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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_ 우리의 첫 드라마 (완결)

윤담 장편소설

by 윤담

세라는 드디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집과 회사, 매니저와 차. 잃었다고 생각했으나 잠시 내려놓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공백은 정서와 문학관, 책방에서 알게 된 사람들로 넘치도록 채워졌다. 그들이 내민 손은 따뜻했고 잃어버린 자신감까지 되찾을 수 있었다.


문학관을 떠나던 날. 세라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선호, 보라, 근영, 혜리, 영준을 비롯해 자신을 많이 챙겨줬던 작가들. 그들의 글과 삶에서 참 많은 걸 배웠다.

글에서는 작품의 깊이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사람에게서는 배우로서의 깊이를 채울 수 있었다. 소설이든 극본이든 가리지 않고 대사만 나오면 남몰래 연습했던 그 순간들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작가들도 아쉬움을 가득 담아 언제든 힘들면 찾아오라며 그녀의 미래를 위해 축배를 들었다.


첫날부터 문학관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정은.

이제는 친언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신인 시절 ‘외동으로 자란 티가 너무 난다’고 감독이 지적했었다. 언니와 수다 떨고 쇼핑하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는 그런 소소한 것들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정은의 영향 덕에 활발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나중에 걸크러시한 배역을 맡는다면 이 언니를 떠올리며 연기할 생각이었다.


떠나는 길에는 책방에 들러 효민과도 인사했다. 정은이 친언니 같았다면 효민은 친동생이었다. 쉬지 않고 재잘대는 효민 덕에 웃음을 그칠 날이 없었다. 눈치도 빠르고 싹싹한 성격으로 일도 잘하던 효민을 볼 때마다 저런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효민이 취업하면 좋은 가방 하나 선물하겠다며 건승을 기원했다.


그리고… 정서.


주희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주희는 세라에게 이제 서울로 돌아오라고 했다. 세라는 일주일만 더 문학관에 있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왔던 것처럼 갑자기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이곳이 소중했다. 일주일은 야속할 정도로 빨리 지나갔다. 장원은 일요일에 세라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


마지막 금요일 파티에서 작가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서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주말에도 밥을 같이 먹긴 했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세라는 성인이 된 후 이렇게 많은 사람과 한 공간에서 지낸 건 처음이었다. 친구가 별로 없는 세라가 좋은 인연들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정서의 덕이었다. 스캔들 사건 때 자기를 받아줬던 일부터 문학관에서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알게 모르게 도왔다. 특히 이번 일을 해결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감사하다는 말로 제 마음을 다 담지 못할 정도로 감사해요. 자주… 올게요.”


앞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바빠서 몇 번 오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세라는 ‘자주’라는 표현을 쓰면서 기분이 착잡했다. 정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손을 흔들었다.


장원이 데리러 온 날 결국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별다른 대화 없이 헤어졌다.


한 명은 보내고, 한 명은 남긴 채.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혜리가 올린 이번 사건의 마지막 해피엔딩을 그린 그림이 ‘좋아요’ 이십만을 돌파했다. 세라는 이제는 친구가 되어버린 작가들과 소통을 계속하며 차분히 다음 작품을 준비했다.


건호는 그날 호텔을 나와 도망쳤다. 목적도 없이 길을 걸으며 욕을 내질렀다. 행인들이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억울했다. 왜 자기가 하는 일은 죄다 방해하는 건지. 내 편이 한 명도 없었다. 건호는 세상을, 부모를, 주희를, 회사 직원들을, 주필을, 장원을, 동현을… 원망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날 주희는 남 회장과의 인연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결혼과 사생활까지 드러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주희에게는 자기 사람들을 지키는 게 더 중요했다.


장원의 병실에서 나온 날 주희는 배우들을 만났다. 그전까지는 알고 싶지 않은 일을 회피하기만 한 주희였다. 그리고 의외로 쉽게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3년 전쯤 회사에서 분기별로 정산금을 지급할 때 건호가 몇몇 배우에게 연락했다. 건호는 기획실장이라는 자신의 직위를 십분 활용해 명분을 만들었다.


배우들은 받은 정산금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을 다시 입금했다. 다음 작품을 위한 마케팅비이자 감독이나 작가들에 대한 로비 비용이라는 명목이었다. 로비가 성공해 돈을 더 벌게 되면 회사도 배우도 좋은 일석이조가 아니냐고 설득했다. 계좌가 법인 명의였기에 배우들이 별다른 의심 없이 돈을 입금했다.


건호가 기획실장이자 서 대표의 남편이라는 점이 오히려 그 일이 서 대표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던 계기가 되었다. 우연이었는지 건호가 그 부분을 교묘하게 활용한 건지는 몰랐다.


리나와도 어렵게 연락이 됐다. 리나 역시 미국 진출 전 두 차례 남 실장의 말대로 돈을 입금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미국 진출이 성공한 게 그 입금 덕분인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나의 성공은 주희가 뉴욕과 LA를 오가며 발품을 판 덕이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리나는 충격이었고 어떻게든 주희를 돕고 싶었다.


“대표님. 제가 들어가는 건 어떨까요?”

마침 촬영이 이틀 전 모두 끝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리나는 매니저와 경호원들에게도 입단속을 철저히 시킨 채 이목을 집중시키며 귀국했다. 주희와 함께 입장 발표 자리를 만든 건 모두 두 사람의 계획이었다.


그사이 주희는 건호가 어설프게 주인 행세를 한 계좌를 되찾았다. 공인인증서를 바꾸고 정보를 되돌려 놓은 후 모든 입출금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자 또 불편한 진실을 발견했다. 건호는 횡령 계좌에서 자신의 계좌로 돈을 이체했다. 수백만 원, 천만 원 단위로 돈은 계속 들어오고 나갔다. 부부관계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켜만 보지 않았다면 미리 막을 수 있을 일이었음에 낙심이 컸다.


