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담 장편소설
장원이 깨어난 다음 날. 자택에서 근신하던 서 대표도 병원에 왔다. 알리는 게 좋겠다는 정서의 말에 세라가 전화했다.
주희는 세라 곁에 있는 정서를 의아하게 보다가 곧 장원의 상태를 보고 자기 일처럼 그를 걱정했다. 주희를 처음 보는 정서도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왔는지 그녀의 옷차림은 꾸밈이 없어 기획사 대표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정은에게 느껴지는 친근함이 주희에게도 있었다.
주희는 장원의 병실을 6인실에서 1인실로 옮겼다. 치료 비용은 걱정하지 말라는 모습이 여장부다웠다.
1인실로 옮긴 후에야 주희의 눈에 정서가 들어왔다. 처음엔 아끼는 배우의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있어서 경계했었다. 세라가 그를 문학관 대표이자(세라는 서 대표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단 관리인이 아니라 대표라고 말했다) 지난 작품의 원작자라고 소개하자 안심하는 눈빛이었다.
주희는 이제는 세라와 장원이 친구처럼 기댈 곳이 된 정서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주희는 벌써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생전에 남 회장은 받은 성의와 호의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보답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었다. 정서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면서도 문학관에 얼마 정도 기부할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서는 세라가 사면초가에 빠진 상황에서 쉴 곳을 제공하고 울타리가 되어줬다. 게다가 크게 다친 장원을 찾아내 병원으로 데려와 준 일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주희의 머릿속에서 나중에 문학관에 기부할 액수가 억 단위로 커지고 있었다. 세라와 장원은 그만큼 주희에게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된 주희가 물었다.
“남 실장 찾아갔었다며. 네가 이렇게 된 거… 혹시 그거랑 관련된 일이니?”
장원이 회사에 들른 이후에 바로 남 실장이 그를 해고하라고 했다는 일은 운영팀장에게서 들었다. 그렇게 묻는 주희의 안색은 다시 대표다운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충 짐작은 됐다. 의심도 하고 있었다. 다만 알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차분하게 묻는 주희를 보고 장원이 입을 열었다. 서 대표가 상처받을까 걱정되어 망설였던 건 그녀를 과소평가한 일이었다. 서주희라는 사람은 여자와 아내이기 전에 대표라는 자리가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런 대표의 모습을 확인한 장원은 모든 걸 털어 놓았다.
주희는 장원이 동현에게 알아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의외로 덤덤했다. 이후 장원의 집에 그놈들이 찾아와 감금하고 폭행한 일에 대해선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라와 정서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남 실장이 한 일은 대충 알고 있었어. 그런 놈들까지 쓸 줄은 몰랐네. 너희한테 면목이 없다. 정말 미안하다.”
주희의 말에 사람들이 놀랐다. 그녀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주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일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남 회장과의 인연과 주희와 건호가 결혼하게 된 사연, 그리고 그 이후의 일까지.
주희는 결코 남 회장의 재산이 탐나서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딸처럼 여긴 남 회장은 어느날 주희를 병원으로 불러 말했다.
그는 평소에도 독신으로 살겠다고 했던 주희의 손을 잡고 말했다. 미덥지 않은 아들일지라도 결혼을 통해 현목 그룹이라는 우산을 안고 가라고. 아들에게 회사를 맡길 수 없으니, 나중에 주희가 후계자의 자리를 받으라고. 너는 그만한 자격이 된다고.
그 자리에는 남 회장의 아내와 심지어 남 회장의 변호사도 있었다. 사모님도 이미 아는 눈치였다. 그녀는 자기 아들 대신 생판 모르는 젊은 여자에게 후계자 운운하는데도 불쾌한 내색도 없었다.
아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현명한 눈’이라는 남 회장의 호를 따 지은 그룹명처럼 아내도 남편의 사람 보는 눈을 믿었다.
얼결에 결혼하게 된 건호는 딱히 싫은 내색은 아니었다. 다만 결혼할 여자가 자기보다 지위가 높다는 게 탐탁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당시 PEARL 엔터 홍보팀장을 맡고 있었다. 주희도 나름 예쁜 편이긴 했지만 평소 순종적인 여자를 좋아하던 건호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건호에겐 지금 아버지의 말을 잘 따르는 모습이 필요했다. 곧 돌아가시게 되면 유산을 탈 없이 받기 위해 잘 보이려는 의미가 큰 결혼이었다. 주희와는 같이 살다가 좋으면 다행이지만 아니면 나중에 이혼하면 그만이었다.
