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앞두고
"제가 원래 진짜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닌데요. 대리님 퇴사하셔도, 대리님이랑 종종 연락하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우리 앞에는 소주병이 어질러져 있었고, 앞자리에 앉아 있는 L의 목소리가 0.5배속 한 것처럼 느리게 들렸다. 다음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인상을 찌푸리며 어제 술자리를 떠올려 봤다. L이 했던 말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지..? 기억이 안 났다.
퇴사를 곧 앞두고 있는 나는, 팀원 L과 퇴사 기념으로 저녁을 먹었다. 2년 동안 힘들게 다닌 회사를 드디어 그만둔다는 생각에 후련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쉬운 마음도 컸다. 나는 회사에서 "꽁꽁 숨기는 사람"이었다. L이 인스타 하냐고 묻는 질문에도, 아이디가 없다고 거짓말했다. L은 언젠가 술자리에서 "대리님한테는 벽이 느껴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숙취가 사라질 즘, 빈말일지라도 벽을 깨 보려고 노력하는 L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 강제적으로 모이는 약속이 끝나버리면, 그 관계는 흐지부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L도 물론 알고 있었겠지. 퇴사 후 L과 연락한다고 해도 그 연락의 빈도수는 점점 낮아지고 어느새 소멸할 거라는 것도. 요리조리 나를 뜯어 분석했다. 내가 자꾸 나를 숨기는 건, 관계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는 게 무서운 겁쟁이 자아 때문일지도 몰라.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관계가 끝나는 것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혼자 여행을 가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하루를 같이 보내고 헤어지는 순간. 이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 끝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중에 종종 연락하자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이 사람을 죽어도 볼 수 없겠지. 다시 봐도 오늘의 그 사람은 아니겠지. 여행지에서의 헤어짐은 더 강렬하고 더 서글펐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관계의 탄생과 죽음을 겪었다. 대외활동을 할 때 같은 팀원들과의 만남과 끝, 이전 회사를 그만둔 후 친했던 동료들과의 만남과 끝, 원데이 클래스에서 몇 시간 함께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끝. 크고 작은 만남이 우후죽순 태어나고 죽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중에 헤어질 때 더 슬퍼지지 않으려고, 나를 숨기고 관계에 푹 발 담그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렇게 여러 번 꽁꽁 숨긴 채 관계의 시작과 끝을 경험하니 이제는 조금 무뎌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회사에서 동료들과의 관계가 마무리된다는 생각에 서글프다. '함께했던 시간에 만족하고 그 시간을 추억으로 간직하면 괜찮아.’라고 기계적으로 생각해봤다. 하지만 나는 회사를 마지막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