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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이피는섬 Jun 01. 2022

오래된 오해

진정한 마흔 살

내가 대학생 시절에 엄청 핫했던 작가가 있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작가였다.  

작품이 영화화되기도 했으니 책을 안 읽어봤더라도 그 작가의 작품명은 누구라도 알만한 정도였을까.

한참 소설을 많이 읽을 때라 그 작가의 작품들도 읽었다. 재미있고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곧 그 작가는 책만 냈다 하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아주 유명하고 대단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작품도 아주 많이 써내서 이후 직장인이 되어 바빠진 내가 도저히 다 읽지 못할 속도로 많은 책들을 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작가의 작품이 더 이상 재미있지가 않았다. 그 작가뿐 아니라 그 시기에 국내 문학을 점점 안 읽게 되었던 것 같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는 어려운 작품은 짜증이 났다. 작가 자신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걸까 싶었다. 하지만 또 아무런 고민도 없이 너무 쉽게 쓰인 글들에도 화가 났다. 새로운 생각과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한없이 가벼운 글. 이런 글은 나도 쓰겠네. 그러면서 차츰 멀어졌다. 소설로부터.


내가 그렇게 조용히 뒷걸음쳤다면, 그 작가에 대한 애정이 넘쳤던 친구는 독설을 날리고 뒤돌아섰는데 아마도 그 작가의 초창기 작품들이 너무나 새롭고 멋졌기 때문에 이후의 작품들이 그만큼의 충격을 주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OOO? 그 작가는 맛이 갔어. 맛이 간 지 오래됐지."

친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혹독한 그 독설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너무 심해서가 아니었다. 그 말이 내 속을 시원하게 해 줘서였다.

그랬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 작가는 확실히 변했고 새롭지도 않은 작품을 자꾸만 써낸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내 눈엔 정말 변변찮아 보이는 그 작품들을 찬양하며 리뷰를 달고 있다. 하지만, 그래. 내 생각이 맞았잖아.


작가는 변했고 퇴색했고 이제 그 작가의 작품을 안 읽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어졌다. 왜냐, 그 작가는 맛이 갔으니까. 다만 나는 차마 그런 가차 없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쏟아지는 작품들을 읽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한때 팬이었던 사람으로서 부담과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포함해 누구에게라도 아주 냉정한 평가를 서슴지 않는 친구를 통해 나는 비로소 그 불편함과 의무감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다행히(?) 작가는 여전히 처음 문단에 혜성같이 등장했던 그 천재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유명한 작가였지만 예전처럼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 맨 꼭대기에 오르지 못했고 그의 작품이 어찌 됐든 그를 찬양하고 추앙하던 무리들도 매년 등장하는 신인작가들에게로 분산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내 평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만족했다.

 

그렇게 십몇년이 지나서, 어느 날 그 작가의 새 소설이 베스트셀러 1위에 우뚝 선 모습을 보았다.     

깜짝 놀랐다. 오랜만에 그 작가의 책을 사서 읽었다.

그의 천재성이 돌아왔을까? 서둘러 읽어본 책의 마지막을 덮으며 나는 또 실망했다.  

그동안 쏟아내던 (내 눈에) 별 의미 없는 글들보다는 나았지만 그저 그런 정도일 뿐이었다. 오래전에 내렸던 작가에 대한 내 결론을 철회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러고 또 한참 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작가는 여전히 내 기준에 그저 그런 책을 내고 있었지만, 여전히 잘 나가는 작가였다.)  


우연히 그 작가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그는 매일 글을 쓰기 위해 많은 것을 공부하고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혹독한 평가를 내렸던 그의 작품들도 그 과정들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노력을 알아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은 작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담담히 말하고 있었다.   

작가란 새로움을 찾는 사람이기 때문에 공부와 노력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을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다시 일어나서 또 그 일을 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 작가의 태도가 너무도 담담해서 더 와닿았다. 자신의 창작의 고통을 대단한 것으로 포장하지 않고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허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라톤 선수의 지난한 훈련의 시간들처럼 그 작가도 그런 자신만의 레이스를 게으르지 않게 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자신의 글이 가진 새로움과 반짝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작가 자신이 아닐까?            

그리고, 그 빛을 잃었을 때 그 사실을 가장 잘, 가장 먼저 아는 사람도 그 자신이 아닐까?     

나와 내 친구가 그 작가를 두고 말했던 냉정하고 혹독한 평가를 어쩌면 작가 자신은 누구보다 먼저 그 자신에게 선고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레이스는 그저 담담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쌓아놓은 찬란한 업적을 넘어서지 못하는 스스로를 혐오하지 않고...

그런 날은 앞으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그는 그럼에도 그 길을 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그저 그 길을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그가 대단한 아량과 용기를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가끔 엄청난 첫 작품을 남기고 이후로 글을 발표하지 못하는 작가들을 본다. 그런 사람들이 꽤 많다. 쓰지 못하는 건지 발표가 안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기 자신에게 들이대는 높은 평가 기준과 사람들의 기대라는 부담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예전에는 엄청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더 이상 그런 재능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재능은 잠깐 반짝였다가 짧게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재능을 넘어 탁월함을 만드는 것은 숙련의 시간이다. 성실하게 쌓아온 숙련의 시간은 정말로 배신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렇게 얻어진 것만이 진짜 가치 있는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너무 일찍 그 작가에게 혹독한 평가를 내리고 말았지만 그 작가는 묵묵히 탁월함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우연히 보게 된 그 작가의 인터뷰를 보며 내 오래된 오해를 풀었다.

나는 그 작가에 대해 내 멋대로 생각했다. 한 번의 반짝임으로 운 좋게 작가가 되어서 그 후론 뭘 써내도 좋아해 주는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유유자적 사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오해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물론 나는 여전히 그 작가가 내놓는 작품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평가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작품이 아닌 작가에 대해서는  계속 기대하고 응원한다.     

날마다 자기 자신의 한계에 정직하게 부딪히며 직면하는 용기를 가진다면, 그 담담하고 묵묵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분명히 어느날 그 자신 속의 어린 천재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여줄 날이 올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응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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