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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포기하고 3년 동안 스타트업 다니며 느낀 점

스타트업 3년 회고

by core


입사한 지 벌써 3년이 흘렀다. 나는 끈기가 부족해 무언갈 꾸준히 잘 못하는데 (연애 포함), 신기하게 회사에선 3년이 후딱 지났다. 돌이켜 보면 바빴기 때문인 것 같다. 1년 차엔 스타트업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2년 차엔 첫 팀장 달고 리딩하느라 바빴고, 3년 차엔 조직 개편으로 70억짜리 신사업을 맡느라 바빴다. 연차별로 다 다른 경험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1년마다 회사를 옮긴 거 같은 느낌도 든다. 회사도 그간 꽤나 커져서, 첫 입사했을 때는 60명 규모였는데 이제는 170명 정도 된다. (나도 이제 엄연히 고인물이다..) 오늘은 근로자의 날이므로, 지난 3년 동안의 소회를 적어보고자 한다.



1. 사람은 결국, '말하는 대로' 된다.


3년을 기념해 기존 성과회고 문서를 되짚어 봤다.


1년 차 성과회고 땐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을 묻는 질문에, 기획과 마케팅에 집중하고 싶다고 썼다. 그리고 언젠간 리더를 하고 싶다고 했고. 말한 대로 됐다. 언젠가부터 회사의 모든 B2C 마케팅 메시지를 컨펌하는 역할을 하게 됐고 (전혀 예상한 바가 아니다) 작은 TF 조직을 이끌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1년 반 만에 갑자기 팀장이 됐다. (역시 예상한 바가 아니다)

2023년 성과회고


2년 차 성과회고 땐, 팀을 넘어서 더 큰 브랜드를 구축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썼다. 그 역시 말한 대로 됐다. 갑자기 팀이 조직 개편으로 사라지고(ㅠㅠ), 완전히 다른 섹터로 넘어와 신사업을 맡았다. 적었던 대로 브랜딩, 마케팅, 판매 전략, CS, 프로덕트, 홈페이지 세팅 등 모든 일을 하고 있다. 단 세 명이서. 하하하. 입이 방정이지.

2024년 성과회고


이 밖에도 많은 것들이 (신기하게도) 말한 대로 됐다. 그건 내가 특출나서가 아니라, 그냥 많이 말하고 다녀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한다. 직급을 가리지 않고 의견을 내다 보니 "답답하면 네가 하던지" 하면서 팀장의 자리가 주어졌고, 직무를 가리지 않고 기획이며 정책이며 오지랖 부리고 다니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 하는) 신사업을 맡게 된 거다. 예전엔 소심한 성격이었던 거 같은데 이상하게 회사에선 자꾸만 나대게 된다. 뭐, 덕분에 지금 먹고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프로젝트 하는 중


이러나저러나 나는 앞으로도 열심히 떠들 것이다. 내가 내지른 말들이 모두 다 나의 미래가 되진 않지만, 나의 미래는 내가 내지른 말들 중 어디선가 싹튼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앞으로도 더 많이 공언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공언하는 만큼 시작할 수 있다. 공언을 고스란히 현실로 바꾸지는 못한다고 해도, 결국 거기에서 좋은 것이 출발한다.

<일하는 마음>, 제현주


3년 차 성과회고 땐 무슨 이야기를 적었냐고? 비밀입니다.




2. 따뜻한 일잘러는… 너무 어렵다.

입사 3개월 차엔, '따뜻한 일잘러는 존재하는가'라는 글을 썼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할 때, 따뜻함은 그 자체로 하나의 효율이 된다는 것. 저 글을 쓰고 3년이 지났다. 나는 일잘러였는가, 대체로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었는가, 그건 명백히 아닌 것 같다. 주륵.


