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르소나 May 28. 2024

#16. 쌍둥이

욕망의 대리 표상, 또 다른 나

욕망의 대리 표상, 또 다른 나

쌍둥이로 태어난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살기 위해서 형과 경쟁해야만 했다. 싸움에서 졌기 때문인지 나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incubator)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고, 그곳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두고 사투를 벌어야 했다. 그 이후로 나는 형을 이기기 위해서 작은 것 하나에도 최선을 다했다. 대표적인 예로, 형은 파김치를 싫어했지만, 나는 형이 파김치를 못 먹었기 때문에 일부러 먹었다. 형과 내가 처음으로 파김치를 먹었을 때, 우리는 비릿하면서 미끈거리는 파 맛에 서로 인상을 찌푸렸다. 형은 바로 김치를 내뱉었고, 그 이후로도 음식에서 파 한 조각이라고 발견하면 그 음식을 먹지 않았다. 나도 파의 특유한 맛이 싫어서 뱉고 싶었지만, 형이 못 먹는 것을 나는 반드시 먹겠다고 다짐했기에 참고 억지로 먹었다. 주변에서 "형도 못 먹는 파를 잘 먹네."라고 경쟁이라도 부추기는 날이면, 나는 괜히 우쭐거리는 마음으로 맛없는 파김치를 몇 개 더 집어 먹기도 했다. 형이 못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쌍둥이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가족들은 쓸데없이 고집을 피운다고 혼도 냈지만, 나는 끝까지 형이라고 하지 않았다. 형이라고 부르면 마치 내가 패배자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모든 싸움은 삼세판이라고 했다. 나는 형에게 이미 두 번이나 졌다고 생각했기에, 이번에도 지면 완패라고 판단했다. 엄마의 뱃속에서 영양분 섭취를 위한 싸움에서 형에게 졌고, 형이 큰 눈과, 오뚝한 코, 그리고 날렵한 턱선을 가지고 태어나면서 나는 또 형에게 졌다(난 이란성쌍둥이다.). 그런데 몇 분 먼저 태어난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면, 나의 마지막 보루(堡壘)가 무너지는 것 같았고, 굴욕적인 존재로 취급받는 기분이 들어서 싫었다. 형과 비교해서 내가 그렇게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형을 경쟁자로 삼았다.


한여름, 심심한 날이었다. 마당의 평상에 드러누워서 구름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파리 한 마리가 나의 여유를 방해했다. 처음에는 발에 달라붙어서 괴롭히더니, 얼마 안 있어서 정신 사나운 소리를 내면서 나의 눈앞에서 날아다녔다. 나는 화가 나서 그 녀석을 꼭 잡겠다고 다짐했다. 평소 같았으면 두 번의 움직임만으로 간단하게 잡던 파리도 그날따라 잘 잡히지 않았다. 나는 쌍둥이 형에게 누가 파리를 먼저 잡는지 시합을 하자고 했고, 자신도 따분했는지, 형은 선뜻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시작한 파리 잡기 시합은 놀이에서 경쟁으로 치달으면서 내기로 이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형을 이기기 위해서 나의 모든 신경을 파리의 움직임에 집중했고 파리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날갯짓을 어떻게 하며, 몇 초간 비행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렇게 파리의 동작을 파악한 후 나의 파리 잡는 속도는 빨라졌다. 맨손바닥으로 잡던 것을, 슬리퍼를 사용하면서 그 속도는 두 배가 되었다. 형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최선을 다해서 파리를 잡으려고 했지만, 나의 속도를 따라올 수 없었다. 형은 30마리, 나는 50마리를 잡으면서 내가 내기에서 형을 이겼다. 그날 형은 나를 "형"으로 불렀고, 나는 '형'의 칭호가 가지는 신분의 우월감을 조금이나마 만끽했다.  




쌍둥이 형과의 추억은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조금씩 줄어들었다. 서로의 생활환경이 다르다 보니,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이 부족했다.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에게 형은 인생의 동반자였을 뿐만 아니라, 경쟁자였다. 좋은 의미에서 경쟁자는 생존력을 높여주는 상대로 볼 수 있지만, 나쁜 의미에서 반드시 이겨야 할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2015)는 그의 책 희생양(Le Bouc emissaire)에서 모방이론에 관해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 표출은 대중의 심리에 영향을 받는다. 나의 욕망(주체)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타자)에 의해서 표출된 것이다. 나의 소유욕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질투에서 비롯되며,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대상을 따르게 된다. 이렇게 생겨난 나와 너의 욕망은 서로의 질투로 구조화되고 공동체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욕망으로 결속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동체는 평화의 지속성을 원하면서 구성원의 결속을 위협하는 어떤 것도 제거의 대상으로 삼는다. 공동체의 와해는 곧 나의 존재에 대한 위협이고, 공동체 붕괴의 시도(소수 집단, 테러리스트, 페미니즘, 성소수자 등)는 결속을 방해하는 것으로 판단하면서 구성원들은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서 욕망의 신성화 작업을 거친다. 그것이 바로 희생양이다. 희생양은 암묵적으로 합의한 공동체의 욕망을 터부시하고, 공격적인 방법으로 결속력을 강화하면서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타자 혹은 집단을 희생시키고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쌍둥이 형을 이야기하면서 희생양 이론을 언급하는 것이 지나쳐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왜 나는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 그렇게 몸부림을 쳐야만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쌍둥이 형의 존재(타자)가 나(주체)의 욕망을 자극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형이 원하는 것을 원했고, 형이 가진 것을 빼앗았으며, 형이 없는 것을 소유하려고 했다. 나의 욕망은 형의 욕망으로 대리 표상되면서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형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욕망에 의해서 결속되었고 쌍둥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네 개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함께 성장했다. 우리의 결속력(공동체)은 싸움이 일어날 때 더욱 빛을 발했다. 내가 맞고 있으면 어느새 형이 그 녀석을 때려주었고, 형이 맞으면 내가 맞은 것처럼, 나는 그 녀석을 사정없이 패주었다. 간혹 잘못한 일이 생기면, 우리는 희생양을 찾았고, 동네의 약한 동생(친구) 한 명을 범인으로 만들어서 우리의 정당성을 항변하기도 했다. 어릴 적 형은 나에게 친구이고, 동반자였고, 경쟁자였으며, 희생양이었다. 형이 나에게 이렇게 다양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우리가 구구단처럼 항상 외쳤던 말 때문이었다.


"우리는 한 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