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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_ 완벽한 스윙

윤담 장편소설

by 윤담

남건호 실장은 금수저였다.


그의 부친 남정훈은 물려받은 강남땅을 기반으로 의류 사업을 벌였다. 사업 수완이 좋았던 부친은 한창 경제 발전이 이뤄지던 흐름을 타고 건실한 사업가로 성공했다.


90년대부터는 적극적인 해외 진출 전략을 통해 회사를 글로벌기업으로 성장시키며 금탑산업훈장도 받은 사람이었다. 다른 기업인들이 그에게 현명한 눈을 가졌다는 뜻으로‘현목(賢目)’이라는 호를 지어줬는데 그게 그룹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아픈 손가락이 있었으니 바로 외아들인 남건호였다.


건호는 부친과 반대로 살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남 회장의 장점은 하나도 닮지 못했다. 남 회장이 회사 일에 신경 쓰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탓에 아들은 온실 속의 화초로 커버렸다. 건호는 무엇이든 들어주는 부모 밑에서 돈 버는 어려움보다 돈 쓰는 즐거움만 맛보고 살았다.


남 회장은 미덥지 않더라도 아들을 회사에 입사시켰다. 핏줄이 뭔지, 아들을 그냥 저렇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늦었지만 밑바닥부터 시작해 사회를 겪으며 사람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아들은 실망만 남겼다.


그 무렵 회사는 방송업에도 진출했다. 남 회장의 사업 수완은 탁월했다. 케이블 TV가 보편화되고 K 드라마가 한류 열풍을 탈 때 기회를 봤다. 남 회장의 눈에 콘텐츠 시장의 발전은 무궁무진했다. 남 회장이 여러 중소 방송사를 인수하면서 계열사는 순식간에 거대 종합편성 채널로 성장했다.


남 회장은 여러 제작사와 연예 기획사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남 회장이 서주희 대표와 연이 닿은 것도 그쯤이었다. 십여 년 전 주희가 2명의 배우만으로 기획사를 차렸을 때였다. 주희는 특히 스타성이 있는 배우를 발굴하고 흥행력이 좋은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 좋았다.


PEARL이라는 사명도 흙 속의 진주를 발굴하는 것처럼 좋은 배우를 길러내겠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었다. 배우들을 끔찍이 챙기고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던 주희는 업계에서 신뢰도와 명성을 얻고 있었다.


회사를 차린 지 2년 만에 PEARL 엔터테인먼트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가 연이어 대박을 쳤다. 특히 중국에서 난리가 나면서 몇몇 방송국 피디와 작가들이 서 대표에게 배우를 추천해달라고 먼저 접근하기도 했다.


지금도 대단하지만 그때는 연예계에서 여성 기업인이 없다시피 한 시절이었다. 주희에 대한 소문은 피디와 방송국 관계자들을 거쳐 계열사 사장을 통해 남 회장에게까지 전달됐다.


남 회장은 사람 욕심도 많았다. 자신은 이제 나이가 들어 전문 경영인을 세우고(아들 건호가 후계자가 되길 바랐지만 이 시점에서는 포기한 뒤였다) 뒤에서 관망만 하고 있었다. 회사는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어서 딱히 신경 쓸 일이 많지 않았다. 대신 남 회장은 이 땅의 젊은 후배 기업인들을 키우는 데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곧 그는 관계자들을 통해 주희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남 회장은 기업인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 신의와 통찰력, 도전정신을 중요시했다. 그의 안목은 서주희라는 젊은 기업인이 곧 자신과 같은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자신과 같은 능력을 왜 아들 건호가 아니라 이 젊은 여자에게 있는지 남몰래 안타까워할 지경이었다.


그리 깨끗하지만은 않은 방송 연예계였다. 여성이 남의 도움 없이 억척같이 살아남아 기획사를 차린 것부터 소속 연예인들을 대하는 태도까지 주희를 눈여겨보았다. 주희의 기획사는 곧 남 회장의 회사를 통해 거액을 투자받았다.