퇴사한 어떤 이가 남긴 이야기.. 반성과 감동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딱 봐도 너무 구린 아이디어 앞에서, 입에 발린 억지 칭찬이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입을 닫고 있으면 몰라도. 쿠션어도 잘 쓸 줄 모른다. '죄송합니다만~'(별로 안 죄송하다), '좋은 의견입니다만~'(별로 좋은 의견이 아니다) 하며 돌려 말할 줄을 모른다. 일을 하는 것 이외엔 쓸 에너지가 별로 없달까. 그렇게 직설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선호하다보니 속된 말로 '싹수없다'라고 느끼셨을 분도 있었을 거 같다. 아니 사실 많았을 거 같다.


그래서 요즘은 좀 의도적으로 바뀌려고 노력하고 있다. 팀을 이끄는 입장으로서도 따뜻한 사람이 내는 효율에 대해서 많이 느끼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피드백도 받아들여지기 수월한 방식이 있고, 특히 사람마다 그 방식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100%를 맞춰낼 순 없어도, 전달 방식을 고민해 보는 데에 따뜻함이 있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이왕 나쁜 소리를 해야 한다면 자기 효능감에 최대한 스크래치를 안 내는 방향을 선택하고 싶다. 절대적인 시간만 봐도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크고, 일과 자신을 분리하는 일이 어렵다는―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하기도 하다는―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문상훈 님의 말처럼, (이제부터라도) 지적은 최대한 글이 아닌 말로 하려고 하고, 칭찬은 말이 아닌 글로 남기려고 한다. 지난 3년 동안 저의 직설적인 피드백으로 상처를 받았을 모든 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 2명의 대화


P.S. 그렇다고 해서 일 못하고 따뜻하기만 한 사람이, 일 잘하고 성격이 까칠한 사람보다 낫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회사에는 일을 하려고 모인 거니까. 까칠하더라도 일을 잘하면 뒤에서 욕하면서라도 같이 할 수 있는데, 성격이 아무리 좋아도 일을 할 능력 자체가 모자라면... 여간 속이 뒤집어지는 게 아니다. 여럿 성격을 버리는 걸 넘어 남들 커리어까지 망칠 수 있다.




3. 나의 강점이 무엇인지, 이제야 좀 알겠다.


나의 강점은 무엇일까 오래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뭔가 감각은 뾰족한 것 같긴 한데 뒷심이 부족하고, 숫자는 얼추 다루지만 그렇다고 톱클래스는 못 되고, 팀 리딩을 기가 막히게 해서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그래도 이것저것 발을 걸쳐놓은 영역에서 간간히 찾는 목소리가 있으니 적당히 쓸만한가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나는 처음 하는 일을 잘 해내는 것 같다. 조직 내에서 모두가 처음 하는 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누구도 나서지 않는 사업. 그런 일들이 내게 온다. 나도 당연히 처음이다. 그렇지만 그냥 한다. 특별한 공식은 없다. 그냥 눈에 보이는 문제를 정의하고, 하나씩 해결해 나간다. 분석을 해야 하는 일은 분석을 하고, 부딪혀야 하는 일은 현장으로 나가고, 관계로 할 수 있는 일은 어떻게든 비벼서 진행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기 싫을 때도 많다. 마찰도 많고 좌절도 많다. 근데 뭐 별 수 있나. 하기로 했으니 하는 수밖에. 일할 때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뭐. 그러다 뒤를 흘끗 보면 많은 길을 와 있다.


image (3) (1).png 작년엔 뜬금없이 전사 부스 기획도 했음


이번에 맡은 신사업은 장장 5개월을 론칭에 매달렸다. (제약회사의 제품 개발과 거의 비슷한 업무다) 브랜딩을 하고 스토리를 입히는 일부터, 일정을 짜고, 정책을 만들고, 콘텐츠 기획을 하는 등 처음부터 차근히 쌓아나갔다. 물론 혼자 한 것은 아니다. 에이스 디자이너님을 꼬셔서 브랜딩 및 제품 사진 촬영을 하고, 생산 팀원들에게 설비와 공정에 대해 전수받고, 본사 팀원들과 매주 스크럼을 하면서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인고의 세월을 거쳐 5월에 론칭한다. 주변 팀원들은 "잘 될 거 같은데?" 라며 바람을 넣기 바쁜데, 나는 하도 많이 들여다봐서 이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일단 어떻게든 되겠지.


