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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_ 파도의 방향

윤담 장편소설

by 윤담

정서는 모처럼 서울로 나와 있었다. 서울에서 운전하는 건 싫어서 일부러 버스를 탔다. 상암의 디지털미디어시티는 처음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낙후됐던 지역이 한창 개발될 때라 와볼 일이 없었다.


원래 밖에 돌아다니는 성격이 아니었던 터라 회사에 다닐 때도 강남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었다. 정서는 깨끗하게 조성된 거리를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책방은 당분간 효민에게 맡기기로 했다. 더 쌓을 스펙도 없다며 흔쾌히 책방을 맡아 준 효민이 고마웠다. 처음엔 잠시 책방을 닫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효민이 책방 SNS와 블로그를 열심히 운영한 덕에 찾는 손님이 늘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일이 모두 끝나면 추가 시급을 가산해서 잘 챙겨줄 생각이었다.


오는 길에는 병원에 들려 장원과 세라를 보고 왔다. 새로운 소식이 들렸다.


서 대표가 동현의 집에 직원을 보냈는데 동현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남 실장이 손을 쓴 건지 아니면 장원의 말대로 잘 피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동현의 핸드폰은 묵묵부답이었다.


서 대표는 또 청소업체를 불러서 장원의 집을 싹 청소했다. 그때 놈들이 신발째로 들어와 어지럽힌 방을 깨끗이 정리했다. 놈들은 장원이 탈출하고 바로 떠났는지 그 이후의 다른 흔적은 없었다고 했다. 예상대로 장원의 핸드폰이나 노트북은 발견되지 않았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아쉬운 일이었다.


이런저런 상념을 떠올리다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1층 카페에는 벌써 만나기로 한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바쁜 사람 불러놓고 십 분이나 늦어?”

그가 말했다. 인상을 쓰고 있었는데 어딘지 장난치는 구석이 있었다.


“오늘 촬영 없는 날이라며.”

정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야. 윤 피디.”


윤 피디도 인상을 풀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정서는 작가들에게 털어놓은 다음 날 윤 피디에게 연락했었다. 연락하기 전까지 정서는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요 몇 년은 책 읽고 글 쓰는 것밖에 한 게 없었다. 안태인 기자에 대해 알아낸 건 효민 덕이었다. 밤새 고민 끝에 떠오른 사람이 윤 피디였다.


그 흔한 작가 인터뷰도 전부 거절했던 정서는 언론 쪽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드라마 감독이 직접 도울 일은 없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여긴 좀 그렇고 다른 데 가서 얘기할까?”


정서가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방송국 카페는 조심스러웠다. 윤 피디가 근처 2층 카페로 안내했다. 마침 테라스 자리가 비어있어서 아예 그쪽에 자리를 잡았다. 근처로 누가 지나다닐 일도 옆자리 사람이 들을 일도 없이 딱 좋은 자리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윤 피디가 영문을 몰라 물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하질 않나 대뜸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하질 않나. 작가 중에 괴짜들이 많은 건 알고 있었다. 앞에 있는 정서도 이상하기로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는데 오늘따라 더 이상했다.


“세라 씨랑 PEARL 엔터테인먼트 서주희 대표랑 관련된 일이야.”


정서는 처음부터 다 말했다. 기민서와 세라의 스캔들 사건이 터지고 세라가 정서의 문학관에 오게 된 일부터 최근 장원이 겪은 일까지.


모든 걸 처음 듣는 윤 피디는 처음엔 그냥 호기심이 생긴 표정이었다. 세라랑 썸이라도 타냐고 장난스럽게 묻다가 소속사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진지해졌다. 서 대표는 이 바닥에서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들었다.


워낙 좋은 배우가 많아서 세라 말고도 다른 배우를 캐스팅할 때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조용할 날이 더 적은 연예계에서 오랜만에 관심갖고 보는 기삿거리이기도 했다.


“음… 일단 알겠어. 그런데 나한테 이 얘길 하는 이유는? 형이 알다시피 난 드라마 감독이야.”


