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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동이 Oct 27. 2019

#2 아내의 임신을 맞이하는 자세

임신5W, 횡단보도 앞에서




나에게 병원이란 정말 가기 싫은 곳이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감기 때문에 이비인후과를 가거나 운동하다 허리, 무릎을 삐끗해 종합 병원을 찾기도 한다. 또는 주변에 아픈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위로차 방문한다. 다양한 이유로 병원을 가지만 모든 순간이, 특히 병원에 들어서는 문 앞이 너무 싫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어렸을 적 기억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는 엄마한테 이끌려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치아 교정 시간을 겪었다.(의사 샘들이 발버둥치는 나를 막기 위해 팔다리를 끈으로 묶기까지 했다ㅜ) 고등학교 때는 농구하다 다리가 부러져 전신 마취를 했는데, 마취가 풀리면서 휴우증으로 편두통을 선물 받았다. 나 뿐일까. 뇌출혈로 쓰러졌던 엄마, 잦은 병치레로 병원을 드나들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아픔이 병원 복도를 지날 때면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잔잔히 스며나온다.



그렇게 가기 싫었던 병원을, 이제는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간다.

아픔을, 고통을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닌 새로운 생명을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다.

몸 속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져 있는 조그마한 점이 우리의 인생에 커다란 빛이 되길 희망하며, 이전의 고통을 뒤로 하고 또 다시 병원 문을 두드린다.


나에게 이런 날이, 병원을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못해 흥분으로 가득 찬 날이 올지 상상이나 했을까.






> 여기 조그만 점 보이시죠? 요게 아기집에요. 일단 자리는 잘 잡았습니다. 임신 축하드려요.


월요일에 출근 하자마자 아내와 함께 방문한 회사 근처의 병원에서는 볼펜으로 찍어 놓은 듯한 좁쌀같은 점 보았고, 금요일에는 앞으로 정기 검진을 다닐 병원을 검색하여 다녀왔다.

4일만에 다시 확인한 아기집은 그새 5mm가 자랐고, 희미하지만 난황을 볼 수 있었다.

(난황: 배아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영양물질)


흑백으로 된 초음파 사진은 처음 보는 사람이 쉽게 분간하기 어렵다. 의사쌤이 순식간에 아기집을 찾아내는 (당연한) 솜씨에 감탄하고, 기계처럼 감정 없이 내뱉는 축하 멘트에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고, 아기집과 난황이 잘 자리잡았다는 안도감이 순식간에 교차했다. 그러나 이 모든 감정은 아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기쁨에 비할 수 없다. 눈과 입이 귀에 걸려 의사와 간호사에게 연신 감사를 연발하며 병원을 나섰다.



아내와 두 손을 꼭 붙잡고, 택시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옹골차다.


. 그럼 우리 이제 뭐부터 시작해야 할까?

.. 응? 뭘 시작해?

. 응, 임산부 신청도 해야 하고, 집 정리도 하고, 우리 이제 할거 많지.

.. 벌써?...



확실히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느낌적인 느낌이다)

가장이 된다는 벅찬 뉴스와 금요일 반차가 주는 한가로움, 이 환상의 조합을 아(이스)(메리카노)를 마시며 조금이나마 누리고 싶었는데 느닷없이 다음 '일'을 준비하자고 한다. 깜박이를 켜지도 않고 훅 치고 들어오는 아내의 멘트에 다음 '일'을 논했다.


그래도 일단 아아 한잔을 때리자.






사람들은 임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 역시 처음에는 임신 과정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을 한 뒤 자궁에 착상되면 임신이다. 이후 태아는 엄마의 에너지를 쏙쏙 받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나 하나의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출산이다.

그런 아내 곁에서 남편의 역할은 무거운 짐은 절대 들지 못하게 하고 한겨울에 팥빙수를 찾아야 하며 마지막까지 순산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보조자' 역할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지금 나의 아내는 입덧을 하고 뒤뚱거리는 시간을 지나 점점 배가 불러온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남편으로서 내게도 준비할 것이 저어어어엉말 많다는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임신과 출산, 육아까지 과정에 많은(x10,000)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복잡하다.

 

아무도 나에게 여성의 임신이 이런 것이고(교과서에 배운 것은 위에 다 썼다) 아내의 호르몬이 시시각각 변하며 그에 따른 남편의 역할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좋은 아빠'와 '좋은 남편'이라는 허울만 떠들어 댔을 뿐, 그 밑바닥의 실체를 보여 주지 않았다.



덜컥 임신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버린 지금.


앞으로 난 무엇을 해야할까?




0.96cm 아기집, 잘해보자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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