컨셉 사진 촬영
공정과 설비 공부


사내의 인재 기준과 별도로 개인 회고에 써먹고 있는 아홉 가지 인재의 덕목을 소개한다. 성과회고를 마치고 다시 읽어봤는데, (몇 가지 부분에선 아직 한참 모자라지만) 대체로 엇비슷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 혼자서 꽤나 뿌듯했던 순간.

조직의 생산성을 이끄는 인재는, 자신의 분야에 정통하면서도 이타심을 바탕으로 조직 내/외부와 원활하게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사람, 조직이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에 자신을 연계시킬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다.

1. 높은 책임감과 능동성을 바탕으로 탁월함을 추구한다.
2. 가치와 과정을 중시한다.
3. 안정적인 자존감을 바탕으로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4. 겸손하고 자신의 약점을 숨기지 않으며 진솔하게 소통한다(앞뒤가 다르지 않다).
5.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파악하고자 애쓰고, 이와 관련한 책임 편향―관계에서 자신이 상대에게 공헌하는 정도를 부풀리는 경향―을 극복할 줄 안다.
6. 자기 직무에 대한 전문성과 스스로에 대한 눈높이에 견주어서 타인이나 타 직무를 예단하는 일이 없다.
7.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타적으로 타인과 동료를 돕고자 한다.
8. 높고 신중한 안목을 바탕으로 조직 내 이기주의자, 프리라이더를 분별해서 대응할 줄 알며, 이타심이 자칫해서 자신을 갉아먹지 않을 정도로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전략을 갖는다.
9. 관계의 상호의존성을 잘 인식해서, 주변을 빛냄으로써 전체를 빛나게 하려고 한다 (승리를 독식하지 않고 공유한다).

<초개인주의>, 상효이재




다음 목표 : 스피드, 스케일, 스타일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정규 님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초창기부터 제일 고민이 그것이죠. 스피드, 스케일, 스타일. 지금은 이 셋 중에 어떤 것도 먼저 성취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피드가 규모를 만들어주는지, 스타일은 스케일이 따르면 생기는지, 부러 만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출판하는 마음>, 은유


이젠 얼추 일이 몸에 익어 당장의 업무에만 급급하지 않고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부족함도 더 많이 보인다. 다른 말로 하면 성장의 여지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스피드, 스케일, 스타일은 항상 고민인 주제다. 어떻게 하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속도를 유지할 수 있지. 어떻게 하면 초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규모를 키워나갈 수 있지. 입장이나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철학은 어떻게 만들 수 있지. 그런 질문들을 한다. 기획이 업인 직장인으로서도, 그냥 인간으로서도 말이다. 언젠가 일을 그만두는 날이 온다면,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스피드. 스케일. 스타일, 세 가지를 모두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사람으로.




마치며 : 권태기(?)부터 극복하자


화면 캡처 2024-08-29 194417.png 강민경 님의 번아웃 상담기 中


그나저나, 입사 3년 차는 직장생활 권태기 위기라고들 한다. 나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현재 약간 마일드한 번아웃 증세를 겪고 있다. 예를 들면 의사결정이 예전만큼 빠르고 날카롭지 못하다. 간단한 결정도 자꾸 미루게 된다. 명료하게 판단이 잘 안 되는 느낌이다. 점점 슬랙 멘션은 쌓이고 업무 텐션은 줄어들고 있다. 거기에 더해 자꾸만 어딘가로 떠나고 싶고, 회사 생활이라는 관성을 극복하고 싶고, (또다시) 역마살이 도지는 것 같고 그렇다. 최근엔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연차 열흘 갈기고 미국행 티켓을 질렀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근로자의 날 모두 푹 쉬셨길 바라며, 다음엔 번아웃 극복기로 찾아오겠습니다. 부디 찾아올 수 있기를.. 모든 직장인 화이팅입니다.


(2025.05.01)




한편, 이동진 평론가는 인터뷰에서 '애초에 노동은 징벌이었다'며 일에 대한 본인의 관점을 공유했는데, 권태기인 입장에서 꽤나 재밌게 봤다. 안 보신 분들은 한번 보시길.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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