남 회장의 지원 이후 PEARL 엔터테인먼트는 수많은 스타를 탄생시키며 나날이 성장해 코스닥 상장까지 이뤄냈다. 다른 내로라하는 국내 대형 기획사들에 비해 설립한 지 채 5년도 안 되어 달성한 쾌거였다.


몇 년 후 남 회장과 주희는 한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두 기업인은 스승과 제자 또는 과장 좀 보태 말하면 아버지와 딸의 사이처럼 되어 있었다.


주희는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투자를 요청했다. 그때 PEARL 엔터는 이미 국내에선 최고의 배우 풀을 자랑하는 기획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희는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미 한류 열풍으로 많이 진출한 아시아 시장이 아니라 할리우드를 포함한 미국 시장이었다.


남 회장은 사업 기획서를 다 보지도 않고 투자금 백수십억 원을 선뜻 승낙했다. 다른 기획사들도 미국 시장을 노리고 몇 번을 도전했다가 실패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만큼 주희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아마 자신에게 투자금을 요청하기 전에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탐색과 사전 준비를 다 마쳤을 것이었다. 그 자신이 젊은 시절에 그랬으니까.


그런데 남 회장의 투자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다. 아들 남건호를 주희의 기획사에 입사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건호는 몇 년이 지나도 회사 생활에 적응을 못했다. 아내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그럴듯한 직함을 달아주긴 했는데 건호는 주식 놀이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의 곁에 좋은 친구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징징대다시피 해서 받은 돈을 날려 먹거나 사기를 당하곤 했다. 사실을 알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남 회장이 아들에게 주던 돈을 끊었다. 이번에는 아내도 남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돈이란 놈은 다루고 지킬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일수록 더 목을 매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건호가 그랬다.


돈 구할 데가 없어진 건호는 남 회장이 매년 수억씩 기부하던 어린이 복지재단을 찾아갔다. 아버지의 노환을 핑계로 기부금을 빼돌리려다 수상함을 느낀 재단 이사장이 남 회장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창피도 이런 창피가 없었다. 크게 노한 남 회장은 처음으로 아들에게 손을 대려다가 아내의 만류로 겨우 참았다.


이런 못난 아들 때문에 속만 썩이던 남 회장은 며느리라도 잘 얻고 싶었다. 그의 사람 욕심이 발동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자신과 닮은 점이 많은 주희가 탐이 났다.


노는 거 좋아하는 아들 녀석이니 연예 기획사 일이라면 관심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아들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주희는 그때만 해도 별생각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몇 년 후 PEARL 엔터의 미국 시장 진출은 결국 현지 법인을 차릴 정도로 성공했다. 현지에서 계약한 미국인 배우들이 넷플릭스 같은 플랫폼을 타고 한미 양국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한국 배우들도 그만큼 미국 방송 진출이 수월해진 건 덤이었다.


그사이 건호는 한량 같긴 했어도 조금은 사람 구실은 했다. 주희와 건호의 결혼은 6년 전 급하게 이루어졌다. 정서가 첫 책을 출간했을 무렵이었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이들이 갑자기 눈이 맞아 사고를 친 게 아니었다.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남 회장의 부탁이자 유언이었다.


주희는 이십 대부터 결혼 생각이 없었다. 처음엔 고민했지만 아버지 같은 남 회장의 유언을 따르기로 했다. 딱히 사랑은 없는 결혼이었다. 그렇다고 주희가 그의 재산을 탐낸 것도 아니었다. 남 회장에게 이미 받은 것으로도 차고 넘쳤다.


남 실장은 장원이 모든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밝히고 사무실을 나간 후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거친 숨을 쉬는 게 크게 흥분한 듯했다. 운영팀장을 불렀다.


당장 장원의 매니저 고용계약을 해지하고 그가 쓰는 법인카드와 업무용 폰도 없애라고 말했다. 당황해 이유를 묻는 운영팀장에게 서 대표와 관련된 일이니 빨리 조치하라고 소리쳤다.


운영팀장은 철저히 서 대표의 사람이었고 남 실장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런데 횡령 사건 이후 서 대표는 당분간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에 그도 사리를 판단하기 힘들었다.