남정훈 회장은 두 사람의 결혼을 보고 다음 해에 눈을 감았다.
주희는 남 회장이 영면한 후 시어머니 송 여사에게 말했다. 자신은 더 큰 욕심은 없고 그룹을 맡는 건 부담되니 전문 경영인을 쓰자고. 실제로 지금 하는 연예 기획사 외에 현목그룹의 방대한 계열사까지 경영할 자신은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단다. 아가.”
창업주인 남 회장의 유지를 감히 거절하는 거라 혼날 걸 각오했었다. 그런데 송 여사는 예상했다는 듯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남편의 유언 중 경영권과 관련된 내용을 주희에게 보여줬다.
— 현목그룹의 경영권은 아들 남건호에게 승계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며느리이자 PEARL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인 서주희에게 경영권을 넘기고자 한다. 주희가 대표 이사직을 승계할 준비가 될 때까지는 이사회에서 전문 경영인을 선임해 회사를 운영하도록 한다.
다만, 주희가 이를 거절한다면 앞으로 현목그룹은 누구 1인의 소유가 아니라 합리적 능력을 가진 인물로 전문 경영인을 선임하여 회사가 오래도록 경쟁력을 갖춰 그룹과 모든 임직원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위해 내 가족들의 현목그룹과 모든 계열사에 대한 지분은 상속 부분에서 언급했듯 일정 비율 이상의 지분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여 전문 경영인 체제를 공고히 하도록 한다.
남 회장은 주희가 승계를 거절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창업주로서 그는 처음부터 회사가 더 이상 어느 누군가의 소유가 되길 원치 않았다. 굳이 주희를 명시한 건 아들이 나중에라도 일으킬 수 있는 소란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송 여사도 남편의 의견에 동의했다. 자신도 40년 넘게 사모님 소리 들었으니 더 욕심도 없었고 남은 생은 편하게 살고 싶어 했다. 부부는 남편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몇 년 전부터 남양주의 한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소탈하게 살며 주변 보육시설에 봉사활동 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남은 생은 베풀면서 살자는 게 남편과의 약속이었다.
다만 남편이 굳이 경영권 승계와 관련해 주희를 언급하는 것은 반대했었다. 송 여사도 주희를 딸처럼 여기게 되었기에 주희를 괜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송 여사는 어쩔 수 없었다며 주희의 손을 잡고 미안함을 전했다.
한편 그룹 이사회에는 건호를 후계자로 삼지 않는다는 남 회장의 유언이 변호사를 통해 전달됐다. 주희는 즉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생전 남 회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이사들과 송 여사가 나서 남 회장의 유언을 강력히 지지했다. 덕분에 이사회가 정관을 개정하고 전문 경영인을 선임하는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를 지켜본 건호로서는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건호는 부모에게서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대부분의 재산을 기부하거나 사회에 환원했다. 송 여사와 건호에게 남긴 것도 적진 않았지만 원래 재산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건호는 주희에게 애먼 화를 냈다. 왜 아들인 자신이 아니라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주희에게 경영권을 주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건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질투심이 증오로 변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건호와 주희는 별거를 시작했다. 애초에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다.
주희는 건호가 오래전부터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건호의 대학 시절 CC였던 권종선 작가였다. 주희는 내색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결혼 생활을 이어 온 건 남 회장과 송 여사에게 받은 후원과 사랑에 대해 의리를 지키는 것에 불과했다.
주희가 말하던 중 갑자기 권 작가의 이름이 나오자, 세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 그런데 건호 씨… 아니, 남 실장은 다른 생각이 있었나 봐.”
마른 한숨을 뱉은 주희가 체념한 듯 이어서 말했다.
대표인 주희도 몰랐던 법인계좌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년 전이었다. 연말이 지나고 회계팀장이 갖고 온 결산 보고서에 못 보던 계좌가 하나 있었다.