윤 피디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정서의 이야기는 꽤 흥미진진했다. 어렵겠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아예 뒤집지 못할 판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일과 관련 없는 자신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네가 제일 믿을 만해서.”

“뻥 치지 말고…”

윤 피디가 웃는 얼굴로 농담을 받아쳤다.


“쳇, 아니 내가 방송이나 언론이나 이쪽에 아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잖아. 뭐라도 좀 길을 알려줄 수 있을까 싶어서…”


정서가 소심하게 말했다. 윤 피디는 그런 정서가 귀여운 듯 피식 웃었다.


“흠… 우리 회사 기자 한 분은 소개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턱을 괴고 잠시 고민하던 윤 피디가 말했다.


“그 기자님한테 말하면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이 판국에 기사 하나 나온다고 해결될 것 같아? 뒤집을 판을 만들어야지.”


“우리 문학관 작가들이 애쓰고 있긴 한데. 아직은 거의 물밑에서 이뤄지는 거다 보니까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하면 판을 뒤집냐…”


답답함을 느낀 윤 피디가 잔소리했다. 좋은 사람이고 괜찮은 작가인 거랑은 다르게 이럴 땐 참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형이었다.


“그건 형한테 달렸어. 내가 말해 둘 테니까 이 번호로 연락해 봐. 우리 채널 뉴스 쪽에서 제일 이름 있는 사회부 기자야. 기자 협회에서 상도 여러 번 받았어.”


윤 피디가 배영태 기자라는 사람의 연락처를 보내줬다. 입사 동기의 친한 대학 선배여서 몇 번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있었다.


배 기자는 안태인 같은 기자와는 급이 다른 사람이었다. 각종 부패, 횡령, 배임 등 굵직굵직한 사회 부조리 사건에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몇 년 전 큰 이슈였던 한 대기업의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밝히는 데도 배 기자의 역할이 컸다.


연예계와는 관련이 적었지만 그가 회사 내에서 가진 입지와 언론계에서의 공신력이라면 판을 뒤집는 데 보탬은 될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아무 일에나 나서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배 기자는 보도 본부장이나 사회부 국장 같은 직속 상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사장 말도 듣지 않을 거라는 소리도 농담처럼 하곤 했다.


배 기자는 그가 부조리,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일에 진실을 밝히겠다고 마음먹은 일에만 움직였다. 그런 그를 설득하는 건 정서의 몫이었다. 그마저도 할 수 없다면 이번 일은 반전시키기 어려울 거라고 윤 피디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응원했다.


“고맙다.”


정서는 연락처를 저장하며 말했다. 슬슬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리고 정서도 이건 자신이 직접 해야 할 일임을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정은에게, 윤 피디에게, 효민에게, 작가들에게, 또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대신 맡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네가 믿을 만한 건 진심 맞아.”

카페를 나오면서 정서가 말했다.


“말이라도 고맙네. 아무튼 잘 되길 바랄게.”

두 사람은 주먹을 툭 부딪치고는 각자의 길을 갔다.


***


시대가 참 많이 변했다. SNS의 힘은 컸다.


— PEARL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소속 배우 정산금 횡령 사건.

과연 알려진 대로일까요?

연예계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실제 소속사 직원 A 씨가 증언한 내용을 토대로 만든 네컷만화입니다.)


웹툰 작가 혜리가 SNS에 네컷만화를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혜리 계정의 기존 팔로워들에게만 관심을 받았다. 혜리는 한 번에 모든 내용을 올리지 않았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하루에 하나씩 천천히 올리는 게 더 많은 호응을 끌어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확실히 요즘 연예계의 대표 이슈이다 보니 확산되는 속도도 빠른 편이었다. 혜리의 게시물을 퍼 나르는 인플루언서, 혜리를 추종하는 여러 SNS 툰 작가들과 그들의 팔로워들, PEARL 엔터테인먼트 소속 다른 배우의 팬들까지. 이번 일에 긍정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유입되면서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아직 정식 언론 기사가 나오진 않았으나 혜리가 올리는 소식을 전달하는 형태의 유튜브 영상도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특히 장원이 폭행당한 이야기가 나온 게시물이 올라왔을 때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제는 점차 연예계에 관심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반응이 나타나고 있었다.


