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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소나 Apr 16. 2024

#7. 신문배달 1

고등학교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내가 중학교 때 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다. 시험은 한 번만 볼 수 있었으며, 원하는 고등학교에 떨어지면 똥통이라고 불리는 학교로 강제 배정을 받았다. 나는 공부를 못했다. 얼마나 못했는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숫자를 셀 때, 열 손가락이 부족해서 발가락까지 사용했을 정도다. 그래도 마음먹고 벼락치기로 공부하면 60명 중의 30등은 했다. 누군가 "네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습관이 안 들어서 그래."라고 말한다면, "나도 공부를 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면, 잘할 수 있다고"라고 따졌을 것이다. 그런데 따지면 뭐 하겠는가. 공부를 못하는 것은 사실인데. 나는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어서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볼 때 두 번째로 좋은 학교(지원할 수 있는 학교는 총 여섯 곳이 있었다.)를 지원했고 당연히 떨어졌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너 00 고등학교 가라."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고등학교는 똥통 중에서 최고 똥통으로, 공부를 못하는 학생과 일진의 집합소인 학교였다. 그곳에 입학하는 순간 대학교 진학은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거절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와 어떤 고등학교를 갈 것인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생님이 말씀하신 학교를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1년 재수해서 네가 지원했던 고등학교를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네"라고 했다. 이 모습을 본 큰 형(나하고 9살 차이가 난다)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너 그 고등학교 가면 대학교 못 가는 거 알지? 너 검정고시 알아? 그 시험을 보면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졸업할 수 있어." 나는 형의 말들 듣고 "어"라고 했다. 그렇다. 나는 A형이다(나는 MBTI를 믿지 않는다.). A형은 잘 삐지고, 생각도 많고, 누군가의 부탁이나 권유를 잘 거절 못 한다. 고등학교 선택도 그랬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맞는 것 같고, 아버지와 형의 말을 들으면 그것도 틀린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형이 똥통 중의 똥통을 다니고 있는 살아있는 증인이기에 나는 형의 말을 듣고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했다. 담임 선생님은 "네가 몇 학년인데 재수야! 그냥 그 고등학교가!"라고 나에게 소리치셨다. 나는 아버지가 검정고시를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친구들은 "OO가 고등학교 포기했대, "라든지 "공부를 못하니 고등학교도 못 가네."라고 나를 험담하기도 했다.




  "너는 정신력이 문제다. 그런 상태로는 검정고시를 해도 안 돼."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새벽에 신문을 돌려라. 공부를 제대로 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내가 아버지의 말씀에 어떻게 대답했을지 다 알 것이다. "네!" 그런데 궁금했다. "나는 그렇다고 치자. 쌍둥이 형은 무엇을 잘못했다고 신문 배달을 하지?" 나의 추측은 세 가지였다. 첫째, 형이 좋은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아버지는 혼자 신문 배달하는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셋째, '쌍둥이는 한 몸'이라는 아버지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나의 결론은 세 번째였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나와 쌍둥이 형이 가장 많이 합창한 것이, "우리는 한 몸이다!" 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두 번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형과 나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동아일보(걸어서 30분 걸리는 거리였다)를 찾아갔다. 한 달에 90,000 만원,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월급이었다. 우리는 신문을 돌리기 위해서 새벽 3:30분에 일어났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신문사에 도착하면, 광고 전단지를 신문 사이에 넣는 일부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닐봉지도 챙겨야 했다. 신문을 배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배달할 집을 알아두어야 한다. 나는 일주일 정도 부장님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서 앞으로 내가 배달할 지역과 집을 외웠다. 어두운 새벽 모든 것이 낯선 동네에서 150개의 집을 알아두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 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눈을 감고 어떤 집에 신문을 넣어야 할지 대충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우리는 나이가 어려서 오토바이가 아닌 자전거로 배달해야만 했다. 자전거 앞 바구니에 30부 그리고 뒷자리에 120부 이렇게 150부가 준비되면 우리는 정해진 구역으로 가서 신문을 돌렸다.


  신문을 배달하면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어느 날 나의 구역을 다 돌리고 쌍둥이 형의 일을 도와주러 갔다. 그런데 형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다가 나는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떨고 있는 형을 발견했다. "왜 아직도 신문 안 돌렸어?" 형이 대답했다. "뒷집 4층에서 5층 계단 벽에 피가 있어. 무서워서 못 가겠어." 나는 장난하지 말라고 말한 후 신문 한 부를 들고 그곳으로 뛰어갔다. 나는 1층부터 3층까지는 열심히 뛰어서 형이 말한 4층의 계단에 도달했다. 그런데 갑자기 덩치 큰 물체가 나의 앞을 가로막고는 따지는 듯 물었다. "너 뭐야!" "신문 배달인데요..." 왜 하필 그 새벽에 그것도 그 시간에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단 말인가.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형이 말한 공포의 장소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정말 형이 말한 대로 피가 벽에 흥건히 묻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몇 초 후에 나는 정말 그것이 피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조금 더 몸을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피가 갑자기 진분홍의 페인트로 변해있었다. 페인트였다. 나는 쏜살같이 1층으로 내려가서 형의 손을 잡고 형이 본 것은 피가 아니라 페인트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형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나와 함께 나머지 신문을 돌렸다.


  쌍둥이 형은 나와 한 몸이다. 같은 날 태어난 또 다른 나이다. 우리는 항상 같이 붙어 다녔다. 누구보다 많이 싸우고, 같이 웃고, 함께 울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했다. 형이 힘들면 내가 도와주고, 내가 힘들면 옆에는 항상 형이 있었다. 이제는 왜 아버지가 형도 신문 배달을 시키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를 위한 아버지의 배려였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정신교육과 신문 배달의 목적이 우애를 다지는 것과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왜 아버지는 신문 배달을 하면서 정신을 무장해야 한다고 하셨을까? 나는 그 이유를 겨울이 되어서야 정신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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