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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May 08. 2018

너와 함께 다시 오다.

프랑스, 파리


2000년 7월. 파리

 대학생이 되면 꼭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가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 결심을 지키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조금씩 저축을 했고, 1년 반의 시간이 흘러서야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난생처음 타본 비행기가 도착했던 곳은 영국의 런던이었고, 지금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혼자 길을 잃고 하염없이 헤맸던 기억뿐이다. 낯선 환경에 떨어진 촌놈은 호되게 신고식을 치르고서 다음 도시인 ‘실망의 도시’ 파리에 도착했다. 혼자서.


2015년 7월. 파리

 직장인이 되면서 언젠가 꼭 세계일주를 해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 결심을 지키기 위해 회사에 입사하면서부터 매달 꼬박꼬박 적금을 부었고, 6년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조금은 익숙해진 비행기를 타고 수개월간 아시아와 중동을 여행하고서 마침내 ‘낭만의 도시’ 파리에 도착했다. 아내와 함께.



2000년 7월. 파리

 예술과 낭만의 도시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안고 도착했던 파리에서 나의 환상은 철저하게 깨졌다. 아마 어딜 가나 클래식 선율이 흐를 것이라 상상했던 샹젤리제 거리는 서울의 명동 거리만큼이나 번잡하고 요란했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열정을 불사르고 있으리라 기대하고 찾아갔던 몽마르뜨 언덕은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 때문에 강 유람선은 먼발치에서 구경만 해야 했었고, 그나마 멀리 보이는 에펠탑만이 내가 파리에 와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2015년 7월. 파리

 처음 갔었던 파리에서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을 수 없었기에 이번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여느 대도시를 방문하는 기분으로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내의 손을 잡고 걷는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노천카페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파리 사람들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고, 파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몽마르뜨언덕에서는 열정을 다해 거리 공연을 하는 예술가들을 보며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해질녘에 유람선을 타고 강을 따라 흐르며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노을빛에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에 눈물이 핑 돌기도 했고, 파리의 상징과 같은 에펠탑은 철골 건축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우아해 보였다.


오르세 미술관 옥상에서 내려다 본 루브르 궁전


 나의 기억 속에는 두 가지 모습의 파리가 있다. 혼자 바게트를 씹으면서 빠른 걸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2000년의 파리는 복잡하고 삭막한 대도시의 모습이었다. 반면에 아내와 함께 고풍스러운 거리를 걸으면서 셀카도 찍고, 에펠탑이 한눈에 들어오는 공원에 앉아 샌드위치 도시락을 먹으면서 낮잠을 즐겼던 2015년의 파리는 여유롭고 낭만적인 도시로 기억된다. 분명히 같은 계절에 같은 장소를 갔었지만 내 기억 속의 그곳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남아있다. 왜 2000년의 파리는 낭만의 도시가 될 수 없었을까?


 2000년 7월의 파리에 있던 나는 그 도시에서 받은 느낌을 함께 나눌 상대가 없었다. 처음 가본 해외여행이었기에 분명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을 테고, TV나 책으로만 보던 것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황홀한 순간은 혼잣말로만 내뱉어지고 결국 내 기억에 새겨지지는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찾아간 파리는 마치 지난해에 왔었던 것처럼 낯익어 보였다. 15년 전에 갔었던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다시 가고, 15년 전에 올랐던 몽마르뜨 언덕을 다시 오르고, 15년 전과 똑같이 기차를 타고 베르사유 궁전을 찾아가면서 여전히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마치 처음 본 것 같은 전혀 새로운 감정이 느껴졌다. 아내와 도란도란 생각을 나누면서 마주치는 여행지에서 감성은 더욱 풍부해졌고, 그냥 지나칠 법한 사소한 것조차도 파리의 기억을 새겨 간직하게 되었다.


몽마르뜨 언덕의 사크레 쾨르 성당.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하얀 성당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낭만적이다.


 여행에서 '어디로 떠나느냐'는 문제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장소를 다시 갔을 때에 이전과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경험은 비단 나뿐 아니라 많은 여행자들이 공감할 것이다. 때로는 혼자 하는 여행이 좋을 때도 있다. 누군가를 배려하거나 의식할 필요 없이 순전히 나의 취향과 의지대로 여정을 끌고 나갈 수 있고,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행에서 느끼는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고 자신 안에 갈무리해야 하는 순간에는 누군가와 이 장엄한 풍경을, 이 놀라운 맛을, 이 황홀한 분위기를 함께 하고 싶다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또한 동행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생기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여행지에 대한 기억을 더 풍성하게 해주기에 같은 장소라 하더라도 누구와 함께 었는가에 따라 다른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여행에서 '누구와 함께 떠나느냐'는 여행의 내용을 채우는데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누군가와 함께 파리에 온 사람들의 흔적들


 혼자가 아니라 아내와 함께 여행한 파리가 더 기억에 많이 남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함께 하면서 생기는 이벤트 덕분이다. 상세한 계획을 세우고 떠난 여행이 아니었기에 세계 여행 중에 언제 어느 곳에 도착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자동차 여행을 계획했었기에 사전에 계약한 리스 차량의 인도일 이전에 파리에 도착하는 일정이 정해져 있었다. 덕분에 내 생일에는 파리에 머물게 될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 아내는 나의 특별한 생일을 위해 여행 출발 전부터 준비를 해왔지만, 우리 부부는 그동안에도 생일이나 기념일 등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기 애당초 비싼 선물이나 고급 레스토랑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아내는 평생 동안 기억에 남을 멋진 순간들로 나에게 새로운 파리의 기억을 선물해 주었다.