“어째… 제 다른 그림들보다 좋아요 수가 더 많이 나오네요? 하핫.”


점심 식사를 마친 문학관의 커피 타임. 혜리가 거실 테이블에서 핸드폰을 보며 민망한 듯 말했다.


“그러게. 예전처럼 악플도 많이 안 보여. 이런 것도 알고리즘 덕분이야?”

옆에서 혜리의 화면을 들여다보던 근영이 말했다.


“어느 정도 영향은 있죠.”

“일단 재밌잖아. 혜리 그림체도 귀엽고. 이 정도 관심받을 만하지. 안 그래?”

맞은편에 앉은 선호가 기분 좋다는 듯 크게 말했다.


아침, 저녁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자 입주작가들은 퇴소할 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지금 작업 중인 작품들도 곧 마무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다들 평소엔 작품에 몰두하다가도 이런 식사 자리에선 항상 세라 소속사에 관한 이야기로 입을 모았다.


“어? 이 사람…!”

“왜. 뭔데?”


갑자기 혜리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가만히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혜리가 입까지 가리며 놀라자 근영이 바로 관심을 보였다.


“방금 ‘시사해방’에서 연락 왔어요… 제 툰으로 영상 만들고 싶다고.”

“시사해방? 그 구독자 겁나게 많은 유튜브?!”


얼떨떨하게 말하는 혜리를 보고 이번엔 선호가 놀라며 말했다.


‘시사해방’은 시사 이슈를 전문으로 다루는 유명한 유튜브 채널 이름이었다. 최신 이슈를 빠르게 다루면서 인기를 끌다가 영상 편집도 재미있게 만들면서 구독자가 100만을 넘더니 지금도 계속 늘고 있었다. 뉴스를 거의 안 보는 젊은 세대가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를 접하는 주요 루트이기도 했다.


“나도 알아. 이 채널 거의 회사처럼 직원들 쓰면서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생각지 못한 소식에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며칠 후 시사해방 채널에서 직원들이 직접 파주로 찾아왔다. 피디부터 작가, 카메라를 든 VJ 두 명으로 여느 취재 차량 못지않은 구성이었다. 그들은 우선 문학관에서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피디와 작가가 이것저것 물어보며 촬영 계획을 짰다.


정서가 윤 피디를 만나기로 한 날이라 혜리가 대신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어느 정도 촬영 구도가 잡힌 일행은 곧 장원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시사해방에서 온다는 소식을 들은 정서는 미리 장원에게 협조를 구해놓은 상태였다. 아직 민감한 부분이 있을 수 있어서 세라는 자리를 피했다.


장원은 아직 얼굴에 멍도 남아있었고 가슴에는 압박붕대를 하고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라도 촬영 피디에겐 흡족한 모습이었다. 벌써부터 섬네일이 그려졌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할 거라고 말한 피디는 촬영을 시작했다.


“일단… 질문을 드리기 전에 지금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실례지만 혹시 폭행… 당하신 건가요?”


장원의 상태를 본 피디가 그 자리에서 순서를 바꿔 물은 질문이었다. 물론 장원에게도 미리 귀띔한 상태였다.

촬영팀은 만족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올해 큰 이슈가 없어서 구독자 수 증가가 더뎌진 상태였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피디와 작가는 이번 영상은 꽤 조회수가 나올 거라 확신했다.


— PEARL 엔터테인먼트 소속 매니저 A 씨는 왜 폭행당해야 했나?

횡령을 주도한 인물이 따로 있다?

시사해방에서 횡령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다.