앞에서 역정을 내는 사람은 엄연히 회사 이인자인 기획실장이었고 무엇보다 대표의 남편이었다. 그가 서 대표에게 허튼짓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운영팀장은 일단 급해 보이니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운영팀장이 나가고도 한동안 씩씩거리던 건호는 파일을 뒤져 장원의 인사카드를 찾고 전화를 들었다. 예전 주식 놀이하던 시절 그의 인맥은 어두운 세계에도 닿았었다.


“주필아. 나다. 돈 빌리려는 거 아니고 너희 애들 몇 명만 좀 쓰자. 아니, 돈 받을 일도 아니고… 그냥 당분간 가둬두고 정신 좀 차리게 해줘. 사례는 크게 할 테니. 그래. 그놈 사진이랑 주소 보낼게.”


통화를 끊은 건호는 장원의 인적 사항을 문자로 보내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장원은 일산이 아닌 파주의 한 병원에 누워있었다. 태양광 패널 밑에 쓰러져있던 장원을 발견했을 때 119를 부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장원을 쫓는 사람들이 그간 행적을 알고 있다면 일산까지도 찾아올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까지 생각한 정서는 장원을 겨우 차에 태웠다.


정서는 뒤에서 끙끙 앓는 장원이 걱정돼 무슨 정신으로 파주까지 왔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심한 폭행을 당한 듯 얼굴과 몸 곳곳에 피멍이 들어있었다.


가장 심한 건 갈비뼈 두 개가 골절된 것이었다. 세라는 장원을 싣고 올 때부터 줄곧 눈시울을 붉힌 채 장원의 손을 잡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세라를 정서가 가만히 토닥였다.


병원에서는 상처를 보고 폭행 사건이 아닌지 물어보고 경찰을 불렀다. 술 먹고 싸운 거라느니, 일하다 다쳤다느니 하는 핑계를 댈 만한 상처가 아니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장원 대신 정서가 아는 대로 말했다. 처음엔 회사 분위기도 안 좋은데 이런 일로 장원이나 서 대표에게 피해가 가는 게 아닐지 고민했다. 그가 주저하는 걸 눈치챈 세라가 다 말해도 괜찮다고 말하며 정서를 도와 진술했다. 형사는 장원이 깨어나면 다시 오겠다며 돌아가고 두 사람은 밤새 장원을 간호했다.


다음날 장원이 깨어났다. 통증은 심해도 생명이 위독한 부상은 아니었다. 장원은 그래도 야구 할 때 하도 맞아서 맷집이 세진 덕에 이 정도라며 농담했다. 정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며 한 대 쥐어박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진짜 놀랐다. 세라 씨도 걱정 많이 했다고.”

“하…… 그걸 누가 예상했겠어. 세라야 괜찮아. 이 정도는 한 달이면 나아.”

속이 여린 세라의 눈이 아직도 새빨간 걸 본 장원이 세라를 다독였다.


장원은 실장실을 나온 뒤의 일을 설명했다. 집으로 돌아와 동현에게 받은 USB에서 파일을 옮기고 한창 자료를 정리하는데 벨이 울렸다. 누구냐고 묻는 말에 엊그제 이사 온 집이라며 떡을 돌린다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동현처럼 좋은 동네는 아니라도 오피스텔에서 사람이 바뀌는 집은 비일비재하니 의심이 줄었다. 요즘도 떡을 돌리나 싶다가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순간 문이 확 열리고 갑자기 날아든 주먹에 눈에서 별이 튀었다. 남자 몇이 후다닥 들어와 문을 잠그는 걸 보고 일어나려는 데 이번엔 발길질이 날아왔다. 장원은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의자에 묶여 있었다. 딱 봐도 깍두기 생활할 것 같은 놈들 셋이 천연덕스럽게 주방에서 장원의 술을 마시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같이 운동했던 놈들 몇이 중간에 포기하고 저쪽 세계로 빠져들었었다. 진짜 건달이 된 놈도 있었고 건달 흉내만 내는 양아치도 봤다. 저들은 건달이라기보다는 양아치 느낌이었다.


“야, 저 새끼 깼다.”