마지막에 주희에게 힘을 실어준 건 시어머니였다. 아들을 잘못 키운 죄라며, 남 회장도 네가 가만히 당하는 걸 보면 무덤에서 당장 나올 거라며 주희의 손을 잡아줬다. 그녀는 기자들 앞에서 전부 공개했다. 남 실장과 권종선 작가와의 부적절한 관계까지도 밝히고 명예훼손 및 진짜 횡령의 주범으로 남편을 고발했다.


경찰은 두 달 후 건호를 찾아냈다. 권종선 작가의 집이었다. 꿋꿋하게 양복을 입고 있던 그는 말없이 경찰을 따라나섰다.


이후 경찰 조사 결과 건호의 계좌에서 동현과 대부업체로 돈을 보낸 내용이 확인됐고 폭행 및 협박을 사주한 혐의까지 추가됐다. 수취인 중엔 안태인 기자, 박성우 감독과 권종선 작가도 있었다. 권종선 작가는 여론의 뭇매와 함께 다시는 드라마를 쓰지 못했다.


박성우 감독이 기민서를 시켜 세라와의 스캔들을 억지로 조장하고 친분이 있던 안태인 기자와 작당해 기사를 낸 것도 건호의 자백으로 밝혀졌다.


알고 보니 그들의 작전은 스캔들부터 시작이었다. 세라의 스캔들 사건으로 회사에 이목을 한번 집중시켰다. 일종의 연습 게임이었다. 조금의 터울을 두고 본 게임인 횡령으로 확대했다. 이사회가 그대로 열려서 주희가 대표 자리를 내려놓게 되었다면 그들의 최종 목표인 건호가 회사를 차지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박 감독은 그 대가로 PEARL 엔터의 이사 자리를 탐냈고 안태인과 동현은 돈을 받았다. 권종선이 받은 돈은 건호와 함께 동거하던 펜트하우스 비용으로 나갔다는 의혹의 영상이 시사해방 유튜버에 올라오며 또 한 번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사실이 밝혀진 후 나중에 세라가 말하길 기민서는 자신에게 작업했던 게 아니라 리나와 연결해 달라고 접근한 것이었다. 연예계 선배라 어쩔 수 없이 몇 번 불려 나간 자리를 안태인 기자가 그럴듯하게 사진을 찍은 것이었다.


리나는 세라에게 소식을 들은 후 오스카상을 받았던 배우 크리스와 열애 중임을 SNS에 올렸다. 그리고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배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침을 날렸다.


1년 후. 주희는 이혼 소장을 법원에 제출했다.


* * *


세라는 복귀하자마자 바로 다른 드라마를 준비하느라 한동안 바빴다. 첫 방송이 있던 날. 세라가 짬을 내어 몰래 문학관을 찾았다. 마침 거실에 모여 세라의 드라마를 보던 작가들이 세라와 장원을 환대했다. 가을을 보내고 몇 달 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양손엔 작가들이 좋아하는 술과 고마움을 담아 개개인에게 준비한 선물로 두둑했다.


손 글씨를 좋아하는 보라에게는 고급 만년필, 선호에게는 장원의 야구 인맥으로 특별히 부탁해서 얻은 김광민 선수의 싸인이 들어간 글러브, 노래 들으며 작업하는 걸 좋아하는 근영에게는 스피커, 혜리에게는 최신 기종의 새 태블릿, 꾸미는 걸 좋아하는 정은은 그녀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신상 목걸이를 선물했다.


촬영하느라 바쁜 일정에도 세라는 꼼꼼히 하나하나 신경 써서 준비했다.


“아이고, 세라 씨가 여기 와 준 게 선물인데. 뭘 이런 것까지 준비했어요. 바빴을 텐데. 허허허!”


선호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은 귀에까지 걸려 글러브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김광민 선수는 선호가 가장 좋아하는 야구 선수였다. 여기저기 만져보고 닦고 냄새를 맡는 게 마치 귀한 보석이라도 받은 듯했다.


“언니. 진짜 고마워요. 안 그래도 가끔 태블릿 버벅대서 고민이었는데. 잘 쓸게요!”


혜리도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그녀는 받자마자 포장을 뜯고 벌써 기존 태블릿과 데이터 동기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야, 씨! 이거 겁나 비싼 건데. 겁나 이쁘다… 고맙다. 세라야.”

정은은 흥분해서 세라를 끌어안고 난리였다.


“잘 쓸게요. 고마워요.”


수줍음이 많은 근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파티 음악은 어느새 근영이 받은 새 스피커로 틀어놓고 있었다.


보라도 만년필을 애지중지하며 종이를 가져와 몇 자 적는 중이었다.


“제가 작가님들한테 받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라는 기분 좋아하는 작가들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조금씩 비쳤던 웃음 뒤의 그림자는 이젠 보이지 않았다.


“세라야. 저건 뭐야? 꽤 묵직해 보이는데?”


정은이 아직 꺼내지 않은 선물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딱 봐도 정서에게 줄 선물이란 걸 눈치채고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주방에서 다음 안주를 준비하던 정서도 자기 선물은 없는지 눈치를 보는 티가 역력했다.


“아, 이건…”


세라가 선물을 들고 정서에게 다가갔다. 뒤돌아서 작가들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이 조금 발개져 있었다.


“정서 씨. 다음 주에 생일이죠?”

“아, 네…”

정서가 당황해 버벅댔다.


“정은 언니한테 들었어요. 제 생일 때 미역국 주려고 하셨었다고… 제가 처음 해본 미역국이에요. 어디서 산 거 아니고 진짜로 제가 했어요. 맛은 모르겠지만… 생일 미리 축하해요.”


조금 부끄러워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 세라에겐 다른 어떤 선물보다 가장 어려운 선물이었다.


정서의 선물을 고민하다가 정은에게 연락했었다.


