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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소나 May 09. 2024

#13. 숨겨진 본능의 표출

고스톱

대학교 1학년 첫 MT 장소는 강원도에 있는 기도원이었다. MT를 기도원으로 간다는 것이 듣기에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신학생에게 기도원은 술집과 같은 곳이었다. 기도원과 술집은 같으면서 다른 장소이기도 하다. 기도원이 신과 대화를 시도하는 장소라면, 술집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다. 마주 대하고 서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기도원과 술집은 같은 목적으로 모이고, 영혼과 육체를 무엇으로 취하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목적으로 모인다. MT 장소로 기도원은 우리에게 하나님, 성경, 기도보다는 과의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였고,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나의 영혼이 보름달, 기러기, 억새밭, 국화, 그리고 봉황새에 도취하는 경험을 했다.   


엄격한 아버지의 가정교육 때문이었는지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남들이 다 해보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것이 많았다. 노래방, 당구장, 볼링장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생일날에는 케이크를 받아 본 적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검정고시 때 처음으로 알았다(결혼하기 전에도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당연히 나이트클럽(지금까지도)은 가본 적도 없다. 이렇다 보니 누군가는 나를 천연기념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구슬치기, 병뚜껑 놀이, 딱지치기, 다방구만 알던 녀석에서 이 별명은 제법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MT 두 번째 날 신학과 형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심심하지 않냐? 내가 고스톱 가져왔는데 한 판 할래?"


"고스톱?" 나는 깜짝 놀랐다.


그 형의 짧은 한마디에 나만 놀랐던 것일까. 방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 뒤 몇 명이 그 형 주위로 모여들었다. 처음 고스톱의 실물을 봤을 때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붉은색 자태를 품고 있는 앙증맞은 크기의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보였다. 같은 그림을 하나씩 맞춰가는 과정은 마치 퍼즐 놀이 같았고, 그림마다 다르게 패를 배치하는 것과 점수 산정 방식은 쉬운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게 했다. 무엇보다 나의 패를 다른 패 위에 내리쳤을 때 나는 소리는 나의 말초신경을 자극해서 그 음파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정말 고스톱을 몰라? 너무 거룩한 거 아니야?"

"그건 아니고..."

"우선 같은 모양끼리 맞추는 것부터 해봐. 점수를 계산하는 법은 그다음에 알려줄게."


그렇게 그 천사 형은 악마의 놀이를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앞으로 나의 신학생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른 채 말이다. 고스톱을 배울 때는 몰랐지만, 그때의 상황이 낯설었다. 우리는 신학과 첫 MT로 기도원에 왔고, 찬송도 부르고 신앙적인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경건을 배우기에도 바빴다. 그런데 방 한구석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아, 쌌다."

"이런 쇼당이네."




보름달이 뜬 하늘에 기러기가 날아간다. 일찍 핀 매화꽃 옆에 꾀꼬리가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3~4월에 피어야 할 벚꽃과 등나무꽃이 함께 피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멧돼지 한 마리가 싸리나무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9월에 피는 국화와 10월의 단풍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슴도 눈에 보인다. 아직은 이르지만, 11월에 피는 오동나무 아래서, 나는 우산을 들고 가만히 서 있다. 그런데 갑자기 뛰어오르는 개구리의 낯선 등장에 깜짝 놀랐다.


꿈이었다. MT를 다녀온 후 고스톱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밥을 먹어도, 사람을 만나도, 잠을 자도 온통 고스톱 생각뿐이었다. 고스톱을 처음으로 전수해 주었던 형이 마지막 날에 해줬던 말이 있었다.


"OO아, 이거 꼭 버려."


나는 당연하단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가방 깊숙이 넣어서 기숙사로 가져왔다. 고스톱은 혼자 할 수 없는 놀이(처음에는 즐겁게 노는 일이었다.)다. 사람이 너무 적으면 긴장감이 떨어지고, 많으면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다. 가장 적당한 수는 세 명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찾아 나섰다.


"형, 고스톱 한 판 하자."

"뭐? 너 정신 나갔냐? 선배들한테 걸리면 집합이야. 신학생이 무슨 고스톱이야."


처음에는 기숙사에 있던 친구와 형들 모두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선악과를 한입 베어 먹은 자의 깨어난 본능은 멈출 수 없었고, 금단의 열매를 주변 사람에게 권하기 시작했다. 며칠이고 혼자 화투패를 만지작거리는 나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하면서 주변 사람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고 싶으면 먹고 싶은 법이다. 마침내 세 명의 멤버들이 306호에 모이면서 우리의 금지된 놀이는 시작되었다.  


놀이의 시작은 식권(食券, meal ticket) 내기였다. 한 장에 이 천 원 정도 하는 식권이면 도박은 아니라는 생각이 나의 본능을 안일하게 만들었다. 한 판이 두 판이 되고 두 판이 열 판이 되면서 나는 더욱 쾌락의 늪에 빠져들었다. 고스톱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하루 이틀 늘어나면서, 생활의 리듬이 깨졌다. 밥을 거르는 날도 많아졌다. 내가 고스톱인지, 고스톱이 나인지를 모르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고스톱이 무엇인지를 정의(定義, definition)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도 잠시, 결국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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