장원이 눈을 뜬 걸 대머리 녀석이 발견했다. 그리고 놈들의 구타가 시작됐다.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폭행에 몇 번 정신을 놓을 뻔했다. 그래도 장원은 끝까지 버텼다.

‘이러려고 야구한 게 아니었는데…’


맞다가 이런 생각이 든 장원이 피식 웃었다. 운동하며 다져진 맷집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되려 놈들이 지쳐 나가떨어졌다. 오히려 웃는 장원을 본 놈들이 욕을 내뱉었다.


웃긴 했어도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못 해도 갈비 한 대 정도는 나간 느낌이었다. 집안에 야구 배트를 괜히 놔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선배에게서 받았던 선물이 자신을 구타하는 데 쓰일 줄은 몰랐었다. 그나마 집안의 물건을 파손하진 않은 게 다행이었달까.


이후 놈들은 태연하게 야식과 술을 시켜 먹었다. 서 대표가 영국 출장길에 선물로 사 온 비싼 위스키를 제멋대로 따고는 소주잔에 따라 마셨다. 좋은 날에 마시려고 아껴둔 건데, 맛도 모를 것 같은 놈들이 그저 좋다고 키득거렸다. 그렇게 한동안 퍼마시더니 장원의 침대와 소파에서 냅다 누워 잠이 드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었지만 장원은 차분하게 기다렸다.


새벽이 지나도록 장원은 깨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다친 몸이 통증을 호소했고 열도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신만큼은 차갑게 생각했다.


놈들은 이유도 말하지 않았고 흉기도 없었다. 손도 어설펐다. 급소가 아니라 마구잡이로 때리는 식이었다. 그러니 때린 놈이 먼저 지칠 수밖에. 진짜 건달이 아니라 협박으로 돈 뜯어내는 양아치들이 확실했다. 이런 녀석들을 쓸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가장 먼저 남 실장이 떠올랐다. 이런 어설픈 일 처리. 하루가 지나기 전에 사람을 쓸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지만 참 남 실장다운 솜씨였다.


탈출할 궁리를 했다. 아까 한 놈이 야구 배트로 때릴 때 순간적으로 갈비뼈가 나간 느낌을 받았다. 부러진 뼈가 속에서 어떻게 됐을진 몰라도 숨을 쉴 만한 거 보니 심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죽자고 뛰면 짧게나마 달릴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일단 묶인 몸을 풀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머리를 굴렸다. 놈들은 역시 어설펐다. 신발장 위에 놓여있던 박스 테이프로만 칭칭 감아 묶어 놓았다. 종종 택배 반품할 때 쓰던 투명한 테이프였다.


장원이 묶여 있는 의자는 다리와 기둥에 각이 져 있는 의자였다. 날카롭진 않아도 테이프가 연한 재질이니 모서리에 계속 비벼대면 끊어질 것 같았다. 놈들은 적당한 도구가 없으면 최소한 틈이 없게라도 묶었어야 했다.


기침하는 척 살짝 힘을 줘보니 팔이 움직일 만한 틈이 있었다. 케이블 타이나 청테이프였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었다. 아직 시위는 어두웠다. 장원은 밤새 손에 묶인 테이프를 의자 기둥에 대고 힘을 주어 비볐다.


박스 테이프를 만만하게 봤다. 의외로 질겼다.


하지만 한 시간 넘게 힘을 주어 비벼대자 찢어지진 않아도 테이프가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놈들은 테이프 뜯어지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는 데도 알아채지 못했다. 냉장고에 있던 소주와 맥주에 찬장의 위스키까지 섞어 마셔댄 놈들은 코까지 골면서 잠에 빠져 있었다.


한동안 비비기를 계속하니 모서리에 닿는 부분이 확실히 헐거워졌다. 이젠 테이프에 끈적한 부분도 다 떨어졌는지 뜯어지는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팔에 힘이 남아나지 않았지만, 죽을힘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빼냈다. 손목의 살점이 죄다 쓸려나간 느낌이었다. 잠시 숨을 골랐다. 놈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의자를 조금씩 밀며 책상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의자 다리와 바닥의 마찰이 심해 조금만 힘줘도 끌리는 소리가 났다. 책상까지만 가면 커터 칼이나 다른 날카로운 걸로 금방 끊을 수 있을 텐데 아쉬웠다.


