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이 '오빠'에서 '야'로 내려앉고 설거지는 쌓여만 가며 화장실이 더럽다고 투덜거리고 그날 입은 옷은 방에 처박아 둔 채, 모든 말에 틱틱대며 사소한 일에 짜증을 쉽게 내는....??
그런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나 :), 정 반대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나에게 영감을 줬던 아내가, 삶의 의욕을 잃었다. 마치 세상에 아무것도 안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입덧과 함께 모든 것을 멈췄다.
아내는 파워 인스타그래머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인스타에 올린다. 흔히들 말하는 1일 1 인스타족. 심지어 여행 중에는 하루에 열개 이상의 사진과 글을 피드에 올린다. 그런 행동은 주변 팔로워들에게 민폐라며 자제를 요청했지만 본인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인스타그램을 자랑하는 수단보다는, 너와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로 생각한단다. 음, 그래....? 다른 이유보다 내 일상도 같이 담긴다는 말에 잠자코 있었다.
실제로 인스타에 올린 피드는 우리의 추억을 회상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임을 입증했다. '그게 언제였지? 하는 질문이 생기면 여지없이 아내의 인스타를 켠다. 연말이면 업로드된 사진을 보며 한 해를 되돌아본다. 수백 개의 게시물이 정갈한 사진과 함께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모습을 보니, 은근히 멋져 보인다. 필(feel) 받을 때마다 몇 번 끄적인 내 피드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그 후로는 아내에게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심지어 인스타를 하는 시간은 방해하지 않고 존중해 줬다. 기록은 삶을 풍부하게 만드니까.
그랬던파워 인스타녀가 업로드를 멈췄다. 더 이상 인스타그래머블한 곳을 방문하지도, 찾지도 않는다.
그리고 책 읽기를 멈췄다.
누군가 나에게 아내와 결혼 후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아내를 만나고 '책'을 선물 받았다고.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던 아내는 평생 책 한 권 완독 하지 않은 남자를 만났다. 남자가 아주 출중한 매력이 있었으니 사랑에 빠졌겠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싫어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점은 꽤나 놀라운 일이다. 속으로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녀의 선택에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결론적으로 책 읽으라는 말 한마디 없이 나를 책의 바다에 빠트렸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이 삼십 년 동안 이루지 못한 꿈을 아내는 2년 만에 달성했다.(이래서 아내에게 앙팡이 교육을 위임하고 싶다, 비결은 다음편에 공개하겠다)
책벌레 까지는 아니지만, 아내는 책을 좋아한다. 출, 퇴근 시간 혼돈의 인파 속에서 책을 편다. 때론 팀 점심을 거르고 회사 도서관에서 청와대를 보며 책 읽는 여유를 즐긴다. 내가 늦잠을 자는 주말이면 커피 한 잔을 내려 책을 탐독한다. 여행 준비의 마지막은, 가서 읽을 책을 골라 가방 위에 살포시 올려 놓는 것. 여행의 목적지가 국내라면 로컬만의 특색있는 책방을 방문하는 것이 우리의 여행 필수 코스가 되었다.
교보에서 기분 좋게 구매하는 새 책이든 도서관에서 어렵게 대출한 낡은 책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좋은 책을 선별해서 읽는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책을 멀리한다. 종이 냄새가 역하다며 상상치도 못한 발언으로 나를 당황시켰다.
그 외에도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하고 있다.
저녁에 잠깐 보는 TV도 울렁거린다며 금지령이 떨어졌다. 소리도 듣기 싫단다.(그럼 나는??!!) 숨도 크게 쉬지 말까? 하며 농담을 던지려다가 표정을 보고 꿀꺽 삼켰다. 입덧 때문에 가끔 토를 해서 지친 것 같은데, 생각 이상으로 컨디션이 안 좋아 보였다. 바람 쐬러 나가는 건 힘들고, 먹으면 토하고, 다른 생활은 울렁거려서 못하고. 정말 숨만 쉬고 누워 있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앙팡이의 시간은 흘러가지만 아내의 시간은 여기서 멈춘 듯 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니 또 걱정이 앞선다. 폭풍 검색을 해보니 임신 중엔 무기력감이 찾아온다고도 하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사람마다 다르니까. 사람마다 다른 게 가장 큰 문제다. 정답을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몰려오기 때문에.
이 시기에 여성은 심적으로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임신선; 명치에서 시작해 배꼽까지 이어지는 가느다란 선, 이 희미하게 생긴다. 남성들의 자부심, 배랫나루와는 다른 털도 아닌 것이 여성의 임신을 알린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가슴과 유륜이 커지기 시작하고 색이 짙어진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혹여나 변하는 몸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아내를 잘 다독여 줘야 한다는 점! 입덧할 때 잘해주지 않으면 평생 간다는 선배들의 전설적인 명언처럼, 여기에 굳이 쓸데없는 멘트로 아내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 안 그래도 몸이 변해서 서글픈 건 여자들인데 남편마저 지적할 필요는 없다.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으니, 오히려 아내들의 '몸'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고 묵묵히 챙겨주는 것을 권한다.(지적해서 좋은 꼴 보지 못한 선배의 경험담이다)
올 한 해, 정말 바쁘게 일했는데 하필 6월 말 피크를 찍었다. 담당하는 서비스의 새로운 상품이 출시되면서 정말 눈코 뜰 새 없었다. 안그래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환자(같은 아내)의 저녁을 혼자 먹게 두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뭐 하고 있나 물어도 아무것도 안했다는 답변만 돌아온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겠지. 다행히 좋은 팀장과 사수를 만나 일찍 퇴근하고 아내를 챙기라는 배려를 받았지만, 바쁜 시기인만큼 아내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임신을 했는데 몸무게가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 앞에서 나의 고민은깊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