— 음, 얘는 뭘 딱히 좋아하는 게 없어서… 책을 제일 좋아하긴 하는데 책은 지 책방에 많고… 아! 너 받은 것처럼 미역국 해주는 건 어때? 마침 걔 생일 1월인데.


“네? 무슨 미역국이요?”


그때야 알았다. 스캔들이 터졌던 마지막 촬영 회식 날. 정서가 어떤 걸 준비했었는지.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 남자는 항상 미안함과 고마움을 같이 느끼게 했다.


정서가 정은을 슬쩍 째려봤다. 정은은 혀를 내미는 걸로 응수했다.


종이가방을 열어보니 보온 백으로 잘 포장된 통에 미역국이 들어있었다. 김장할 때나 볼 법한 제법 큰 용기였다.


정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감동이라는 게 이런 걸까. 맨날 남들에게 요리를 해주기만 했지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다른 작가들이 받은 좋은 선물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이거면 충분했다.


맛은… 기대하진 않았지만 엄청나게 짜거나 싱거워도 상관없었다. 세라가 그만을 위해 만들어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정서는 용기를 꼭 끌어안고 작가들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제 겁니다. 건드리면… 죽여버릴 거예요.”


그러고는 냉장고 가장 깊숙한 곳에 숨기는 정서를 보면서 작가들의 웃음이 터졌다. 정서는 수줍은 표정으로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이 조금 정리되고 세라와 작가들은 다 같이 모여 드라마도 보고 술도 한잔 기울였다. 이젠 마지막이 될 금요일 파티를 여한 없이 즐겼다.


작가들이 문학관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12월까지였다. 아직 작품을 완성하지 못해 벌써 내년 입주까지 신청한 작가도 있었고 홀가분하게 떠날 작가도 있었다. 거의 매일 같이 조용한 문학관에서 특히나 다사다난했던 올해. 작가들은 좋은 추억을 안고 이별과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밖에는 함박눈이 문학관을 하얗게 칠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금요일이었다.


* * *


정서는 달라져 있었다. 올가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시간이었다.


PEARL 엔터테인먼트의 일이 해결되고 얼마 안 되어 세라가 떠났다. 그는 공허함을 느꼈다. 거의 두 계절을 함께 보냈던 그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아직 제대로 된 고백도 못 했는데 이제 다시 세라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조연이라도 그녀는 연예인이었으니까.


연예인은 보통 사람이라면 TV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에서 매일 얼굴을 보고 대화하며 지냈다는 게 꿈처럼 느껴졌다.


세라가 떠나고 정서는 유독 테라스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책방도 효민에게 맡기는 날이 많아졌고 집필도 거의 안 하는 듯했다. 그런 정서를 지켜보며 정은은 마음을 졸였다.


전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이런 상태는 아니었다. 며칠 술을 마시다가도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번엔 조금 오래 갈 것 같았다.


주말이라 문학관은 더 조용했다. 정은이 테라스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정서야 밥 먹으러 안 갈래? 시내에 돈가스집 새로 생겼다는데 맛있대. 같이 가자. 누나 배고파.”


도리도리.


정서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요즘 계속 저 모양이었다. 먹는 걸 좋아해서 배고프면 짜증을 내는 녀석이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았다.


정은은 그런 정서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도 신상 맛집에 가긴 글렀다. 정은은 1층으로 내려왔다. 대충 라면이나 끓여먹을 생각이었다.


“사귄 것도 아니면서 저럴 정도인가… 어휴, 바보 같은 놈. 한 일 년 있다가 갔으면 우울증도 생겼겠네. 쯧.”

정은은 냄비에 물을 받으며 방금 본 정서의 모습이 답답해 중얼거렸다.


“누가 우울해?”


“엄마! 깜짝아.”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정은이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놀라면서 냄비를 놓치는 바람에 여기저기 물이 튀었다.


뒤를 돌아본 정은은 방금 전보다 더 놀랐다.

정은의 앞에 최흔이 서 있었다.


흔은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수염과 머리를 잔뜩 길러 예전의 단정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흔을 바라보며 정은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빠……?”

“오랜만이야.”


최흔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정은의 머리와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냄비를 집어 던지면 어떡해. 물 다 튀었네.”


정은은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듯 꼼짝하지 못했다. 낮은 중저음이지만 탁하진 않은 목소리. 정은이 너무나 그리워하고 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아니, 갑자기… 뒤에서 말하니까. 놀라지…”

정은은 최흔이 자기 앞에 서 있는 게 아직 믿기지 않아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미안. 나 안 보고 싶었어?”


흔은 정은을 가만히 안아주며 말했다. 이 부드럽게 안아주는 촉감. 조금은 달라졌지만, 그만의 냄새. 안으면 그의 가슴 켠 밖에 닿지 않는 그의 큰 키.


최흔이 여기 있었다.


이제 실감이 난 정은이 팔을 들어 그를 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보고 싶었어…”


정은은 목이 메였다. 최흔이 떠났을 때 정서 녀석이 더 힘들어하는 바람에 그리워하는 것도 남몰래 했던 정은이었다.


그가 말해줘서 떠날 거라는 건 미리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이 떠나는 연인을 잡을 수가 없었다.


벌써 6년 전이었다. 정은의 마음속에 최흔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갈 자리는 모래알만큼의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약이 없는 기다림은 참 힘들었다. 누구에게 얘기도 하지 못하고 홀로 애를 태웠다. 수없이 많은 계절을 보내며 그를 그리워했다.


다른 커플들이 신상 맛집에, 벚꽃놀이에, 새로 생긴 데이트 코스를 신나게 돌아다니는 걸 속으로 삭이며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억울했었다. 정은은 그 감정들이 떠올라 갑자기 열받았다. 그리고 행동했다.


“누가 이렇게 늦게 오래!”

정은이 흔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너무 늦게 돌아온 죄에 대한 응징이었다.


“컥!”

흔이 복부를 움켜쥐며 나가떨어졌다.


“정은아, 너 손 진짜 맵다니까… 그새 더 세졌네.”


