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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의 뜰 Jun 07. 2022

나는 충실하고 느리게 성장하고 있는가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 잔도길 트레킹을 마치고 고석정으로 장소를 옮겨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파라솔 벤치에 앉아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 어르신이 다가와 동석해도 되냐고 물으시기에 어서 앉으시라고 했다.


“좋은 카메라로 무슨 사진을 찍었수?”


“한탄강 주상절리 잔도길이요”


“나도 한때 사진 좀 찍었지. 지금은 그냥 눈에만 담아두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대 여섯 분이 우르르 더 오셔서 동그랗게 모여 앉으셨다. 보기에도 여든은 넘어 보였다. 어르신들은 모두 인천 ooo동호회 리본을 달고 계셨다.


“인천에서 오셨나 봐요. 저도 오래전 인하대병원 건강검진센터에서 근무한 적이 있거든요.”


남자 어르신들 틈에 혼자 있으려니 뻘쭘해서 가벼운 인사 정도로 말씀드린 게 발단이었다. 그러냐고 하면서 한 분 한 분 병원 다니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셨다.


순환기 내과 00 교수님께 심장 혈관에 스탠트 시술받으셨다는 분.

허리가 심하게 아파서 정형외과 00 교수님 진료 보시는 분.

신장내과 00 교수님이 20년 넘게 당뇨 주치의라는 분.

암수술 후 지금은 항암치료받고 계신다는 분.

그리고 원무팀 000 부장님을 잘 아신다는 분.


예전에 근무했을 때 진료 연계해 드렸던 교수님과 부장님들이 여전히 진료 중이시라니, 오랜만에 그분들의 성함을 들으니 신기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뜩 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성공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찼던 30대 시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잘 될 거라는 희망은 거품처럼 날아가고, 뒤늦게 시작한 학업이나 자격증들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상상했던 커리어 우먼은커녕  남겨진 건 점점 쇠약해지는 몸, 아프신 부모님, 가장으로서의 책임, 일에 대한 두려움들뿐이라니.


어두워진 내 표정을 보신 걸까. 가장 먼저 앉으셨던 어르신이 분위기를 살리시면서 사진 한 장 찍어달라며 동료분들과 포즈를 취하셨다.

전화번호를 주시면서 사진을 꼭 보내달라고 하셨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 되었다며 어르신들은  일어나셨다


어제 뒤늦게 사진을 정리하다가 그날 어르신들 사진을 봤다. 약속대로 핸드폰 번호로 사진을 전송해 드렸다. 시간이 없어서 사진 정리가 늦어졌다는 변명과 함께.

그리고 답장을 보내주셨다.


“보내주신 추억의 사진 잘 받았습니다. 사진을 보니  프로작가 시네요. 그리고 늙은이가 한 말씀드립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크는 나무는 느립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세요. 팔십 넘게 살아보니 그래요”


낯선 여행길에서 스치듯 만난 아름다운 인연 덕분에

뼘 한 뼘 느리고 충실하게 성장하는 삶을 생각해본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늘 초보지만

당당하게 나만의 속도로 가겠노라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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