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024 TMI 어워드

by core

2019년부터 매 해 '나는 무슨 일을 했었나' 돌이켜보고자 시작한 TMI 어워드 시리즈,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다. (올해는 특히 정말 TMI가 많다) 그나저나 작년 이맘때쯤 2023 TMI 어워드를 쓰고 나서, 그동안 글 4개밖에 발행 못한 거 실화인가요? 네, 실화입니다. 하지만 미처 용기 내지 못해 발행까지 못 간 미공개 원고가 10개 넘게 있다는 사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올해의 성취 - 선물의 기쁨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내 모토는 '주지 말고 받지도 말자' 다. 생일 챙기는 것도 소홀하고, 편지나 선물은 웬만해서는 잘 건네지 않는다. 선물 고르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어렵게 고른 선물이 취향에 맞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그런 내가 이번에 자발적으로 팀원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지난 글에서 밝혔듯, 회사에서 조직 개편이 있었고 내가 맡았던 팀이 폭파됐다) 마지막이라고 하니 불현듯 떠올랐다. 팀장이라고 챙김 받기만 했지, 언제 한번 변변찮은 거 하나 챙겨준 적이 없는 거 같아서.


막상 선물을 고르려고 보니 참 막막했다. 어디서 무얼 사야 하나. 각자에 맞는 선물을 사려고 보니 팀원들의 소지품이나 취향 같은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의 평소 차림이 어땠더라, 그의 피부는 어떤 톤이었더라, 그가 이 브랜드에 대해 뭐라고 했더라 등등.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걸 억지로 기억해 내려 무진장 애썼다. 그만큼 내가 이 사람들에게 무심했구나, 반성하기도 했고.


결국 점심시간에 근처 백화점으로 가서 한 번에 다 해결했다. 백화점에서 점원과 그렇게 많이 이야기해 본 건 처음이었다. 돈을 쓰러 간 건데도 괜히 쭈뼛쭈뼛거렸다. (이불킥 각) 결국 각자에게 맞는 선물이 잘 떠오르지 않아 다 내 맘대로 골랐지만.. 팀원들이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들을 보니 반쯤은 성공했다 싶다.


무엇보다 몰래 선물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 사실 그간 즐거울 만한 일이 딱히 없었는데, 선물을 고르면서는 잠깐이나마 진심으로 즐거웠다. 깜짝 선물을 받았을 때의 팀원들의 반응을 상상하면서 퍽 뿌듯했다. 나한테는 그렇게 큰돈을 써본 적이 없는데, 카드가 경쾌하게 나갔다. (앞으로는 좀 자제가 필요하겠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가 선물을 받은 느낌이기도 했다. 선물 하나가 전달될 때 얼마나 많은 그 사람에 대한 상상과 추론과 관찰이 선행되는지, 그러니까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선물을 받아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새기는 시간이었다. 올해는 좀 더 선물을 해봐도 좋겠다. 별다른 계기 없이도.



올해의 여행 - 산골초가펜션


10월쯤이었을까, 갑자기 삘이 꽂혀 '촌캉스'를 떠났다. 회사에서 술을 먹다가 친해져 어느새 2박 3일 여행을 가는 사이가 된 30대 남자 셋이서.


영월에 위치한 산골초가. 정말 닉값 제대로 하는 곳이었다. 산골에 덩그러니 놓인, 널찍한 대청마루와 가마솥과 아궁이가 있는 초가집. (다행히도 지붕은 슬레이트였다) 30대 남자 셋은 2박 3일 동안 뭘 하고 노냐고? 동네 산책도 하고, 닭도 구경하고, 바베큐도 해 먹고, 캠프파이어도 하고, 군밤&군고구마도 해 먹고, 밤하늘의 별도 실컷 보고 그랬다. 처음에 지루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하나도 지루할 틈 없이 알차게 있다 왔다. 가마솥에 직접 푹 고은 백숙 맛을, 자글자글하게 부친 미나리전과 막걸리의 콜라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도심 속에선 결코 만나기 힘든 것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모닥불'이다. 우리는 매일 저녁 마당에 불을 피워 놓고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말없이 불만 보고 있었다. 그게 정말 좋았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가슴속부터 따뜻하게 덥혀지는 느낌이랄까. 일렁이며 타오르는 불길, 이내 바스러지는 장작이나, 변화무쌍한 불꽃과 그을음의 변주 같은 것들이 잠깐이지만 상념을 잊게 해 줬다. 불 앞에서는 각자의 고민들이 다 불똥 같이 사소해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30대 아저씨들의 여행. 이 정도면 꽤 낭만 있을지도? 생각해 보면 맑은 공기나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처럼 '진짜 불'은 도심 속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귀한 존재다.