명치를 맞은 것 치고는 회복이 빨랐다. 당연했다. 정은이 세게 치지 않았으니까. 정은은 그런 흔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는 여전했다.


청순과 조신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성격은 털털하고 시원시원함만 갖춘 정은이다. 가끔 장난치다가 얄미워서 그에게도 손을 쓸 때 흔은 항상 이랬다. 세게 때려도 안 아픈 척, 살살 때려도 아픈 척. 얄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정은만의 남자가 최흔이었다.


정은이 다가가 다시 최흔을 안아줬다. 그녀는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숨기지 않았다.


정서는 최흔을 보고 연인인 정은보다 더 펑펑 울었다. 왜 이제 왔냐며. 어린아이처럼. 옆에서 못났다고 구박하는 정은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계속 울었다.


지난 6년간 흔이 부탁하고 간 문학관을 오롯이 지켜내고 싶었다. 십 년이 지나든 이십 년이 지나든 여기 처박혀서 결혼도 못한 채 살아도 상관없었다. 흔이 돌아오는 날 작가 겸 문학관 관리인 겸 책방 주인으로서 어엿한 모습으로 그를 맞이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실 정서는 작년부터 조금씩 자신의 글에 대해 정체를 느끼고 있었다.


— 작가님. 보내주신 원고 봤는데요. 소재는 다르긴 한데 지난번 책과 좀 비슷한 감이 있네요. 작가님이 간섭 싫어하시는 건 알지만… 예상한 느낌 그대로랄까요? 다음 책은 저희 의견도 숙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번 책까지는 출판사에서 일단 출간하기로 했다. 하지만 담당 편집자와 통화를 끊고 난 정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디서 잘못된 걸까. 플롯을 잘못 짠 걸까. 내 스타일이 너무 강한 걸까.

이런 게 슬럼프인 걸까.


이후 정서는 자기도 모르게 글을 쓸 때 스트레스를 받게 됐다. 처음 글을 쓸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몇 시간이고 몰입한 채 다 쓰고 일어나면 다리가 풀려 비틀거릴 정도였다.


힘들어도 그런 몰입의 순간들이 좋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정서는 글을 쓰는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고 필력이 예전 같지도 않은 것 같았다.


확실한 슬럼프였다. 누구나 겪고 넘어야 하는 성장의 과정이었지만 그걸 잘 잡아줄 스승. 즉, 흔의 존재가 부재했다.


재회의 시간을 겨우 정리한 세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같이 저녁을 먹었다. 정서가 그간 는 요리 실력을 발휘했다. 외국만 돌아다니느라 한식을 못 먹었을 흔을 생각해 온갖 한식 요리가 식탁에 가득했다. 주말이라 재료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흔은 정말 맛있게도 먹었다.


흔은 남미부터 시작해 유럽에서 머물고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지내다가 돌아왔다. 거의 분기에 한 번씩 나라를 옮겨 다녔다고 했다. 전쟁 중인 나라만 두 번을 겪었다. 사실 좀 더 지낼 생각이었는데 중동 지역 상황이 너무 심각해 돌아오게 됐다고 했다.


“들어오기 전에 미리 전화했었는데 너희 둘 다 안 받더라고.”

흔이 소주를 한잔 마시며 말했다.


“요즘 누가 해외 전화를 받아. 피싱 몰라? 피싱! 폰이 없으면 메일이라도 보냈으면 좋았잖아.”


정은이 흔을 타박했다. 예전 장원의 병실에서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는 흔이 입국 날짜를 잡고 걸었던 전화였다.


“어쩐지 받고 싶더라니. 형 이제 들어왔으니까 핸드폰 개통하러 가자. 들어온 기념으로 내가 사줄게.”


조금 허탈감이 들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그가 돌아왔고 앞으로 셋은 다시 전처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지금 사는 집은 원래 주인인 흔과 정은에게 돌려주고 자신은 책방 근처 아무 데나 집을 얻으면 그만이었다.


“자식, 다 컸네. 괜찮아. 어차피 다시 나갈 거야. 살 곳도 찾아놨어. 이번엔 정은이도 같이 가려고.”

흔이 기특하다는 듯 정서의 머리를 헝클였다.


“그럴까? 지금 마침 쓰는 것도 없으니 뭐… 근데 어딘데?”


정은은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옆 동네 가는 것처럼 말했다. 정서의 표정이 굳었다. 흔은 분명히 ‘지낼 곳’이 아니라 ‘살 곳’이라고 했다.


“몽펠리에. 남프랑스에 있는 해안 도시야. 조용하고 예쁘고. 고딕양식 건축물도 많아. 딱 네가 원하던 곳. 살기 좋아.”


“오, 봉주르! 좋아. 비키니 사야겠네? 몸매 유지하길 잘했다.”


흔과 정은은 6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흔은 정은이 좋아할 만한 것들만 신경 썼고 정은은 그런 흔을 철저하게 믿고 따랐다. 언제나 보기 좋은 모습이고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런데 지금 대화는 이상했다.


“무슨 말이야. 어딜 가? 이제 여기서 지내면 되잖아.”


정서가 정색하며 말했다. 이제 겨우 돌아왔는데 다시 떠난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흔은 대답을 요구하는 정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형 처음부터 외국에서 살 생각으로 떠났던 거였어. ‘사람들 눈치 볼 필요 없이 글만 쓸 수 있는 곳에서 살자.’ 정은이랑 약속한 거야. 사실 몽펠리에는 2년 전에 찾긴 했는데 좀 더 돌아다니고 싶어서 늦게 온 거야.”


“말도 안 돼… 그럼 여긴 어쩌고? 형이 나한테 부탁하고 간 거잖아. 우리 셋의 꿈이 담긴 공간이니까 잘 지켜 달라고!”

정서가 발악하듯 말했다.


“정은이 데리러 들어온 김에 여기 문학관에 대한 모든 권리랑 저 집. 너한테 다 넘기려고.”


