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긴 시간 동안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고 하면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 중의 하나가 '어느 나라가 제일 좋았어?'라는 질문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곳은 없기에 한 군데를 찍어서 말하기 힘들고, 관점에 따라 취향의 차이가 있기에 내가 좋았던 곳과 아내가 좋았던 곳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나라가 여행하기 가장 힘들었어?'라는 질문에는 둘 다 주저하지 않고 답할 수 있다. "이집트!"
고대 문명의 발상지, 미스터리 한 피라미드가 있는 곳, 복잡한 상형 문자 속에 숨어 있는 역사와 전설을 느낄 수 있는 이집트는 누구에게나 신비롭고 누구나 한 번쯤은 탐험하고 싶은 장소일 것이다. 비단 유적지뿐만 아니라 별이 쏟아질 듯한 사막의 밤, 유유자적함을 즐길 수 있는 나일강 크루즈, 세계적인 스쿠버다이빙 포인트 홍해, 성지 순례지 시나이산까지 여행지로서 이집트가 가진 매력은 대단하다. 우리 부부도 이번 여행에서 이집트에 거는 기대가 꽤 컸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배낭여행자의 지옥으로도 유명하다. 이집트 사람들이 여행자를 대하는 태도는 복잡한 정치문제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하는 테러에 대한 걱정을 압도할 만큼이나 여행자들을 지치게 만든다. 이미 인도 여행을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사기 기법과 전투적인 호객 행위, 열악한 환경을 경험했기에 설마 인도보다 더 심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갔었던 이집트는 나의 기대를 완벽하게 무너트렸다. 거기에 이슬람 국가의 여성에 대한 인식까지 더해져서 아내는 이집트를 여행하는 내내 많이 불편했었다.
사실 이집트는 입국하는 과정부터가 무척이나 험난했다.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약간 걱정스러웠던 경로가 바로 요르단에서 이집트로 넘어가는 구간이었다. 이집트는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로도 여전히 정세가 불안하고, 시나이반도에는 반정부 세력들이 여전히 폭탄 테러나 반정부 시위가 진행 중이다. 게다가 수년 전에 이집트 국경도시 타바에서 버스 폭탄 테러로 한국인 관광객 여럿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뒤로 시나이반도 북부는 외교부에서 여행금지 지역으로 지정했다. 요르단에 입국하던 날부터 매일같이 외교부에서 여행주의 문자가 날아와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집트로 입국하는 방법은 육로와 해로가 있는데, 육로를 통한 이동은 테러의 위험이 커서 페리를 통해 넘어갔다. 그 페리는 홍해의 끝부분에 있는 요르단의 아카바에서 매일 자정에 출발하는 단 1척뿐이었다. 40도 넘는 아카바의 더위와 하루 종일 싸워가며 버티다가 도착한 페리 터미널은 마땅히 앉을 곳도 없을 정도로 열악했고, 요즘 중동 정세가 안 좋다 보니 여행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계속 우리를 지켜보는 수백 명의 현지인들 사이에서 잠들 수도 없고 깨어 있기도 힘든 상황을 간신히 버티다가 새벽 1시가 훌쩍 넘어서야 페리에 올라탈 수 있었다. 하지만 배 안에서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마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쉴 새 없이 틀어놓은 에어컨 때문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바람이 적게 오는 곳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녀도 추위는 마찬가지였다. 낮에 아카바에서 더위로 고생했었기에 긴 옷은 모두 메인 배낭에 집어넣어 화물칸으로 보내버려서 찾을 수도 없었다. 이슬람 문화권이기에 춥다는 이유로 남녀가 껴앉고 있을 수도 없어 뜬 눈으로 덜덜 떨면서 밤을 새우고 이집트 누웨이바 항에 도착했다.
이집트 누웨이바 항에 도착해서도 고압적인 공무원의 입국심사와 교통편을 구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과 온갖 시달림을 겪고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거지꼴로 다합으로 향할 수 있었다. 여행자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다합은 언뜻 보기에는 조용한 어촌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휴양지 같은 모습이지만, 그 느슨함에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망각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특별히 볼 만한 명소가 있어서 바삐 돌아다닐 일도 없는 다합에서는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을 먹고 해변에 있는 바에 자리를 잡아서 음료를 마시며 책을 보다가 스노클링을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일과였고, 이따금씩 맑고 따뜻한 홍해의 바다에서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면서 여행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이집트 여행의 단맛은 그곳이 마지막이었다. 여행의 희로애락에서 '희', '락'은 다합에 남겨둔 채 카이로로 떠나면서 분노의 이집트 여행이 시작되었다.
