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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의 뜰 Dec 22. 2021

단정하게, 야무지게

[잘 견뎌온 시간]



보자기 포장을 배웠다. 작년 연말에 보자기로 곱게 포장한 책을 선물 받았는데, 얼마나 감동이었는지 나도 그런 선물을 해주고 싶은 마음에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보자기가 선물의 가치와 격을 돋보이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은은한 색과 천의 부드러운 느낌은 덤으로 좋았다. 하지만 보자기에는 더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보자기는 기특하다. 둥근 것은 둥근 대로, 네모진 것은 네모진 대로, 길쭉한 것은 길쭉한 대로 모습을 없애지 않고 그대로 살린다. 책을 싸면 책보자기, 꽃을 싸면 꽃보자기, 도시락을 싸면 도시락보자기가 된다. 보자기는 자신이 감싸고 있는 물건의 모습을 그대로 살리는 ‘포용과 배려’의 도구였다. 이어령 교수는 보자기의 특성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보자기는 물건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는 유연성이 있고, 풀어지면 다시 자기 모양으로 돌아오는 겸손한 도구라고. 참으로 명쾌한 말씀이다.   

 

보자기 포장을 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뭉클함으로 가득했다. 가슴에 무엇인가 꽉 차는 듯 했다. 사실 나는 두렵고 무서웠다. 남편의 퇴직으로 느닷없이 가장이 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코로나 19 감염에 대한 불안감일 수도 있고, 서로를 멀리하면서 누적된 외로움일지도 모른다. 보자기천을 만지는 동안은 마음이 정말 안온했다. 느티나무 그늘아래 홀로 흐느껴 우는데 누군가 다가와 괜찮다고 어깨를 두드려 주는 손처럼 참 부드럽고 다정했다. 흔히 말하는 ‘힐링’이고 ‘소확행’이었다.


보자기 포장을 다 하고 나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매듭을 짓는 일이다. 와인 병처럼 길쭉한 선물에는 ‘수국 매듭’을, 직사각형 박스는 ‘궁중 매듭’을 했다. 소박한 광목보로는 책이나 지갑을 쌀 때 유용한 ‘단아한 매듭’을 익혔다. 매듭은 포장의 마무리이자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매듭은 꼼꼼하고 단단하게 매야 한다. 느슨하고 어리숙하게 매듭을 지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보자기라해도 흐트러지거나 풀어져 애써 포장한 선물이 헛수고가 된다     


보자기 매듭처럼 세상 모든 때에는 다 끝맺음이 있다. 하루의 끝에도, 한해의 바뀜도 끝맺음의 때가 있다. 물론 언젠가는 생의 매듭과 마주할 때도 온다. 문득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나에게 던져본다. 그리고 나에게 그 해답을 몸소 보여주신 선배님 한 분을 떠올린다.     


13년 전 가톨릭대학교 병원 평생건강증진센터 개원준비단에 입사했다. 엄청난 프로제트를 준비하다보니 항상 긴장하며 지냈다. 병원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좋았던지 밥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식판을 들고 일어서는데 차장님의 단호한 음성이 들렸다.

“먹을 만큼 덜어와야지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귀한 밥을 아깝게 쓰레기로 만들면 되겠니. 다음부터 지켜볼게야.” 처음이었다. 밥 먹는 일로 내게 그렇게 호되게 야단쳐 주신 분은. 그렇게 차장님은 때론 단호하고, 때론 다정하게 나를 이끌어 주셨다.      


10년 전 내가 병원을 떠난 후 차장님의 유방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복직을 하게 되셨는데, 원래 있던 부서 관리자가 아니라 소화기내과 내시경실로 발령이 나셨다. 나는 병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분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발끈했다. 하지만 차장님은 흔쾌히 내시경 업무를 배우셨다.

3년 동안 내시경실에서 근무하신 후에는 본관1층 엔젤 간호사로 5년, 그리고 작년 코로나19 감염이 시작되면서 부터는 임시선별진료소 근무를 하셨다.

부서를 옮길 때마다 "그 곳에도 내가 쓰임이 있으니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하셨다.  

낮고 후미진 곳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주인공이 되셨다.       


어느 날은 3개월 동안 걷기 훈련을 하시더니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셨다.

“현경아, 걷는 게 너무 힘드니까 세상의 고민 근심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더라. 그저 발걸음 하나만 보이더라” 힘들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말씀을 기억한다.  

오 세브레이로의 성당에서 크레덴시알을 발급 받고 시리아에서 설레는 첫발을 닫던 새벽안개 사진을 기억한다.

산속 계곡으로 트레킹 할 때면 맑은 물의 물고기들이 아프면 안되니 발도 담그지 않는다는 차장님은 연차휴가를 캄보디아 의료봉사와 선교활동으로 보내시면서도 늘 빚진 사람이라는 말씀을 나는 기억한다.

코로나 선별진료소에서 엄동설한과 찜통더위, 태풍과 긴 장마를 견디신 날들을 기억한다. 냉방조끼를 입으며 전투준비마치고 하루빨리 코로나19가 물러가서 본관에서 근무하고 싶다며 어벤져스처럼 팀원분들과 함께 선별진료소 앞에서 본관을 바라보시던 사진도 나는 기억한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원래 그랬다. 이제 나도 조금은 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길이 있는 곳에 뜻이 있는거라고.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무슨 뜻이 있을 거라고.     


올 해 마지막 날 차장님은 정년퇴임을 하신다.

보자기 매듭을 보고 있자니 차장님이 보자기 같은 분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생 다니던 직장을 떠나야 하는 정년을 앞두고 어쩌면 허전하고 또 설레는 하루하루를 보내실 차장님. 그 어떤 것이든 인생의 한 매듭을 통과하는 과정은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분명 지금 단단하고 야무지게 매듭을 짓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매듭을 마무리한 두 손을 다가오는 다음 인생을 기다리며 무릎위에 가만히 올려놓고 계실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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