흔은 이미 결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정서는 흔의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평소엔 유들유들한 모습이다가도 뭔가 확신하고 결정한 저 표정 앞에서는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6년 전 그가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웃기지 마. 이번엔 안돼. 내가 안 받아!”


정서는 소리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흔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2층으로 올라가는 정서를 가만히 지켜봤다.


“역시 미리 말할 걸 그랬나?”

흔이 정은을 보며 머쓱하게 말했다.


“됐어. 쟤도 이제 독립해야지. 자식이 언제까지 우리 옆에 붙어 있으려고.”


정은이 차갑게 말했다. 마치 정이라도 떼려는 듯. 하지만 정은은 말과는 다르게 어딘가 안타까운 눈빛이었다.

정은도 알고 있었다. 정서가 슬럼프를 겪고 있고 흔과 자신의 그림자가 정서에게 오히려 방해되고 있음을.


슬럼프를 잘 넘을 수 있게 옆에서 누가 잡아줄 수는 있다. 하지만 알을 깨는 건 스스로 해야 한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듯 옆에서 누가 대신 깨주지 않는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건 제대로 된 극복이 아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고비를 넘어야 한다는 걸 흔과 정은은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 겪은 과정이었으니까.



오롯이 혼자 감내하고 이겨내는 과정. 글을 써 온 날보다 앞으로 쓸 날이 더 많은 정서에게는 무엇보다 그게 필요했다.


정은은 와인잔을 입에서 떼지 않고 애써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최흔은 맥주 두 캔을 들고 테라스로 향했다. 정서는 벤치에 앉아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제 녀석도 마흔 살이 몇 년 안 남았는데 아직도 저러고 있었다. 그런 정서는 여전히 많이 아끼는 후배이자 귀여운 동생이었다.


흔의 기척을 느꼈음에도 정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정서에게 흔이 다가가 맥주를 건네며 말했다.


“여전하다. 너도.”


예전에는 옥상이었다. 동아리 시절. 다른 부원들이 정서를 시기하고 공격할 때면 녀석은 말없이 학생회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고 했었다.


정서는 낚아채듯 맥주를 가져가고는 벌컥대며 마셨다. 흔은 그런 정서를 보며 피식 웃더니 자신도 시원하게 들이켰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저수지 야경을 바라봤다. 맥주가 반쯤 비워졌을 무렵 흔이 입을 열었다.


“정서야. 형은 이제 마음이 편하다. 시간이 약인 건지…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배운 건지는 몰라도 예전이 그립진 않아. 명예나 인기 같은 거… 이제 불편해.”


정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경 쓰지 않는 곳에선 전쟁으로 매일 사람들이 죽어.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내전들… 남북한 관계? 그곳 사람들은 그런 긴장감을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어. 꿈, 미래 같은 건 사치고 그냥 생존 본능만 남아있다는 게 뭔지 눈으로 보니까 알겠더라고. 내가 그동안 쓴 건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어.”


흔이 말을 이었다. 그의 눈은 저수지를 넘어 다른 곳을 보는 듯 깊었다.


“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이야. 전쟁이 우리 탓도 아니고. 그리고 형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자기 글을 그렇게 얘기해.”


가만히 듣기만 하던 정서가 툭 내뱉었다. 그래도 목소리는 아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흔은 다시 한번 정서의 머리를 헝클이고 맥주를 마셨다. 정서도 싫지 않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진짜 괜찮아…?”

정서가 물끄러미 흔을 보고 말했다.


떠나기 전의 그는 공허해 보였다. 무풍지대에서 표류하는 배처럼. 어떤 해적 영화에서 나오던 날렵한 갤리선 같았던 그가 낡아빠진 유령선이 되어 있었다.


흔이 정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술을 꽤 마셨음에도, 조명이 조금 어두운데도 흔의 눈이 또렷하게 보였다. 사람의 눈에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보이기도 한다. 흔의 눈빛은 맑고 깊이가 있어 보였다. 다시 목적을 찾은 눈빛이랄까.


삶은 투쟁이다. 죽는 것보다 힘든 게 사는 것이고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돈이 많든 적든, 높은 지위에 있든 신입사원이든. 물리법칙처럼 동일하게 적용되는 개념이다. 최흔은 그 고통을 피하기보다 받아들이고 즐기게 된 것처럼 보였다.


어깨까지 닿을 듯 길어진 그의 머리가 사자의 갈기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마치 거친 모습으로 카리스마 있게 선원들을 지휘하는 선장처럼 느껴졌다. 예전의 깔끔한 최흔이 좋았지만, 지금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흔은 6년간 자기만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치유했다. 앞으로 그가 어떤 글을 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부러웠다.


“형… 난 지금 글 쓰는 게 두려워. 내 글이 그냥 다 똑같아서 제자리만 도는 것 같아.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정서가 고백하듯 말했다.


정은이 느꼈듯 흔도 알고 있었다. 최흔은 외국을 돌아다닐 때도 정서의 책이 나올 때마다 읽었다. 처음엔 신선했던 정서의 글은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갈수록 정서가 스스로 가둔 울타리 속에서 막힌 한계가 느껴졌다. 그 울타리를 만들고 가둔 게 자신인 것 같아 흔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형이 옆에서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안 되는 거지?”


정서가 다시 말했다. 의문문이었으나 정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흔의 대답을 본 정서도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나.


마지막으로 흔은 가벼운 어조로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난 지금 여행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어. 우리가 모르던 세상의 이야기를 다른 시선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을 쓸 거야. 넌… 뭘 쓸래?”


해답은 녀석이 스스로 찾아야 했다. 인생이 늘 그렇듯.


* * *


회사를 다시 정비한 주희는 가끔 슬럼프에 빠진 배우들을 문학관에 보내고 싶다는 진지한 농담과 함께 매년 문학관에 1억씩 기부하기로 했다. 더 하겠다는 걸 겨우 말렸다. 지자체에서 나오는 예산과 퇴소한 작가들이 자율적으로 기부하는 액수도 적지 않아서 1억이면 충분했다.