장원을 인터뷰한 영상은 피디의 예상대로 순식간에 화제를 모았다. 다친 모습의 장원을 보고 여론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PEARL 엔터 소속이 아닌 배우들도 웹툰과 유튜브 영상에 좋아요를 누르자 그들의 팬심까지 요동쳤다.


이상함을 느낀 언론에서도 이제껏 밝혀진 내용에 관한 의혹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PEARL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전화는 온통 불이 나도록 울리고 있었다.


“파도의 방향이 바뀌고 있는 것 같네요.”

배영태 기자가 말했다.


시사해방 영상이 올라온 후 정서는 더 이상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이었다. 영상에 대부분이 담겨 있었으니까. 만나기 전에 배 기자에게도 영상을 먼저 봐 줄 것을 요청했다.


“말씀드린 대로 증거는 소실된 상태입니다. 기사를 써주실 수 있을까요?”

배 기자가 자료를 읽으면서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보라와 근영이 사건을 정리해 준 자료였다.


“드물지만 때론 증언이 더 효력을 발휘하기도 하죠. 그전에…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배 기자는 자료를 훑어본 후 테이블에 내려놓고 말했다.


“네. 말씀하시죠.”


정서는 긴장됐다. 윤 피디가 해준 말에 따르면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일 것 같았다.


“소설가라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까지 관여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배 기자는 아무 상관 없는 작가가 왜 이 일에 나서는지 물었다.


정서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소중한 사람이… 자기 잘못도 아닌데 상처받는 걸 또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답이었다. 구구절절이 답하는 것보다 이게 나을 것 같았다. 사실은 왜인지에 대한 답을 길게 할 자신도 없었다.


사람 눈을 잘 마주 보지 않는 정서가 배 기자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긴장한 건지 방금 뱉은 말에 영향을 받은 건지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배 기자는 고개만 끄덕일 뿐 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배 기자가 자료를 봉투에 툭툭 넣으며 일어났다.


“연예계는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써보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정서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오늘 정서는, 지금껏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남들이 정한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했던 지난날들과 작별했다.


***


[단독] PEARL 엔터테인먼트 횡령 사건 재조명

최근 한 웹툰 작가의 SNS와 시사 전문 유튜브 채널의 영상을 통해 PEARL 엔터테인먼트 서주희 대표의 횡령 사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영상에 출연한 매니저 A씨가 폭행과 감금을 당한 사실에 시청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반응이다…


배영태 기자의 기사가 나오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는 분위기가 됐다. 여태 주희를 죄인으로 확정 짓고 몰아세우던 언론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호의적인 기사를 내고 있었다.


어떤 언론사는 주희가 그동안 다양한 봉사활동과 여러 단체에 기부해 온 것을 조명했다. 그들은 지난 과오에 사죄라도 하는 듯했다.


장원은 이 기회에 결정타를 날리기로 했다.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해지자 기자회견을 요청한 것이었다. 정서가 한 번 더 다리를 놨다. 배영태 기자는 방송국에서 기자회견을 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줬다.


장원의 기자회견이 8시 뉴스에 나올 정도로 세상의 이목이 쏠렸다.


건호는 미칠 지경이었다.


처음 장원이 회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싶다는 연락이 왔을 때 자신이 거부했다. 그리고 안심했다. 세상에 목소리를 낼 힘도 없는 녀석이 서 대표의 도움 없이 다른 곳에서 회견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녀석은 떡하니 채널K 방송국에서 회견을 열었다.


주희는 한동안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주희가 도와준 일이 아니었다. 운동선수로 실패해서 겨우 매니저질로 밥 벌어 먹고사는 놈이 어떻게 방송국 같은 데서 기자회견을 할 수 있었던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분위기도 안 좋은데 설상가상으로 장원을 놓친 대부업체 사장 녀석은 오히려 건호를 협박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자신들을 사주한 일을 폭로하겠다고. 돈만 되면 뭐든 하는 주필이 놈이 여론 돌아가는 모양을 보더니 돈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동현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안 돼서 잘 숨어있겠거니 했는데 녀석은…


“남은 돈 지금 주세요. 보니까 실장님 생각대로 안 될 것 같은데 저까지 피해 보게 생겼잖아요. 전 시킨 대로 한 것밖에 없는데! 씨발… 돈이라도 받아야겠어요. 내일까지 입금 안 하시면 자료 다시 장원이 형한테 보낼 겁니다.”