무어냐고 물어보니 남 실장이 광고비 수익계좌를 하나 더 만들라고 지시해서 만든 계좌라고 했다. 당시 광고 수익이 커지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이후 2년 동안 존재를 잊고 지냈다. 그런데 이번에 동현이 밝힌 횡령 계좌가 바로 그 계좌였다.
“그런데 대표님이 그런 걸 놓치실 리가 없잖아요.”
장원이 말했다. 장원이 아는 서 대표는 배우 보는 안목만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끔 다른 건 잘 알아도 재무 쪽에는 약한 경영인이 종종 있다. 그런데 주희는 처음부터 타고난 경영인이라 생각할 정도로 회사 사정에 밝았다. 남 회장이 괜히 주희에게 투자하고 며느리로 들일 정도로 욕심을 낸 것이 아니었다.
“남 실장이 한 일이라 그러신 거예요?”
세라가 무언가 짐작한 듯 말했다.
“응… 결혼하기 전부터 남 실장이 우리 회사에 입사하게 됐을 때 난 그 사람이 뭘 하든 내버려뒀어. 남 회장님께는 아픈 손가락이지만 어쨌든 그분의 자식이잖아. 그 사람이 인정 못 받고 살아온 것도 아니까 여기서라도 하고 싶은 거 해보라고 그냥 둔 건데… 사실은 그런 변명으로 나도 방관한 거야. 다 내 탓이지…”
동현이 횡령을 폭로한 후 주희는 그 계좌의 거래 내역서를 받아 살폈다. 그때서야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계좌는 2년 동안 수천만 원씩 돈이 입금되고 있었다. 그런데 광고주들이 입금한 돈이 아니었다. 송금인은 회사 소속 배우들의 이름이었다. 배우들에게 돈을 줬으면 줬지 받을 이유가 없었다.
돈이 조금씩 티 나지 않게 빠져나가고 있는 것도 발견했다. 대부분 수백만 원 단위로 빠져나간 돈은 수천만, 수억 단위로 오가는 기업 회계에서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수취인을 확인하고 주희는 회사를 설립한 후 처음으로 당혹했다. 돈이 출금된 모든 이체 내역의 수취인란에는 ‘서주희’라고 찍혀 있었다.
“지금은 안 쓰는 은행의 오래된 계좌였어. 어떻게 거래 내역을 몰랐냐고? 확인해 보니 입출금 알림이라든가 타 금융 계좌 조회라든가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다 정보제공 거부로 해놨더라고. 핸드폰 번호도 내 명의의 다른 번호로 바뀌어 있었어. 업무용으로 예전에 쓰다가 말고 신경 안 썼던 번호인데 어느새 그 사람이 쓰고 있더라. 은행 홈페이지는 내 인증서로 들어가서 했겠지. 그래도 부부잖니. 급할 때 비밀번호를 알려주기도 했어. 그리고 내가 CEO잖아. 들어오고 나가는 돈이 많잖니. 소득세 신고할 때 크게 신경 안 쓸 정도 차이의 금액이어서 나도 2년간 몰랐던 거야. 1~2억 차이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거지. 아무튼 그 사람 혼자 절대 이런 일 못해. 분명 누군가 옆에서 방법을 알려줬을 거야.”
탄식이 흐르고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남 실장이라는 사람은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요?”
정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시선은 주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정서의 질문에 바로 답하진 않았지만 입술을 깨무는 게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망설이던 주희는 이내 각오한 듯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침통했다. 받아들여야 할 사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횡령을 빌미로 저를 대표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대표 자리에 앉으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추측이지만 아마 그다음은 능력을 인정받아 현목그룹 대표이사 자리까지 탐내는 것 같아요. 지금은 전문 경영인 체제가 확고해졌는데도 그 자리를 아직 ‘자기 것’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 사람이라면…”
“말도 안 돼…”
세라가 경악했다.
“그 인간… 정말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쉽게 대표가 되고 회장 되는 게?”
장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주희에게 물었다.
“아마 횡령한 돈으로 이사들 몇 명도 꼬드겼을 수도 있지. 우리 회사는 몰라도 현목그룹은 택도 없었겠지만. 회장님이 그룹 이사들도 아무나 선임하지 않았거든. 어쨌든 평생을 도련님으로 살아온 사람이니… 자기 것 되찾는 것만 생각했을 거야. 옆에서 누가 꼬드겼는지는 몰라도 단순한 사람이야. 사랑 없는 결혼이라도 같이 살다 보면 알아.”