흔이나 정서나 문학관 운영으로 돈을 벌고 싶진 않았다. 흔이 벌어놨던 돈은 이제 두 사람을 위해 써야 했으니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다.


최흔은 머무르는 동안 문학관의 명의와 모든 권리를 정리해 정서에게 넘겼다. ‘새벽 흔(昕)’에서 따온 새벽 문학관의 이름도 바꾸려고 했으나 정서는 이름만큼은 그대로 쓰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새해를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흔은 다시 훌쩍 떠났다. 이번엔 오랜 연인과 함께였다. 모든 동화 작가가 바라는 결말을 직접 그리기 위해. 그 결말의 문구는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였다.


정서는 두 사람을 직접 공항에 바래다주며 편한 마음으로 보내줬다.


길지만은 않았던 시간. 지난 상처를 모두 회복한 흔의 모습에 정서도 영향을 받았다. 아니 이미 세라와 함께 지내는 동안 정서의 변화는 시작됐는지도 몰랐다. 변화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동경하던 선배이자 스승인 최흔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마음을 닫았던 정서도 드디어 한 걸음 내딛고 있었다.


매년 1월의 첫 2주. 이때는 문학관도 문을 닫는다.


1년간 묵은때를 벗겨내고 새로 올 사람과 다시 올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문학관 일을 돕던 정은도 없는데 정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올해는 작가님들 몇 분이나 들어와요?”


세라가 세탁한 이불을 털며 말했다. 겨울이지만 햇살이 좋아 이불을 널기 좋은 날이었다.


“남자 넷, 여자 다섯이요.”


정서가 이불의 다른 쪽 끝을 잡고 말했다. 세라가 매니저도 없이 명예 스탭을 자처하며 찾아와 정서를 돕고 있었다.


정서는 그녀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세라는 새해를 맞아 드라마 촬영도 휴식 기간을 갖는 동안 문학관에 왔다. 겨우 일주일이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문학관에는 오직 정서와 세라. 단둘만 있었다.


낮에는 온갖 세탁과 청소, 정리를 하고 저녁에는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세라가 온 후 6일 내내 정서가 알고 있는 모든 레시피를 동원해 그녀가 먹고 싶은 음식을 내놨다. 낮에 문학관 관리 일이 힘들 텐데도 세라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큰 문학관에 세라 혼자 재우는 게 맘에 걸려 정서도 대충 남자 방 하나를 골라 지내고 있었다. 술도 한잔하다가 종종 설레는 분위기도 연출됐다.


— 그때 그 미역국은 어떻게 했어요? 다 버리셨나?

— 아니요. 제가 다 먹었죠. 아까우니까. 맛있었는데…

— 올해 생일에도 해줘요.


그날 세라는 과음해서 정서의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 편하게 재우려고 그녀를 업고 방으로 갔다. 기분 탓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세라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이래서 힘든 촬영 스케줄은 어떻게 버티나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전혀 다른 생각은 없었는데(정말 없었다)… 세라를 침대에 눕히고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 정서도 깜박 잠이 들었다(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깨어나니 세라가 품에 안겨있었다. 별다른 일(?)은 없었지만 이후 민망해하며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는 자신과 달리 세라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그녀가 정서의 팔을 친다거나 하는 스킨십이 잦아졌다. 원래 이렇게 대담했었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던 정서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여자 방 다 찼네. 그러면 저 지낼 곳 없어요? 앞으로도 쉴 때 여기 오려고 했는데.”


이불을 빨랫줄에 널고 세라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세라 씨 지낼 곳은 항상 있죠.”

정서가 무슨 걱정이냐는 듯 무표정하게 말했다.


“어디요? 여자 방 다섯 개밖에 없잖아요.”


다른 이불을 꺼내려다 말고 세라가 물었다. 남자 방 다섯 개, 여자 방 다섯 개인 건 문학관 블로그에도 공지된 내용이다. 설마 남는 남자 방에서 지내라는 건가 싶어서 눈이 동그래졌다.


정서는 시선은 세라에게 고정한 채 손을 들어 올렸다. 젖은 이불이 팔랑이며 튄 물방울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여기 문학관 말고…… 저기요.”


정서가 문학관 너머를 가리켰다. 정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니 원래 주인이었던 흔이 남기고 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문학관보다는 한참 작지만 나름 2층으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 보이는 크기의 건물. 사람이 살기에 딱 좋아 보이는 아담한 주택.


정서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순간적으로 떠올라 저지른 뻔뻔한 행동에 비해 세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민망해서 얼굴이 벌게진 정서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직접적인 고백보다 이런 게 효과가 좋다고… 유튜브에서 봐서… 미안해요.”


세라는 기가 차서 말했다.


“이 사람이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 아니, 그것도 고백이라고 하는 거예요? 정말 진짜…”


세라가 정서를 타박하며 이불을 집어 던졌다. 행동과는 달리 세라도 싫지는 않은 듯 웃고 있었다. 세라가 던진 이불이 정서의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정서는 멋쩍게 웃으며 이불 한쪽을 다시 건넸다. 첫 고백은 대실패였다. 준비한 고백이 있었는데 왜 갑자기 그랬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이불이 두 사람 손에 들려있었다. 옆에서 바라보면 마치 끈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웃던 세라가 갑자기 말했다.


“전 표현 잘하는 사람이 좋아요.”

“아, 네…”

정서가 답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얼떨떨했다.


“좋아, 싫어,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이 다섯 가지만 잘하면 돼요. 마지막… 거는 나중에 한다 쳐도.”

“네? 네…”

바보 같은 대답만 나오는 입이 한심스러웠다. 세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리고 유튜브 같은 거 보지 마요. 뭐예요? 그 유튜브. 당장 구독 취소해요.”

