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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소나 May 07. 2024

#12. 인생은 물음이고 신은 응답이다.

신학대학교

검정고시가 끝나고 형은 혼자 공부하겠다면서 학원을 그만두었다. 현재 형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보다 독하게 공부했던 만큼 형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열심히 살고 있을 것이다. 나는 형에게 공부에 대한 빚을 졌다. 그 빚은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이들에게 공식으로 되갚고 있다.


"공부를 잘하고 싶니? 그러면 앉아 있는 연습부터 하자."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거다."

"공부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습관이야."


나는 수능을 준비하면서 두 가지를 고민했다. 일 년 공부를 더 해서 좋은 대학교를 지원할 것인가? 아니면 성적에 맞춰서 대학교를 갈 것인가? 더 좋은 곳이라고 해도 서울의 중위권 대학도 지원하기 힘든 성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첫 번째 고민은 빨리 포기했다. 좋은 성적을 받고 싶었지만, 공부는 의지보다 시간과 습관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은 후 나는 성적에 맞춰서 대학교를 지원했다. 내가 들어간 학교는 서울에 있는 작은 신학대학교였다.  


내가 신학대학교를 입학한 것은 수능 성적 때문인 것도 있지만, 아버지가 목사님이었던 이유도 한몫했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다, ' '자녀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어릴 적 보고 배운 것이 교회 생활이 전부였다 보니 대학교는 당연히 신학대학교로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목사 또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곳밖에 없었다.


인생살이가 계획대로 된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고, 어떻게 그 상황에 대처할지에 대한 모든 해답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신학대학교 하면 대부분 비슷하게 생각한다.


"성경 배우는 곳 아니야?"

"설교하고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교 같은데."

"목사님이 되기 위해서 교육받는 곳이지?"


우스갯소리로 내가 다니는 교회의 전도사(흔히 목사가 되기 전의 직분)가 다니는 학교는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교회에서 보는 전도사와 학교에서 보는 전도사가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모든 전도사의 삶이 똑같지는 않겠지만, 신학생의 삶도 다른 대학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지금은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지만, 교회와 목사 하면 대부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인데 왜 그래?" (기독교인은 선한 사람이라는 인식)

"목사님은 거짓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목사는 진실만 말하는 사람이라는 인식)

"교회가 너무하네." (교회는 선한 영향력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인식)


그런데 왜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이면서 기독교인은 긍정적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신학생 선발 기준이 착하고 거짓말도 안 하면서 모범이어야 한다면, 모든 신학생은 성인군자만 뽑아야 한다. 신학생도 일반학과의 학생과 같이 놀기 좋아하고, 연애 때문에 고민하고, 공부의 스트레스에 취약한 평범한 대학생이다. 차이가 있다면, (내 기준에서) 신학생은 어떻게 하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 것인가로 고민한다. 만약 주변에 그렇지 못한 신학생 또는 목사들이 있다면 한 번 정도는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봐도 괜찮을 것 같다. 아무튼 신학교에서 나는 다양한 과목(심리학, 고고학, 고전어(헬라어, 히브리어), 철학, 역사, 교육학, 지리, 영어 등)을 배웠다. 지금은 인문학이 젊은이들에게 소외당하고 있지만, 그때는 달랐다. 자기 생각을 함께 나누고,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지, '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 '나는 왜 존재하는지.' 등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었다.


신학은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을 모두 아우르는 학문이다. 눈에 보이는 형체가 왜 존재하고, 그 대상은 누구/무엇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그것의 본질과 이유의 관점에서 따져본다. 신학은 세상의 모든 학문을 신앙과 믿음의 관점에서 다시 연구하고 재해석한다. 눈에 보이는 것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학이다. 신학자들 사이에 신학이 신앙(믿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학문(연구) 그 자체에 있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때 나에게 신학은 나의 실존과 삶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학문이었다.


철학자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묻지만, 신학자는 의미와 목적에 따라서 인생을 산다. 이 둘의 차이는 질문과 응답에 있다. 전자는 인생이 질문이지만, 후자는 인생을 응답으로 본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철학자라면, 인생의 의미에 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 신학자이다. 신학생으로서 나도 무엇이 의미 있는 삶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삶은 끝나지 않는 물음이고 신은 응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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