“왜 하필 지금일까요? 대표님이 신경을 안 쓰셨으니 그 계좌에서 계속 돈만 빼냈어도 됐을 텐데요.”
잠시 핸드폰을 본 정서가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진동이 계속 울렸었다. 살짝 보니 해외 번호였다. 피싱이려니 하고 넘겼는데 전화가 또 걸려 왔다. 갑자기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정서의 말이 주희의 정곡을 찔러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 어머니가 유산으로 받은 재산도 전부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셨어요. 돈에 환장한 사람이 어머니 재산 상속이라도 기대했는데 미칠 노릇이었겠죠. 자기가 능력을 키우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 이렇게 남의 자리 뺐을 줄은 몰랐네요. 지켜보기만 한 제 잘못입니다.”
주희가 정서에게 말했다. 병실은 침묵에 잠겼다.
“증거가 없어져서… 핸드폰이라도 챙겨 나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놈들은 제일 먼저 장원의 노트북과 핸드폰을 챙겼었다. 사실 그때부터 남 실장이 시킨 일이라는 걸 확증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난 그 계좌에 돈 입금한 배우들 좀 만나볼게. 기사 터지고 겨를이 없어서 알아볼 생각도 못 했어. 장원아. 넌 회복에 신경 써. 여기까지 해준 것만도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 세라야 부탁 좀 할게.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제가 잘 간호할게요. 걱정 마시고…”
마지막에 힘내시라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도 어려웠고 자기 남편이 저지른 일에 주희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정서와 가벼운 눈인사를 마지막으로 주희는 떠났다.
정서는 세라가 병간호하는 데 필요한 짐을 챙겨왔다. 여자 방에 들어가는 게 민망해 정은에게 부탁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정은에게는 장원이 사회인 야구를 하다가 다쳤다고 대충 둘러댔다. 저녁까지 같이 장원을 간호하고 홀로 문학관으로 돌아오는 길이 조금 쓸쓸했다. 장원이 나을 때까지 잠깐이지만 문득 일이 다 해결되면 언젠가 세라가 자기 자리로 돌아갈 거란 실감이 들었다.
다시 문학관으로 돌아온 정서는 집에 가지 않고 테라스로 향했다. 손에는 맥주 한 캔을 든 채. 정신없는 하루였다. 잠들기 전에 술 생각이 간절했다. 세라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그녀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었다. 멀리 은은한 조명이 켜진 저수지를 바라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또 뭔 궁상 떨고 앉았냐?”
언제 왔는지 정은이 테라스 문을 잡고 말했다. 곧 보라가 맥주 두 캔을 들고 나타났다.
“그냥…”
정서가 돌아봤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정은은 흥미가 생겼다. 볼 때마다 놀리고 괴롭히고 싶고 물어뜯는 재미가 있는 동생 녀석이 무슨 일인지 심각한 표정이었다.
“뭔데. 말해봐.”
“세라 일이겠지. 뭐.”
정은이 물으면서 정서 옆에 앉았다. 보라도 정서를 포위하듯 다른 쪽 옆에 앉아 정은을 거들며 말했다.
거의 20년을 봐 온 동생은 얼굴만 봐도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세라와 묘한 관계라는 것도 한눈에 알아본 정은이였다. 이런 표정의 정서라면 몰아붙이기보다는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게 좋았다.
“소속사 쪽 일이 많이 안 좋아?”
정은이 넌지시 물었다. 요즘 정서가 집필도 손에 놓고 신경 쓰고 있는 일이니 그 일일 확률이 높았다.
“응. 좀 그렇네…”
대답이 금방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역시 알기 쉬운 녀석이란 생각에 정은은 속으로 웃었다. 문득 아까 세라의 짐을 챙겨준 일이 생각나 말했다.
“세라나 장원 씨한테 무슨 일 있는 거지?”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아예 떠나는 것도 아니었고 본인이 직접 와서 챙기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니. 거기에 지금 정서의 상태를 보니 분명 쉽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정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 봐. 들어나 보자.”
정은이 정서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한숨을 한번 내쉰 정서가 그간의 일을 들려줬다. 소설가와 드라마 작가인 두 여인은 금세 이야기에 몰입했다.