나에겐 스스로를 분해해보는 경험이었달까

올해의 선택 - 파혼


올해는 대체로 스펙터클한 한 해였는데, 결혼 준비와 파혼이라는 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사연을 읊자면 아주 긴데 요약하자면 굉장히 짧다. 각자가 원하는 게 달랐고, 그걸 서로에게 줄 수 없었고, 그 사실을 둘 다 너무 늦게 알았다. 그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파혼을 하고 나서 얻은 것이 더 많다. 올해 내게 벌어진 사건들 중 가장 좋았던 일로 생각한다. 진심이다. 단순히 잘못된 선택을 피해서가 아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파혼을 겪고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굉장히 많이 배웠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내 마음에 대해서. 한 번 깨달음을 얻고 나니 여태 어찌 그렇게 편협하고 옹졸하게 살아왔나 싶다. 이런 사건이 아니었으면 앞으로도 자각 없이 똑같이 집착하고 괴로워하며 살았을 거다. 이건 의심의 여지없이 나의 에고를 깨뜨려준 그 덕분이다. (그에게 감사한다) 나 때문에 괴로웠을 그가 어디서든 평안하길 빈다.


한편, <비혼주의자의 파혼일기>라는 가제로 파혼 후의 깨달음에 대해 6부작으로 시리즈물 원고를 써놓은 게 있는데... 이걸 발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 중이다. 발행하자니 내 무덤 내가 파는 거 같고, 발행하지 말자니 이 인사이트를 나 혼자만 알고 넘어가는 게 아쉽다. 아, 역시 글은 괴로울 때 잘 써진다.




올해의 책 -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가. 올해 읽은 여러 권의 책들 중에서 단연코 도끼 같았던 책은 바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다.


이 책은 1895년에 태어난 저자가 1975년에 쓴 책 (정확히는 강연을 엮은 것)이다. 한국에는 79년도에 시인 정현종 님께서 번역해 주셨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30년도 전에 태어난 이가 쓴, 40년도 더 전의 텍스트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냉철하게 삶에 대한 진리를 담고 있는지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두개골이 쩍 하고 갈라지는 체험'이라고 평했는데, 아주 적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책이 있다. 읽으면서 우리가 읽고 있는 건지 스스로 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책이 있다. 뱃속이 맞는 책, 지금 계속 씌어지고 있는 책이다.

1979년 봄, 정현종
(옮긴이의 말 중에서)


삶에 대한 여러 화두―기쁨, 쾌락, 공포, 관계, 사랑, 자유 등―를 두고 책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읽는 이는 질문을 붙잡고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확장하게 된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그건 진짜 내 모습이었는가, 되물으면서 스스로를 짚어보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가 철학적이고 관념적이어서 자칫 난해할 수 있다. 읽다 보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경험을 하게 될 거다. 물론 한 번 읽어서 다 이해할 순 없다. 그러나 앞으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 텍스트가 또 어떻게 다가올지 기대되는 책이었다. 그게 사뭇 두렵기도 했고. 그래서 소장가치 200%인 책.


나를 이해한다는 건 무엇인가, 정말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나 자신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 삶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있는 분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아래는 좋았던 부분을 공유.

참고 : 마이리틀케이브의 bar 자리에서 만나보실 수 있어요.




나는 계속 삶에 대해 정답을 찾아왔는데, 언젠가부터는 찾는 걸 그만두었다. 인생에 정답이란 건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내 몫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네 삶을 살아라" 정말 뻔한 말인데, 그런 뻔해 보였던 말들 앞에서 점점 숙연해지고 겸손해진다. 이것이 바로 삼십 대 중반인가. 나는 앞으로도 좋아 보이는 삶이 아니라, 실제로 나에게 좋은 삶을 위해서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할 것. 다가오는 사건들을 겸허히 맞을 것.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감사할 것. 감사할 점을 집요하게 찾아낼 것.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것. 삶의 행복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5.01.12)



*2021년은 휴재...


keyword
core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한의사 프로필
구독자 616
매거진의 이전글2023 TMI 어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