“아, 저, 구독한 건 아니고…”


“시끄러워요.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세라가 쏘아붙였다.


“뭘요…?”

정서가 또 눈치 없게 말했다. 답답한 세라가 소리쳤다.


“뭐긴 뭐예요! 아, 진짜…”


정서는 잘못 들은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 바보 같은 남자를 좋아해서… 라는 뒷말은 환청이 분명했다. 겨울바람이 한번 불고 지나갔다. 세라가 한 말을 곱씹었다.


좋아, 싫어,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이 다섯 가지만 잘해도 관계는 오래간다. 서로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고, 좋아하는 걸 더 많이 해주려 노력하는 것.

연애의 기본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서가 이불을 당겼다. 세라가 끌려왔다.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마주 다가갔다. 세라가 품에 다시 안겼다.


“제가 더 좋아해요.”


정서는 이번엔 조금 남자답게 말하며 지금 분위기에 맞는 행동을 실천으로 옮겼다. 세라의 입술이 느껴졌다. 순간 어지러워서 하마터면 세라를 놓칠 뻔했다. 그래서 그녀를 다시 꽉 안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정서는 그래도 연애의 기본은 놓치지 않고 시작할 수 있었다. 키스를 나눈 두 사람은 그날. 문학관이 아닌 정서의 집에서 잠들었다.


세라는 짧은 휴식을 보내고 다시 촬영 때문에 서울로 돌아갔다. 자주 볼 수 없는 연애라 해도 상관없었다. 정서는 세라의 직업을 존중했다. 그보다 ‘백세라’라는 사람을 신뢰했다.


정서도 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책방이 아닌 문학관에서 집필을 이어갔다.


책방은 알바생 효민을 아예 월급 사장으로 만들어서 맡겨 버렸다. 효민은 SNS와 블로그를 더욱 활용해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이제는 인플루언서가 된 혜리가 SNS에 책방 홍보를 올리며 도움을 줬다.


도중에는 국내 작가가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효민은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을 줄 알았다. 효민이 노벨상과 연계해 만든 SNS 게시물을 보고 책을 구매하는 사람이 전국으로 늘어났다. 하루에 보내는 택배 작업을 도울 파트 알바까지 따로 고용해야 할 정도였다.


기약 없는 취업을 포기하고 효민은 책방 운영에 몰두했다. 자신이 뭘 잘하는지 깨달았다. 공들여 올린 게시물과 블로그 포스팅에 댓글이 달리고 매출이 늘어나는 걸 보면 기뻤다.


내년에 일산 2호점까지 만들어지면 아예 효민이 책방을 넘겨받을 예정이었다. 정서가 책방에 투자한 원금을 회수할 때까지 수익의 일부를 문학관에 내는 조건이었다.


정서는 책방 일이 해결된 후 “뭘 쓸래?”라는 흔이 남기고 간 질문에 대한 답을 구했다.


이전까지는 쓰고 싶은 글만 썼다. 누가 뭐라 해도, 편집자나 독자들의 의견과 간섭을 철저히 배제한 채. 최흔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는 메시지를 여러 이야기로 전달하려고 했다. 연달아 낸 세 편의 소설이 다 그런 결말이었으니 뻔하다 소릴 들어도 쌀만했다.


이제는 다른 이야기를 써야 할 시점이었다.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연인이 된 세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 지난 1년 동안 세라와 겪은 일을 각색해 만든 이야기였다. 컨셉을 잡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시놉시스까지 만드는 것도 겨우 끝냈는데 문득 고민이 생겼다.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이 좋아할까?

일단 자기가 쓰려는 장르가 로맨스인지 성장물인지부터 헷갈렸다.


겪은 이야기를 각색하는 건 상대적으로 더 쉬운 일인데도 진도가 지지부진했다.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인 흔과 정은은 이제 곁에 없었다.


눈이 펑펑 내려 꼼짝없이 문학관에 갇혀 지내던 어느 날. 정서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몇 시간째 모니터만 노려보고 있었다. 책상에는 맥주 몇 캔이 쓰러져 있었고 밤이라도 샜는지 정서의 두 눈은 퀭했다.


한숨을 한번 내쉰 정서는 이메일을 열어 몇 자 대충 적어 보내고는 쓰러져 잠들었다. 수신자는 윤 피디였다.

— 어떤지 한번 읽어봐. 작년에 세라 씨랑 겪은 이야기.

70% 정도 쓴 건데 이대로 써도 괜찮을까 싶어서.

보고 별로면 무시해. 수고.


이틀 후 윤 피디가 문학관으로 찾아왔다. 이 동네는 왜 제설작업도 안 하냐고 투덜대며 차에서 내린 윤 피디는 다짜고짜 말했다.


“형. 이거 대본으로 쓰자.”

“뭔 소리야. 소설인데 웬 대본?”


윤 피디는 일단 시놉시스를 내놓으라고 닦달했다. 요즘 다음 작품을 물색할 겸 쉬고 있다던 윤 피디의 표정은 진지했다.


대본이라니. 정은이 쓰는 대본을 몇 번 읽어보긴 했어도 대본을 배운 적은 없었다. 지문과 대사로만 구성된 대본은 소설과는 아예 결이 달랐다.


“형은 소설로 마저 써. 내가 대본으로 바꾸는 거 도와줄게.”

“그게 쉽냐! 그리고 아직 초고 완성도 안 됐어. 나중에 퇴고도 해야 하고…”

정서가 망설였다. 윤 피디가 답답하다는 듯 다그쳤다.


“형. 이거 된다. 이거 해야 돼! 내가 연출할게. 나랑 같이하면 된다니까? 딴 감독이 물어가면 가만 안 둬. 진짜.”


그날부터 정서는 윤 피디에게 1년 만에 다시 시달려야 했다. 촬영 용어는 그때그때 배웠다. 무엇보다 소설의 서사를 씬 구분으로 바꾸고 지문과 대사로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직접 대본도 쓰는 윤 피디에게 소설을 대본으로 바꾸는 건 그나마 쉬운 거라고 여러모로 갈굼을 받았다.


