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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이피는섬 Mar 11. 2022

2022년 알프스의 소녀

진정한 서른아홉 살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유튜브로 음악을 켜놓고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저녁 식사를 한다. 유튜브로 강의를 들으며 집안일을 하고 자기 전에도 유튜브를 30분에서 1시간 정도 보다가 잠든다. 이렇게 쓰고 보니 유튜브 중독자가 따로 없다.

평일에는 하루 종일 일로서 책과 원고 보는 일을 계속하니까 집에서는 좀 다른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게 뭘 하더라도 결국에는 유튜브가 된다. 새로운 트렌드도 알 수 있고 유익한 콘텐츠들도 많지만 자기 전 유튜브 보기는 끊어야지 하면서도 끊어지지가 않는다.  


최근 몇 년 동안 질리지도 않고 보는 자기 전 유튜브 영상이 있다. 죽순 캐기, 버섯 따기, 사탕수수 수확하기, 옥수수 따기 같은 영상이다. 중국 시골의 한 아가씨가 밭에서 감자를 캐고, 그걸 가져다가 볶고 지지고 해서 가족들과 식사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요리 재료는 매번 바뀐다. 토란을 캘 때도 있고 연근을 수확할 때도 있다.

그 채널을 계속 봤더니 비슷한 영상들이 계속 떴다. 중국 또 다른 지역의 할머니가 나오기도 하고 자연인 같은 아저씨가 주인공인 것도 있다. 인도네시아로 추정되는 지역의 비슷한 콘셉트의 영상들도 나온다. 그렇게 흘러 흘러서 이제는 남태평양 어느 바닷가에서 해루질로 조개 줍는 사람 영상도 보고 낙지를 잡고 거북손을 따는 영상도 보고... 끊임없이 추천 영상이 올라온다.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무언가 쌓여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을 나는 옛날부터 좋아했다. 유튜브 영상 속의 풍경들은 낯설면서도 그렇지가 않다. 내가 살았던 시골은 아니지만 어딘가 조금씩은 닮아 있으니 말이다.

나도 어릴 때 부모님을 도와 감자, 고구마를 캐기도 하고 봄나물을 뜯기도 했었다. 그래서 자연 속에서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의 재미를 안다. 지금은 할 수 없으니 그립기도 하고.

계절마다 산과 들과 바다에서 주어지는 것들을 부족함 없이 누리던 시절. 시골에 살 땐 시골에 사는 게 싫었는데 그 시절이 지금은 가장 그립다.


밤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그 단순하지만 풍족하고 여유로웠던 기억을 더듬는 나를 보면서 어릴 때 읽었던 <알프스의 소녀>가 떠올랐다. 알프스 산속에서 할아버지와 양을 치며 살던 하이디가 도시로 나와 지내면서 그곳을 그리워하다가 몽유병에 걸린다. 결국 하이디는 알프스의 집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다.

고향이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매일 밤 시골 풍경의 영상을 보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있다.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진 만화 <리틀 포레스트>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 것 같다. 한번 본 책이나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은 나에게 엄청 드문 일인데 두 권짜리 만화책인 <리틀 포레스트>읽고 또 읽고, 10번은 본 것 같다. 그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게 단순히 '도심 생활에 지쳐 고향으로 도망친 주인공이 시골에 살면서 농사짓고 힐링하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라는 내용이 아니어서이다. 사람마다 책과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달랐겠지만 나는 그 책을 볼 때마다 무언가 근원적인 에너지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힘든 마음을 여유로운 시골 풍경과 소박한 먹거리로 달랜다는 이야기였다면 오히려 시골 생활을 낭만적으로만 보는 판타지라고 생각했을 거다.

적어도 원작 만화에서 그려진 <리틀 포레스트>의 삶은 거대한 자연 앞에 겸손해지는 삶이다. 거대하고 잠잠한 대지의 에너지가 생명으로 피어나는 기적을 매일 경험하며,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면서 점점 강해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겉모습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 삶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살아갈 꿋꿋한 힘을 얻는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 원작 만화 속에 나온 음식들은 일본 음식이라 아예 먹어보지 않은 것도 있고 재료조차 생소한 것도 많았다. 그래도 그 맛과 느낌을 대략 느낄 수 있는 건 아마도 그 계절의 감각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제철에 나는 과일과 채소를 찾아먹는 것도 그 계절에 그 음식을 먹었던 기억과 그걸로 온전히 계절을 느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벌써 몇 년째 봄다운 봄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 그냥 마음껏 걷고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소중한 일상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나도 겸손히, 잠잠히 봄을 기다린다.  

오늘도 산속에서 두릅 따고 봄나물 캐는 영상을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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