장원은 그냥 오른손으로 다른 쪽 테이프를 뜯어 내기로 했다. 한 손이 자유로워졌음에도 조심스러웠다. 테이프 뜯는 소리에 소파에서 잠든 뱀 문신한 놈이 깰까 봐 두려웠다. 잠깐이나마 체력을 조금 회복하고 오른팔을 뒤로 돌려 왼손의 테이프를 조금씩 뜯어내기 시작했다.


왼손과 오른 다리가 자유로워지는 데 또 시간이 한참 지났다. 날은 이미 밝아 해가 중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집안에 시계를 따로 두지 않아 잘은 몰라도 대략 열 시쯤 된 것 같았다. 다행히 놈들은 아직도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마저 남은 왼 다리의 테이프를 뜯고 있는데 뱀 문신한 놈이 깨어났다. 목이 말랐는지 누운 채로 물을 찾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이런 개새끼가…”


뱀 문신이 상욕을 뱉으며 일어났다. 하지만 놈은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잠이 덜 깬 상태였다. 장원이 더 빨랐다.


왼 다리의 테이프를 마저 떼어낼 시간이 없었다. 바닥에 간밤에 자신을 구타한 방망이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허리를 숙이는데 고통이 느껴졌다.


아직 한쪽 다리에 묶인 의자가 끌려오며 고통을 더했다. 장원은 그런 걸 느낄 새도 없이 오른손으로 방망이를 잡고 휘둘렀다. 고통은 후에 찾아와 장원도 신음을 내며 끙끙거렸다.


어정쩡한 자세에서 한 팔로 휘두른 방망이에 뱀 문신이 왼뺨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놈이 비명을 질렀다. 하필 넘어질 때 탁자에 부딪히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장원도 당황했다. 방금 난 소리에 안방에서 기척이 들렸다. 정신없이 남은 테이프를 뜯어냈다. 쨔악- 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거실 옆 안방 문이 열리고 대머리가 나왔다.


이놈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대머리는 안방 옆의 화장실부터 살폈다. 그러느라 순간적으로 벽에 붙은 장원을 미처 보지 못했다.


장원은 방망이를 쥐고 자세를 취한 채 대머리가 거실로 나오길 기다렸다. 대머리의 발이 보이는 순간 장원이 풀스윙을 날렸다. 전성기 시절의 그 어떤 스윙보다 완벽한 자세였다. 대머리는 복부에 방망이를 얻어맞고 꽥꽥댔다.


대머리가 쓰러짐과 동시에 부러진 갈비뼈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제는 손에 힘도 없어서 방망이를 놓쳐 버렸다.


아직 나머지 한 놈은 보이지 않았다. 뱀 문신은 아까 얼굴에 맞고 정신을 잃었다. 대머리도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놈마저 깨어나면 싸우지도 못하고 도로 잡힐 것 같았다.


어제 본 마지막 놈은 몸무게가 백 킬로그램은 훌쩍 넘을 거구였다. 장원은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가는데 자기 집에서 쫓기듯 나가야 하는 게 한심했다.


놈들이 가져간 핸드폰은 찾을 생각도 못 했다. 밖에서 도움을 청하든 도망을 치든 일단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신발에 발을 대충 욱여넣고 현관문을 열었다.


“뭐여, 이거. 형님! 괜찮으세요?”

그때 거구가 안방에서 나왔다.


“야, 이 시팔 뭐 하다가… 새꺄. 빨리 저놈부터 잡아!”


마지막 놈은 거구라서 잘 뛰지 못할 것 같았지만 장원은 마음이 다급했다. 당장이라도 거구가 다가와 목덜미를 잡을 것만 같았다. 쫓기는 마음에 다 신지도 못한 신발을 포기하고 슬리퍼만 겨우 신고 냅다 뛰었다.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걸음마다 통증이 찾아왔다. 그나마 어제 하체는 덜 맞은 덕에 엘리베이터까지는 뛰는 흉내라도 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장원의 집은 5층. 엘리베이터는 8층에 있었다. 걸을 순 있어도 계단을 내려가긴 힘든 상태였다. 일단 버튼을 눌렀다. 방금 쿵 소리가 나게 닫고 온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20미터쯤 떨어진 문이 열리고 거구가 다가오는 게 빠를까?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게 더 빠를까? 장원이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초조해하고 있는데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먼저 열렸다.