아직 횡령 계좌에서 돈을 다 빼지도 못했는데 엄한 돈만 깨졌다(동현이 있어야 돈을 뺄 수 있는데 녀석이 잠수를 탔다).


건호는 일단 홍보팀 직원들을 미친 듯이 닦달해 보도자료를 만들게 했다.


며칠 후 PEARL 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반박 기자회견이 열렸다. 장원의 기자회견에 회견으로 맞불을 놨다. 건호는 뒤에서 지켜보고 홍보팀장을 대신 세웠다.


“현재까지 저희 PEARL 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실장이나 회계팀 직원 또는 다른 사람이 횡령에 가담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저희 공식 입장입니다. 이 화면은… 횡령 수단으로 확인된 계좌에서 돈이… 이체된 내용입니다.”


국어책 읽듯 발표문을 읽던 홍보팀장이 화면을 띄웠다. 그가 건호의 사람은 아니었다. 서 대표를 봐 온 시간이 있는데 지금 상황을 믿기도 힘들었고 이런 발표를 하기도 싫었다.


그런 홍보팀장에게 건호는 이대로 하지 않으면 이사들이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거라 겁을 줬다. 회사가 망해서 배우나 직원들이나 모두 길바닥에 나앉으면 책임질 거냐는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었다.


홍보팀장도 건호가 탐탁지 않았지만 서 대표가 없는 지금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취인에 온통 주희의 이름이 찍혀 있는 화면에 여론은 다시 한번 갈팡질팡했다. 심지어 국감 시즌을 맞아 감사장에서도 이번 사건이 거론됐다.


대중들은 기사마다 댓글로 서로 싸워대고 있었다.


***


배우 리나가 갑자기 귀국했다.


미국에서 영화 촬영 일정이 아직 남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들어온 이유에 대해 말이 많았다.


누군가는 리나가 거장 에릭 감독의 영화에 캐스팅되어 홍보를 위해 들어왔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소속사에서 벌어진 일과 연결해 추측했다.


발 빠른 기자들이 귀국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공항으로 달려갔다. 미국 진출 이후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리

나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내일 오후 두 시에 칼슈타인 호텔에서 제 거취에 대해 입장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시간 되시면 와주세요.”

리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후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채 공항을 빠져나갔다.


거취라니. 리나는 그동안 소속사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었다. 몇 번 예능에 출연했을 때도 서주희 대표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 항상 말했던 그녀였다. 리나의 ‘거취’라는 한 단어에 잠시 여론이 집중됐다.


다음날 호텔 앞은 오전부터 취재진과 팬들로 북적였다.


오후 1시 50분. 새하얀 벤틀리가 호텔 정문에 섰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먼저 팬들에게 인사했다. 팬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로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리나는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호텔로 입장했다. 미국 진출 이후 풍기는 아우라가 달라져 사람들의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녀는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도 돋보였고 미국 현지에서부터 데려온 덩치 큰 경호원들이 삼엄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건호는 이미 회견이 열리는 컨벤션 홀에 들어와 있었다. 그는 사실 리나가 들어온다는 소식도 모르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쏟아지는 기사를 읽으며 돌아가는 상황을 보던 중 리나의 귀국 소식을 기사로 접했다.


건호는 당황했다. 주희가 없는 지금 회사의 최종 결재권은 자신이 갖고 있었고 모든 보고도 자신에게 먼저 들어오고 있었다.


