한 방법이 없을까?
항공편을 검색하던 중에 문득 비행기가 아니라 배를 이용해서 대서양을 건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자고 일어날 시간만에 거대한 대양을 건너기에 우리 부부가 가진 시간은 너무 많았다. 보다 천천히 보다 낭만적으로 이동하는데 배만큼 완벽한 교통수단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곧바로 크루즈 선사의 항해 스케줄을 검색해보았고, 마침 우리 부부가 유럽을 떠나 북미로 넘어가려는 시점에 대서양 횡단 크루즈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서양 횡단 크루즈는 1년에 한 번, 여름철 지중해를 항해하던 선박들이 겨울을 피해 카리브해로 이동하는 재배치 크루즈라서 긴 항해 기간에 비해 비용도 저렴한 편이었다. 게다가 출항 1년 전에 예약했던 터라 16박 17일의 일정의 크루즈 상품을 편도 항공권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창문이 없는 내측 객실이었다.)
수년 전에 이스탄불을 여행하던 중에 처음으로 거대한 호화 크루즈를 본 적이 있다. 바다 위에 떠있는 새하얀 호텔의 테라스에 앉아 자신만의 지중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과 데크에 기대서 와인잔을 들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승객들의 모습을 보며 저곳은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이라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때는 막연하게 저런 크루즈 여행은 정말 돈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사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었고, 내가 저곳에 있으려면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야 가능할 듯싶었다. 그렇게 먼 미래의 일, 나와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크루즈 여행을 생각보다 일찍 경험하게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다. 그때만 해도 나의 삶은 예측 가능하다고 믿었고, 나에게 예상 밖의 큰 변화나 놀라운 경험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측했던 삶의 길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길에 발을 디딘 덕분에 나의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그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삶은 예측대로 되지 않는 법이고 그렇기에 더 기대할만한 것이 아닐까?
우리 부부가 탄 크루즈는 여름 내내 지중해 안을 빙글빙글 돌다가 마침내 여름 시즌을 마무리하고 바르셀로나에 들러 승객을 태워 대서양을 건너가는 배였다. 바르셀로나를 떠난 배의 항로는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가 대서양 가운데에 있는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섬에 기항하고 카리브해의 몇몇 나라들을 거쳐서 미국 올랜도 인근의 포트 캐너버럴에 도착하는 16박 17일의 일정이었다. 꼬질꼬질한 옷차림에 앞 뒤로 배낭을 들쳐 맨 장기 여행자의 모습으로 바르셀로나 크루즈 터미널에 도착하자 지금까지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했던 온갖 서비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달려드는 크루에게 빼앗기듯이 배낭을 맡기고, 꼬깃꼬깃 접어 온 서류를 내밀어 승선 카드를 받고 나자 어느샌가 내 손에 쥐어진 웰컴 드링크를 들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기념사진 촬영, 그리고 이어지는 격렬한 환영 행사까지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로 배에 올라탔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가 된 것처럼 3000여 명이 머무는 무려 14층짜리 배에서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로 복도를 한참 동안 헤맨 끝에 배정된 객실에 도착하자 내 배낭은 나보다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쁜 인형 모양으로 접힌 타월과 승선 안내문이 다소곳하게 올려져 있는 새하얀 침대를 보자 배낭 여행자에서 막 크루즈 여행자로 변신한 내가 실감 났다.
승선 첫날, 난생처음 서울에 온 시골쥐 같은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눈은 쉴 새 없이 반짝이는 것들을 좇았다. 침착하고 우아하게 행동하자고 다짐하고 방에서 나왔건만 어느새 우리 부부는 입을 반쯤 벌리고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끝없는 수평선이 보이는 레스토랑에서는 '이런 것쯤은 늘 익숙하게 먹던 거지'라는 표정으로 식사를 주문하려 했지만, 여행 중에 처음 만나는 정찬 메뉴판을 받아 들고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메뉴를 떨리는 손가락으로 주문했다. 배가 바르셀로나를 떠나 지중해 한가운데에 접어들 때까지 나와 아내는 손을 꼭 잡고 피곤함도 잊은 채 거대하고 화려한 크루즈 안을 쉴 새 없이 돌아다녔고, '우와!' 256번쯤은 외쳤던 것 같다.
배에 머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던 그것들이 점점 내 것처럼 익숙해져 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옥상 데크에서 붉게 물든 수평선을 가르고 올라오는 일출을 보고, 조식 뷔페에 들러 나의 식탐과 위의 크기를 비교했다. 그러고는 금세 밀려오는 과식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자 아내와 함께 탁구를 치거나 조깅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건강을 위한 운동이었다기보다는 다가 올 점심 식사에 대비한 준비과정이었던 것 같다. 오전에는 주로 게임룸에 들러 보드게임을 하며 오랜만에 머리라는 것을 사용하거나, 선미 테라스에 누워 하염없이 멀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다시 머리를 멍하게 비우고는 했다. 점심이면 옥상 수영장 주변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렸기에 그동안 넉넉지 않은 예산 탓에 자주 만날 수 없었던 고기를 원 없이 먹을 수 있었고, 오후에는 선내 곳곳에서 열리는 레슨, 게임, 영화 상영 등을 찾아다니며 분주했기에 바다 한가운데 떠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로 정신없이 하루가 흘러갔다.