 여행 전에 아내에게 나의 지난 파리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일정에 비해서 둘러볼 곳이 너무 많아서 잠시도 여유롭게 쉬지 못했던 아쉬움과 빠듯한 예산 때문에 그럴듯한 저녁식사도 못했던 궁상맞음, 혼자 타기가 멋쩍어서 구경만 했던 센강 유람선과 우습게도 파리에 있으면서도 사진으로만 본 파리의 야경. 그 이야기를 듣고 아내는 내 기억 속의 아쉬운 파리의 모습을 새롭게 채색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내 생일날, 느지막이 숙소를 나와서 처음 찾아간 곳은 에펠탑이 한눈에 보이는 샤요이궁이었다. 잔디밭에 편하게 앉아 미리 준비한 샌드위치 도시락을 먹고서 멍하니 에펠탑을 바라보며 생각을 비우는 시간을 가졌다. 잠깐 둘러보고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가 아니라 매주 주말마다 소풍 오는 현지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무심하게 에펠탑을 바라보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비록 1~2 시간에 불과한 여유였지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었던 그 시간 덕분에 내 기억 속의 파리는 여유로운 도시로 다시 쓰여졌다.


샤요이궁에서 바라본 에펠탑


 다음으로 덮어쓸 기억은 파리에서의 근사한 저녁식사였다. 미식의 나라답게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 셀 수 없이 많은 파리에서 아내는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멋진 한 끼를 선물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미슐렝의 별을 자랑하는 고가의 레스토랑보다 더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기에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했다. 15년 전, 늦은 오후에 혼자 찾아간 몽마르뜨에서 저녁 식사를 하려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에 고풍스러운 레스토랑 한 곳이 눈에 들어왔었다. 하지만 그렇게 비싼 가격이 아니었음에도 한 끼 식사 비용으로 지불하기에는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그냥 돌아서야 했었다. 그 후로 TV에서 프랑스 요리를 소개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그때 돈을 아끼지 말고 한 번 정도는 괜찮은 식사를 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았었다.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고 15년 전의 그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보타이를 한 멋진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간단한 코스요리를 주문하고 와인도 한잔 곁들었다. 직접 연주해주는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과 입안에 퍼지는 풍미가 파리를 맛의 도시로 기억하게 만들어 주었다.


100년도 훌쩍 넘은 역사를 가진 몽마르뜨의 레스토랑. 내가 앉았던 자리에 피카소나 고갱도 앉지 않았을까?


 몽마르뜨 언덕을 내려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에펠탑 근처의 유람선 선착장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에 출발한 배는 센강을 따라 파리의 황홀한 야경을 보여주었다. 오르세 미술관과 루브르 궁은 종일 담아두었던 관람객을 다 쏟아내고 노란 조명을 덮고 쉬는 듯 보였고, 강가의 둔치에는 삼삼오오 둘러앉은 파리지엥들이 와인이나 맥주를 나누며 하루의 피로를 덜어내고 있었다. 조명을 받아 한층 더 우아한 모습을 보이는 노트르담 사원을 지나서 배는 다시 출발점인 에펠탑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노란색 가로등이 줄지어 서있는 낭만적인 센강의 다리들을 지나다 보니 저 멀리 불을 밝힌 에펠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숲 사이로 삐죽이 솟아 오른 거대한 철골 구조물에 노란색 등이 가득 켜진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멍하니 넋을 놓고 바라보는 중에 배가 에펠탑 바로 앞을 지나치는 순간, 매시 정각에 펼쳐지는 화려한 조명쇼가 시작되었다. 눈앞의 압도적으로 거대한 아름다움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모습에 잠시 시간이 멈춰지는 듯한 환상이 느껴졌다. 주변에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와 아내만이 반짝이는 에펠탑 앞에 단 둘이 있는 듯한 황홀한 느낌에 빠져 이대로 세상이 끝나도 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배가 선착장에 정박하고 땅에 발이 닿으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잠깐 사이에 아주 오랜 시간여행을 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파리는 환상과 낭만의 도시가 분명했다.


조명이 들어온 에펠탑은 말도 안 되게 우아하다.


 두 번의 여행을 통해 파리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이 생겼다. 같은 조건의 같은 장소라도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것은 전혀 달랐다. 삶을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 삶을 함께 하는 누군가는 삶의 내용을 채우는 이야기를 만드는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더 풍성해지리라 믿는다.



2000년 7월. 파리

 다음에 다시 파리를 온다면 꼭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고 싶다.


2015년 7월. 파리

 그래서 아내와 함께 다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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