긴 이야기는 각자 들고 있던 맥주 한 캔이 다 비워질 때쯤 끝이 났다.
“기가 막힌다… 내가 이래서 결혼을 안 해요.”
“얘. 이상한 데서 논점 벗어나지 마. 아무튼 장원 씨는 괜찮은 거지?”
보라를 타박한 정은이 장원을 걱정했다. 아직 장원과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하진 않아도 꽤 믿음이 가는 남자였다.
“응. 괜찮아. 그 몸으로 일산까지 용케 온 게 대단하지. 푹 쉬면 금방 일어날 놈이야.”
정서가 말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더는 말이 없었다. 그들이라고 딱히 방안이 떠오른 건 아니었다. 말이라도 하면 정서의 속이 시원해질까 싶었는데 다 듣고 나니 더 답답한 감이 있었다.
“다른 작가들한테도 말해보는 건 어때?”
보라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면 뭐해요. 누나들도 들었으니 알잖아요. 상황 어려운 거. 다들 글 쓰는 것도 바쁜데 괜히 되지도 않을 일로 방해하기 싫어요.”
정서가 단칼에 거절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말에 씨가 있었다. 정서는 벌써 이 일이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정은은 그게 마음에 걸렸다. 정서가 이럴 땐 충격요법이 좋았다.
“만약 서 대표가 이대로 물러나면 세라는 어떻게 되려나.”
“…….”
세라를 지원하고 밀어주는 건 서 대표이지 남 실장이 아니었다. 주희의 추측대로 남 실장이 대표가 된다면… 그 이후의 일은 저절로 그려졌다.
배우 중 대다수는 무명으로 조용히 사그라진다. 관객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운동선수들은 방출이라는 이유로 시즌이 바뀌면 명단에서 이름이 빠진다. 자신을 찾아주는 구단이 없으면 이리저리 돌다가 은퇴식도 없이 자기 업(業)을 마감한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 뒤에선 그들만의 살얼음판을 걷는다. 스타들이 받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그 시리도록 투명한 얼음판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 누군가는 이렇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때 그 배우 연기 잘했는데. 이제 안 나오네.
그 선수 잘될 것 같았는데. 언제 방출당했대?
이름이 뭐였더라? 에이, 모르겠다.
세라가.
그렇게.
사라진다.
콰직.
정서는 대답 대신 이젠 내용물이 없는 빈 캔을 찌그러트렸다.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건 흔이 오빠 때 일로 충분해. 그때 누나가 했던 말 기억나? 나중에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느니 뭐라도 시도해 보고 미련 안 남는 게 나아.”
정은이 찌그러진 빈 캔 대신 자기 캔을 정서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정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온갖 사건을 만들고 또 해결해 내는 작가들이 있는 새벽 문학관. 그리고 내일은 마침 금요일이었다.
다음날. 모든 작가가 모인 저녁. 다른 금요일 파티와는 다르게 작가들은 식사를 일찍 끝내고 거실에서 맥주나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오전에 보라가 오늘의 파티는 중요하게 논의할 일이 있다며 단톡방에 미리 공지를 남겼다.
다들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매번 금요일마다 실컷 술 마시는 게 낙이었던 선호는 아쉬운 듯 와인만 홀짝이고 있었다.
“자자, 집중 좀 해주시고. 사실 논의라기 보다는 같이 고민하면 뭐라도 나올까 싶어서 자리를 만들었어요. 우리 스탭 세라 씨랑 관련된 일이기도 하고. 얘기가 좀 긴데 빨리 말할 테니까 잘 들으세요.”
식사 정리가 끝나고 정은이 대신 설명했다. 정서는 말이 느리기도 했고 흥미로운 일도 재미없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정은은 작가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이야기에 살을 조금 더 입혔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눈이 초롱초롱한 데다 몇몇은 어떤 영감이라도 받았는지 핸드폰에 메모를 남기고 있었다. 사실 여기 있는 이들은 조금이라도 소재로 쓸만한 이야깃거리라면 환장한 사람들이었다.
“이야, 무슨 시나리오 듣는 줄 알았네. 흥미진진하구먼.”