해가 지면 궁색한 배낭에서 그나마 제일 깔끔한 옷을 꺼내 입고는 정찬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주류를 제외하고는 모든 비용이 객실 비용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가격표가 없는 메뉴판을 마주한 우리 부부는 도깨비방망이를 발견한 아이처럼 이것저것 뚝딱뚝딱 주문했고 가격표로 억눌리지 못한 식탐은 고스란히 식탁 위에 드러났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내는 맛있는 음식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환한 얼굴로 보여주었고, 지금껏 같이 살면서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만들어 주지 못했었다는 사실에 새삼 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물론 식탁에서 뿐만 아니라 크루즈에 승선한 이후로 우리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으로 일분일초를 느끼고 있었다. 둘 다 머릿속으로는 결국 이 배에서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온 힘을 다해 즐기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다. 끝이 있다는 것은 현재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조건인 듯하다.
대공연장에서는 매일 저녁 다양한 쇼가 열렸고 한국이었다면 꽤나 비싼 돈을 주고 봤을 법한 공연을 일찍 가기만 하면 제일 앞자리에서 볼 수도 있었다. 크루즈에서는 객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창문이 없는 내측 객실 손님과 전용 테라스가 딸린 스위트룸 손님 간의 차별이 없었기에 비록 잠은 가장 저렴한 곳에서 잤지만 공연만큼은 가장 비싼 자리에서 봤다. 그렇게 로열석에 앉아 뮤지컬 공연을 보고 나와서 막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어눌한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는 말이 들려왔다. 곱게 차려입은 노부부가 밝게 웃으시면서 인사를 건네 왔다. 알렉스 할아버지와 줄리 할머니였다. 2000여 명의 승객 중에 동양인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우리 부부는 어디서나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해주었는데, 한국어로 인사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여행 중에 한국에서 원어민 교사를 했던 사람들을 종종 만난 적이 있어서 한국어를 하는 서양인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얀 백발의 노부부라니.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서 다음날 아침 조식을 같이 먹기로 약속했다.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임에도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하시고는 창가 자리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계시는 알렉스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먼저 어떻게 한국어를 알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일본 출신이신 줄리 할머니가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서 지구 반대편 푸에르토 리코에서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국어를 배웠다고 했다. 지금껏 본 가장 먼 곳에서의 가장 고령의 한류팬이셨다. 젊은 시절 굉장히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셨다는 줄리는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마흔이 되던 해에 일을 그만두고 뉴욕으로 영어를 배우러 가셨고, 지금은 테러로 사라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알렉스를 영어 선생님으로 만나셨다고 했다. 국적도 달랐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났지만 두 분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셨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함께 손을 꼭 잡고 여행을 하시고 계셨다.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웃으시는 모습을 멀리고 보고 있자니 두 분이 함께 하셨을 아름다운 시간들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으레 풋풋하거나 열정적인 느낌이 먼저 떠올랐는데, 두 분의 모습에서는 성숙하고 은은한 사랑이 느껴졌다. 내가 알렉스 할아버지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누군가 멀리서 우리 부부를 보고는 내가 느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서양을 건너는 보름의 넘는 항해 기간 중에 다섯 번의 기항이 있었다. 기항지에 들르는 날은 아침 일찍 하선해서 기항지를 여행하고 해지기 전에 배로 돌아와야 했다.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인 세인트 키츠 네비스에 기항한 날, 배에서 내리는 길에 우연히 다시 알렉스 부부를 만나서 함께 관광에 나섰다. 뉴욕에서 평생을 사시다가 노년은 따뜻한 곳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에 카리브해의 푸에르토 리코로 이주하셨다는 알렉스는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들에 대해서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사실 그 이야기가 그리 밝은 내용만은 아니었기에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카리브의 바다와 알록달록한 집들의 모습이 어두운 아픔을 숨기고 밝게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리브 특유의 밝은 색감의 페인트가 살짝 벗겨진 틈으로 낡은 목재가 드러난 것처럼 항상 농담을 던지고 장난기 어린 웃음이 가득한 모습의 알렉스도 가끔 웃음 사이로 애잔한 모습이 보일 때가 있었다. 차분한 표정으로 알렉스는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이번이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이야."
인생의 마지막 여행은 어떤 느낌일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왠지 마음속에 뜨거운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지금껏 살면서 항상 첫 번째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기억에 남기려 노력했었다. 첫 번째 만남, 첫 번째 성공, 첫 번째 사랑... 아직도 많은 첫 번째 들이 남아 있기에 나는 아직 젊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여행 중에도 그 첫 번째 들을 아내와 함께 하면서 늘 새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알렉스 부부가 희미한 미소로 마지막을 얘기하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나와 아내도 언젠가 마주하게 될 마지막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 마지막의 마지막도 함께 할 수 있을까? 너무 이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언제까지나 모른척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마지막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누구나 그 마지막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끝이 있기에 현실이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크루즈에서 결국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매 순간을 더 의미 있게 보내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은 항상 마음속에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는 알렉스가 그러했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지난 순간들이 만족스러웠으면 좋겠다. 아내와 보내는 지금의 평범한 순간들은 단순히 반복되는 나날이 아니라 무수히 반복되고 있는 마지막의 전날인 셈이다. 긴 여행을 마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우리 부부는 가장 빛나는 현재를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