“너희 리나 들어오는 거 몰랐어!? 당장 무슨 일인지 알아봐!”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와 또 직원들을 다그쳤다. 리나가 회사에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귀국한 일을 직원들이 알 리가 없었다. 엄한 잔소리를 들은 직원들은 영문도 모르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직원들의 사내 메신저 대화창에는 건호를 욕하는 대화가 오갔다.


뒤늦게 연락했으나 리나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같이 보낸 매니저들도 마찬가지였다.


건호는 리나를 만나러 성수동 펜트하우스로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리나가 데려온 백인, 흑인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하며 문턱을 넘지도 못했다. 현지 경호원 예산을 이렇게까지 배정한 기억이 없는데 열 명은 그냥 넘는 숫자였다.


그들은 소속사 사장 대행이라고 밝혀도 통하지 않았다. 자신이 왔으면 매니저 녀석들이라도 나와야 하는데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No! 도라-가쎄요.”


한국말을 어설프게나마 하는 한 흑인 경호원의 살벌한 표정에 눌려서 결국 쫓겨나듯 초라하게 나와야 했다.

그는 당최 리나가 왜, 그리고 하필 지금 들어온 것인지 몰라 불안했다. 주희가 자리를 비운 지금 그래도 사장 대행이라고 어쩔 수 없이 오긴 했다. 그러나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를 지금이라도 중단하고 싶었다.



건호는 컨벤션 홀의 맨 뒤 어두운 곳에서 팔짱을 낀 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집중된 조명을 받으며 리나가 대기실에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 당당하게 단상에 오른 그녀는 환한 미소로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행사를 진행하는 사회자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리나는 익숙한 듯 강한 빛에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환호와 카메라 소리가 잦아들고 사람들은 리나의 말에 집중했다. 그녀는 먼저 기사와 다르게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나 일찍 들어오게 됐다고 밝혔다. 또한 아직 소문으로만 알려진 에릭 감독의 영화에 캐스팅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좌중에선 탄성이 나왔고 성미 급한 취재진 몇이 손을 들었다.


리나는 웃으며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하고 말을 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로 나갈 겁니다. 사실 오늘 이 자리를 연 것은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사라니. 지금 회사 홍보팀 직원들은 온통 주희가 횡령을 주도한 내용의 자료를 계속 만드는 중이었다. 본인이 직접 지시한 일이었고 오전에도 홍보팀장이 가져온 보도자료를 승인했다. 직원들이 리나의 기사를 쓸 틈이 없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건호는 계속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실들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조용했던 분위기가 웅성대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의 초롱초롱한 눈이 ‘대충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으니 얼른 사실을 들려줘’라고 보채는 듯했다. 좌중은 리나가 꺼낼 중요한 일이라는 게 현재 소속사의 횡령 사건에 관한 내용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리나는 그 반응을 재미있게 쳐다보며 적당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겼더군요. 당장은 촬영이 급해서 신경 못 쓰고 있다가 얼마 전에 자세히 알게 됐어요.”


이 순간 기자들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노트북 위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 고요한 분위기에 기침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우선… 제 배우로서의 명예와 연기 인생을 걸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소속사의 횡령 사건과 관련해 저희 서주희 대표님은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님을 보증합니다. 또한! 언론을 통해 밝혀진 대표님이 횡령을 주도했다는 내용은 절대 사실이 아님을 이 자리에서 증인으로서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기자들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건호는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증거 따윈 저들이 찾을 수 없다는 자신이 아직 남아있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팔짱을 낀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리나는 다시 한번 손을 들어 기자들을 말렸다.


“여러분. 더 자세한 내용을 전해드릴 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리나는 말을 마치며 대기실 입구를 가리켰다. 리나의 손짓에 카메라가 모두 단상 옆 대기실로 향했다. 미리 약속이라도 된 듯 조명이 한 박자 늦게 대기실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주희가 등장했다.


주희는 새하얀 정장을 차려입고 나왔다. 그녀는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더욱 빛나 보였다.


단호히 결심한 표정이었다. 주희는 굳건하게 세상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냈다.

남편이라는 이름의 치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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