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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이피는섬 Jul 04. 2022

hide-and-seek

진정한 마흔 살

나는 취향이 없다.


굳이 취향을 찾자면 단순한 걸 좋아한다는 게 취향이다. 화려하고 무겁고 버라이어티 한 걸 부담스러워한다. 옷이나 액세서리나 인테리어나 모든 면에서. 아니, 그런 취향을 논할 수조차 없을 만큼 가진 게 없다는 게 더 정확하다.


취향을 가질 만큼의 물질적, 정신적 여유 없이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내 자의가 아니라 여러 번의 이사라는 과정을 통해 취향이란 걸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유일하게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책이었는데 이제는 책도 많이 줄었다. 한번 보고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 아니라면 주위에 필요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줘 버린다. 예전엔 다른 건 몰라도 책에 대한 욕심은 컸는데 반복된 이사에 지쳐버려서 이런 집착마저 사라졌다. 이사를 많이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책만큼 골칫거리도 없다.  그래도 순간 방심하면 어느새 책이 쌓여 있다.


두 번째로 많은 건 옷과 신발일까? 하지만 거기에도 취향이나 고집은 없다. 경험상 이게 편하다, 좋다, 하는 것들이 있는 정도. 과감한 패턴도 화려한 컬러도 없다. 키가 작아서 최대한 깔끔한 인상을 주는 옷을 입는 것 같다. 치렁치렁하거나 눈에 띄는 화려한 아이템들은 부담스럽다.  


최근에 친구가 집에 왔던 적이 있었는데 늦은 집들이 선물이라며 인테리어 소품들을 사줬다. 내 취향은 두루마리 휴지나 세제 같은 사용 가능하고, 다 쓰고 나면 버릴 수 있는 것인데, 친구는 굳이 굳이 소소한 인테리어 소품을 사줬다. (선물의 법칙, 받을 사람의 취향보다는 내가 해 주고 싶은 걸 해 준다.)

그러고는 이제부터는 취향을 가져보라고 했다. 그게 삶을 훨씬 즐겁게 만들어 준다고.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나는 취향이 없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둘러보니 집에 생활용품밖에 없었다.

'실용적이고 단순하고 아무것도 쌓아두지 않는 게'  취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취향이 없는 거라는 친구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한다고 해도 취향은 있을 텐데 난 왜 이렇게 좋아하는 것 없는 무취향의 사람인 걸까. 취향은커녕 항상 '버릴 것이 없나'를 찾고 있는 나를 돌이켜보니 약간의 강박 같은 게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예전에는 취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다지 대중적이니 않은 음악을 듣고 인디락밴드의 CD를 모으던 시기도 있었다. 책도 읽지 못할지언정 일단 사두고 보기도 했다. 그랬던 나인데 살다 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스스로 '욕망을 거세'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니 나는 백화점에 가서도 명품은 하나도 구경하지 않는다. 꼭 살 계획이 없어도 구경하는 건 할 수 있는 건데 나는 아예 쳐다도 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하니 가질 수 없는 걸 가지고 싶어질까 봐 미리 선수를 쳤던 것 같다.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그냥 보고 예쁜 건 예쁘다고, 좋아 보인다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데 말이다.


물론 이건 하나의 가능성이긴 하다. 쇼핑뿐 아니라 돌아다니는 일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성향을 생각하면 굳이 스스로 '욕망을 거세했느니'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하지만.

지금 이토록 무취향의 인간이 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조금은 취향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는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고, 예쁜 것은 예쁘다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겠다. 굳이 먼저 외면하지는 말아야지.


내가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먼저 앞서서 다음을 고민하지 말고 솔직하게 반응하고 내 감정을 인정해 주자.


그리고 내 작고 소소한 취향을 존중하자. 내 취향을 내가 존중하지 않으면 누가 존중하리! 이사할 때마다 취향 따윈 나에게 사치라고 여기며 내다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을 꾸리고 옮기는 수고는 어쩌면 그때 한순간인데 나는 너무 쉽게 내 취향을 버려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취향뿐만 아니라 내 감정이나 취미, 내 소유... 그 모든 나 자신에 대해 나는 너무도 쉽게 포기했었다.

내가 원했던 것들이 꼭 나를 위협하기라도 하듯이.


가질 수 있는 것은 가져도 되고, 가질 수 없다고 모두 불행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떤 것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고,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한 것도 있는데 말이다.  


다시 제로의 선에 서서 아이 같은 눈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봐야겠다.

괜히 몇 단계 앞서 나가서 선을 그어 버리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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