윤 피디가 정서의 글을 이곳저곳 고치려 들면서 두 사람은 많이도 싸웠다. 처음엔 간섭과 지적에 예전처럼 학을 떼던 정서도 다른 장르 앞에서는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싸울수록 친해져 가는 두 사람의 간극이 조금씩 좁혀졌다.


정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자기 글을 참견하는 게 적응이 안 됐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정서의 울타리는 점점 두드리고 고치며 넓어지고 있었다. 처음 소설 쓸 때도 빨리 배운 정서는 대본 쓰는 일에도 금방 적응하게 됐다.

“제가 이번에 쓴 대본이에요. 세라 씨 첫 주연 드라마이기도 하고.”


세라의 생일. 약속한 대로 미역국과 함께 정서는 선물이라며 제본된 책 한 권을 건넸다. 세라는 뒷말이 무슨 뜻인가 싶다가 표지 제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의 첫 드라마>

- 작가 : 한정서


“어? 이거… 저 이번에 캐스팅 들어온 윤 피디님 드라마 제목인…데. 이게 왜…”


세라는 영문을 몰라 대본과 정서를 번갈아 봤다. 한정서가 누구지? 하고 생각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토끼 눈이 됐다. 정서는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걸 썼던 거예요? 아니 근데 어떻게? 피디님이 조금 손 볼 게 있다고 해서 저 아직 대본도 못 받았는데!”


세라는 놀란 건지 기쁜 건지 모르는 상태로 얼결에 대본을 살폈다. 정서는 씩 웃으며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깜짝선물은 대성공이었다.


소설이 먼저 완성된 후 출판사에서는 이번에도 출간을 결정했다. 원작 소설 출간과 드라마가 거의 동시에 제작되는 초유의 일이었다. 신이 난 편집장과 출판사 대표에게까지 전화가 걸려 왔다.


윤 피디도 원고를 냉큼 넘겨받고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겨울이 지나기도 전에 윤 피디는 정서에게 3회차 대본을 받아내서 편성을 요청했다. 그는 봄이 된 후에 요청했다면 제작이 더 늦어졌을 거라고 말했다. 그때야 윤 피디가 왜 그렇게 정서를 재촉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드라마 본부장이 윤 피디의 실력을 믿은 건지, 정서의 글이 좋았던 건지는 몰라도 기획안은 무사히 통과됐다.

아직 제작까지는 넘을 산이 많았지만, 정서는 이 일을 세라에게 철저히 비밀로 했다. 여주인공은 당연히 세라를 캐스팅하기로 윤 피디의 확답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정서는 그동안 장원에게 연락해 일을 꾸몄다. 심지어 주희도 만났다. 세라가 최근에 찍은 작품이 끝나면 조금 쉬었다가 이 드라마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주희는 정서의 설명을 듣고 웃었다. 정서와 세라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라니. 그 속엔 자신을 담은 캐릭터도 있었다.


“재미있겠네요.”

정서과 세라가 연애하는 것도 알고 있었던 주희는 생각보다 쉽게 허락했다.


“윤 피디가 아주 조금 도와주긴 했지만 제가 쓴 거 맞아요. 세라 씨 생일에 맞추느라 고생 좀 했어요.”


정서가 세라의 생일선물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세라는 여전히 놀란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드라마를 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정은이 예전에 말해줘서 잘 알고 있었다. 전에 문학관 작가들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이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그동안 쓰고 있는 글을 보여달라고 해도 그렇게 숨기더니 이런 일을 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정서 씨가 쓴 대본이 제 첫 주연 드라마라니…”


최근에 찍은 드라마에 비중이 높은 조연으로 출연했었다. 다행히 시청률이 잘 나와서 다음엔 주연을 맡을 수 있을지 내심 기대하던 차였다.


지난주에 윤 피디의 드라마에 주연으로 캐스팅이 들어왔다고 했을 때는 그저 막연한 기대였다. 아직 확정된 건 없었으니까. 그저 전에 좋게 봐준 감독이 이번에 기회를 한번 주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몇 페이지 뒤 인물 설명 부분의 주연 자리에 자기 이름과 사진이 떡하니 있었다.


— 세리 역 : 백세라.


당황, 벅참, 기쁨, 감동 등 온갖 미묘한 감정이 교차해 몇 번이고 자기 이름을 어루만졌다.


“우리의 첫 드라마예요.”


정서가 말했다. 두 사람의 첫 드라마라는 이중적인 의미. 도중에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다가도 끝내 마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결국 세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너무나 큰 선물이 믿기지 않았다.

세라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정서에게 안겼다.


밤새 두 사람은 대본을 함께 읽었다. 아직 얼굴을 못 본 흔과 그리운 정은. 작년에 인연을 맺은 작가들. 효민. 장원. 주희. 정서가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 실장과 권 작가의 성별을 뒤바꿔 설정한 부분에서 세라는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세라는 권 작가 얘기가 나와도 아무렇지 않았다.


정서와 세라가 함께 아는 사람들이 이름과 설정만 살짝 바뀐 채 모두 대본 속에 있었다.


“좋네요… 신기하다. 내 얘기라니.”


세라가 말했다. 대본을 덮은 세라가 아직 여운이 남은 듯 대본을 만지작거렸다. 세라가 입술을 오므렸다. 정서는 그게 그녀가 장난을 칠 때 나오는 표정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근데 왜 키스신은 없어요? 저 아직 키스신 못 찍어봤는데.”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정서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말했다.


“꿈 깨세요…”


장난에 정색으로 답한 정서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웃으며 다가가 자연스럽게 세라와 입을 맞췄다.


문학관 주변에 또 한 번 여름비가 내리던 날.

두 사람은 다시 함께하게 됐다.



우리의 첫 드라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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