선호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각자 말했다.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팩트를 밝히는 게 중요한 진짜 기자를 한 명 알아. 이슈팩트 같은 데랑은 차원이 다르지.”
“저도 전에 인터뷰할 때 알게 된 기자 한 명 있긴 한데… 그런데 증거가 없는데 기사를 내줄까요? 명예훼손 고발당하면 어떻게 해.”
“서 대표가 직접 말한 거잖아. 어떻게 보면 증인이지. 지금 기사 나온 것도 아직은 의혹이고 조사가 시작된 것도 아니잖아.”
한동안 정은의 목소리만 들린 자리가 시끌벅적해졌다.
“그 대표라는 사람이 반박 기사 내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기자들도 혹할 것 같은데. 기자회견 이후 아무 입장도 없던 서 대표의 반박 기사. 그림 좋잖아요.”
근영이 말을 덧붙였다. 작가 몇이 그렇지! 하며 호응했다.
“그런 반박 기사는 지금은 소용없어.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거든. 가십거리만 좋아하지. 그래봤자 키보드 워리어들이 쓴 ‘생쇼를 한다’ 같은 댓글만 가득할 거야.”
좋아지려던 분위기에 냉소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팔짱을 낀 채 시선은 내리깔고 말한 사람은 정서였다.
자리는 한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정서를 쳐다봤다.
정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서가 한 말은 예전 최흔이 겪은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나온 말이 틀림없었다. 아까 충격요법으로 끄집어낸 줄 알았는데 녀석은 아직 그 감정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최흔이 소송을 당했을 때 정서는 하루 종일 흔의 일을 다룬 기사만 읽었다. 악플에 일일이 댓글을 달고, 신고하고, ‘싫어요’ 버튼을 눌렀다. 출판사에서 낸 반박 기사에도 댓글을 달고 ‘좋아요’를 눌렀다.
한창 흔과 정서가 주말마다 수업하던 날이면 정서는 문학관에서 자고 가곤 했다. 자다 깨서 물을 마시러 나왔을 때 늦은 밤에도 거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댓글 다는 데 정신이 팔렸던 정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 듯 소용이 없었다. 온라인 시대에서 어디서 쏘았는지도 모를 화살의 비는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심하게 내리꽂혔다.
어쩌면 그때 흔과 정은보다 더 세상에 상처받고 마음의 문을 닫은 건 정서였는지도 몰랐다.
정은이 다가가 정서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충격요법이니 뭐니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정은은 그저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흔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자신과는 달리 정서는 그렇게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돕겠다잖아. 자기 일도 아닌데 말야. 집필하기도 바쁜 사람들인 거 알잖아. 여기 사람들이 세라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세라도 이제 여기 식구야. 무엇보다 지금은 분위기를 전환하는 게 중요해. 증거가 있든 없든. 예전 일은 잊고 일단 해보자.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떻게 되겠니.”
정서가 고개를 들어 정은을 봤다. 마지막 말은 특히 흔이 좋아하고 자주 하던 말이었다. 정서가 나직이 다음 말을 이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지…”
작가들도 흔에 대해서는 얼핏 알고 있었다.
“그래. 야구도 일단 출루해야 점수를 내든 말든 한다고. 일단 해봅시다.”
선호가 말했다. 정은과 눈이 마주쳐 같이 씩 웃었다.
“전 제 SNS에 이 내용으로 네컷만화 그려서 올려 볼게요. 나름 5만 팔로워랍니다.”
혜리가 말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아까부터 패드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난 기자들한테 보낼 내용 정리해 볼게. 세라가 내 글 제일 많이 봐줬는데 이렇게라도 손 보태야지.”
보라가 말했다. 그녀의 드라마 대본에는 세라의 손때가 제일 많이 묻어 있었다.
“어, 그거 저랑 같이 해요. 근데 이 스토리 나중에 내 소설에 써도 되려나?”
작가들이 각자 말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정서의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올라왔다. 정은이 그런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흔이 오빠처럼 억울한 사람 또 생기면 오빠가 싫어할 거야. 세라랑도 관련된 일이고 이번엔 지원군도 든든하고 좋네. 이번엔 세라를 위해서 한번 잘해봐.”
정서가 일어났다. 녀석이 말은 안 해도 그의 눈빛이 바뀐 걸 보고 정은은 안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