한편 거구는 장원을 쫓기보다 대머리를 먼저 챙기고 있었다. 방금 도망친 놈이 누구인지는 잘 몰라도 저 몸으로는 멀리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제 장원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카운터를 날린 장본인이 바로 자기였으니까. 일단은 어쭙잖더라도 대머리에게 충성심을 보이는 게 먼저였다.


장원은 일단 사람이 많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다행히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1층에 있었다. 창문 밖에 아직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승강장으로 향했다. 난간을 짚고 걷는 자신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이 느껴졌다. 장원은 주변에 도움을 청할 겨를도 없었다. 일단 빨리 피할 생각만 가득했고 걸으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승강장이 이렇게 멀었나 싶다가 갑자기 찾아온 극심한 통증에 주저앉았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양복을 잘 차려입은 남자가 장원을 부축하며 말했다. 어디 면접장이라도 갈 것 같은 신입사원 느낌의 젊은 남자였다.


“저, 파주… 파주에 운정책방 찾아서 전화 좀 해주세요.”

“네? 아니 119에 먼저 연락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장원은 119 타령하던 남자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부탁했다. 장원의 결연한 눈빛에 남자는 결국 핸드폰을 꺼냈다. 지도 앱에서 운정책방을 검색한 남자는 정말 괜찮은 건지 장원을 보다가 결국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장원은 남자가 고마우면서도 놈들이 쫓아올까 봐 얼른 서둘러주길 바랐다. 신호가 가는 걸 확인한 남자가 핸드폰을 건넸다. 신호가 몇 번 가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 감사합니다. 운정 책방입니다.


정서이길 바랐는데 효민이었다. 효민이 대꾸할 틈도 없이 할 말을 랩 하듯 내뱉었다. 멀리서 놈들이 보였다. 거구의 몸집은 인파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옆에 대머리도 인상을 쓰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 저 새끼들… 미안. 시간 없다. 끊을게.”

답도 못 듣고 전화를 끊은 장원은 남자에게 다시 핸드폰을 돌려줬다.


“감사합니다.”

“아니, 저기…”


남자가 아직도 신경 쓰이는 듯 주저했다. 요즘도 저렇게 남을 돕는 청년이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언젠가 연이 된다면 신세를 갚겠다 생각하며 걸었다.


지금 같이 있다간 괜히 이 청년까지 저놈들에게 화를 당할 수도 있었다. 장원은 마지막 힘을 짜내 다른 출구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지자 많아진 인파 속에서 놈들은 장원을 찾을 수 없었다.

택시를 잡아탄 장원이 말했다.


“기사님. 일산에 장항 야구장 부탁드립니다.”


택시 기사는 말없이 출발했다. 손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고 영업한 지도 꽤 되었다. 신호가 걸렸을 때 얼결에 백미러로 장원의 상태를 보고 놀라 돌아봤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폭행을 당하고 핸드폰도 지갑도 없이 나왔습니다. 일단 지금 상황만 해결되면 며칠 내로 더블로 입금해 드릴게요. 이따가 명함 한 장 주세요. 정말 약속드립니다.”


미심쩍어하던 기사의 눈빛이 걱정으로 바뀌었다. 손님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접어야지 접어야지 하면서도 근근이 이어 온 택시 기사 이십여 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새 신호가 바뀌었는지 뒤차가 빵빵거렸다.


기사는 마음을 먹은 듯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말했다.


“병원 먼저 안 가봐도 되겠수?”


장원은 병원보다 급한 일이 있다며 둘러댔다. 기사는 뭔가 체념한 듯 말했다. 뒷자리의 젊은 손님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어도 눈빛은 아직 빛나고 있었다.


“오케이. 일산… 일단 가봅시다. 힘들면 누워서 쉬쇼.”


망설이듯 천천히 출발한 택시가 이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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