다합에서 카이로로 가는 야간 버스는 테러의 위협 때문에 매 시간 검문검색을 했었고, 수에즈를 지날 때에는 깜깜한 새벽에 모든 짐을 길에 펼쳐놓고 탐지견의 콧기름을 발라야 했다. 15시간 동안 자다, 깨다, 내렸다, 탔다를 반복하다가 비몽사몽의 상태로 카이로에 도착한 우리 부부를 반겨준 것은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택시 기사들이었다. 어딜 가나 호객과 사기의 시작과 끝은 택시이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야무지게 협상을 하고 탔지만, 내릴 때 갑자기 열 배의 요금을 부르는 택시기사와 멱살잡이를 하면서 본격적인 이집트 체험이 시작되었다.
이집트에서는 가는 곳마다 숙소 주인, 낙타몰이꾼, 로컬버스 승무원, 슈퍼마켓 직원, 기념품 가게 주인, 동네 꼬마들까지 끊임없이 우리 부부의 분노를 유발하였다. 특히 관광으로 유명한 룩소르에서는 길을 걷기 힘들 정도로 심한 호객 행위에 시달려야 했고, 현금을 인출하는 ATM기까지 몰래 쫓아와서 구걸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찔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이런 에피소드만 모아도 몇 시간을 얘기할 수 있을 만큼 참 다양한 사건을 겪었는데, 당하는 순간에는 정말 짜증이 나고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들의 행태가 이해되기도 한다. 혁명을 통해 수십 년간의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는 가 싶었지만 다시 군부 정권으로 돌아간 정치 상황, 극단적인 빈부격차, 불안한 정치상황으로 급감한 관광수입 등으로 내가 여행에서 만난 평범한 서민들은 나와 같은 외국인 여행자가 걸어 다니는 돈으로 보였으리라 생각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두려움과 분노의 롤러코스터를 타던 중에 우리의 실수로 아내는 카이로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었다. 모래폭풍 때문에 숙소에 갇혀서 꼼짝 못 하던 날, 숙소에서 반팔 반바지의 편한 차림으로 있다가 버스표를 예매하러 잠깐 도심에 나가게 되었다.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동안 세속주의 이슬람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그들의 복장에 대한 룰을 잠시 잊었었던 것이었다. 그들에게 반바지 차림의 남자는 서양 여행자들의 모습을 통해 익숙할 테지만, 반바지 차림의 동양 여자는 그렇지가 못했다. 숙소에서 버스 터미널에 갔다 오는 1시간 정도 시간 동안 아내는 거리의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받았다. 어떤 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노골적인 눈빛으로 훑어보기도 했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훈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옆에 있는 내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다양한 시선들이 쏟아져왔다. 문화의 차이, 특히 여성에 대한 이슬람 문화권의 규율을 소홀히 여긴 대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카이로 시선 집중 사건 이후로는 나도 아내도 이들 문화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정작 무슬림 남자들은 우리의 노력이 무색하게 끊임없이 아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남편인 내가 옆에 있음에도 그들의 치근덕거림은 그칠 줄을 몰랐고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도 능글능글 웃으며 도망가면서, "진짜 남편 맞아? 아니면 나랑 노는 게 어때?" 라며 분노를 돋우고는 했다. 나중에 착해 보이는 숙소 직원을 잡아서 꼬치꼬치 물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슬람 율법상 다른 여자에게 추파를 던질 수 없기에 만만한 외국인 여행자들을 못살게 구는 것이라고 한다. 남편과 같이 여행하는 상황에도 수시로 발생하는 일인데 혼자 여행하는 여자는 정말 피곤하거나 무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이 사람은 내 아내다.'라고 큰소리로 외칠 일이 생길 줄은 몰랐었다. 항상 내 사람이었고 늘 그럴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런 시시껄렁한 이집트 아저씨들 때문에 확실하게 영역표시(?)를 하고 나니 '나와 너'가 아닌 '우리'라는 연대의식이 더 강하게 와 닿았다. 내가 지키고 챙겨야 하는 사람이라는 책임감도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집트를 떠나 터키를 여행하는 동안에도 내내 외간 남자들의 야릇한 시선과 대책 없는 농담으로부터 보호막이 되어주면서 처음으로 내 사람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그리고 아내 옆에 내가 있고, 내 옆에 아내가 붙어 있으면서 서로를 챙기면서 우리가 완성되는구나라는 느낌을 얻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것에 대한 새삼 놀라운 감정이었다.
카이로에서 17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도착한 아스완. 거기서 다시 새벽 3시에 일어나 4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아부심벨 신전에 도착했다. 아부심벨 신전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위한 건축한 거대한 신전으로 아스완댐 건설로 수몰된 위기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엄청난 거상이 서있는 신전 내부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가득했다. 왕의 신전과 나란하게 있는 왕비의 신전을 보면서 과연 그들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상상해 보았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서 파라오의 왕위는 세습으로 물려받았지만, 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왕족의 여성과 혼인한 상태여야만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절대 왕권의 파라오라 할 지라도 왕비가 없이는 왕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들도 서로가 있었기에 완전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