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담 장편소설
차 안에서 정서는 세라가 놀라지 않도록 차분하게 설명했다.
사십 분 전쯤 책방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책방으로 걸려 오는 전화가 으레 그렇듯 효민이 전화를 받았다.
“네. 운정책방입니다.”
“……”
가만히 듣기만 하던 효민이 수화기를 내려놨다.
“작가님……”
효민이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정서를 불렀다.
오후의 시간은 여간해선 효민이 정서를 찾지 않는다. 정서는 마침 지금 쓰는 SF 소설의 자료를 조사 중이었다. 안 그래도 전화를 받은 효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이상하다 싶던 차였다.
장원은 정서를 바꿔 달라는 틈도 없이 효민에게 말을 쏟아내고 끊었다.
장원의 말을 전부 기억하지 못한 효민이 잠깐 버벅댔다. 아주 가끔, 책방에선 보기 드문 진상 손님에게도 능수능란하게 대응하던 효민이 당황하고 있었다.
“근데… 장원 오빠가 어디 다친 것처럼 끙끙대고 있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정서가 효민을 진정시키고 자동 녹음된 음성을 틀었다.
— 효민아. 나… 장원인데. 정서 형한테 나 좀… 데리러 와달라고 해줘. 지금 쫓기고 있어… 예전에 일산에서 캐치볼 하면서… 기다리던 야구장 있거든? 세라가 알 거야. 거기로… 가 있을게. 아, 저 새끼들… 미안. 시간 없다. 끊을게.
효민이 입을 가리고 놀란 토끼 눈으로 정서를 쳐다봤다.
세라에게 털어놨듯 정서는 이런 때일수록 냉철했다. 전화기 스피커로 들리는 장원의 떨리는 목소리에 뜨거워졌던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전화기에 찍힌 번호를 확인했다. 장원의 번호가 아니었다.
장원의 휴대폰은 이미 해지되고 없는 번호로 나왔다. 찍힌 번호로 다시 연락해 보니 웬 남자가 받았다.
“여보세요?”
“아, 네. 실례지만 방금 전화 거신 분 좀 부탁드립니다.”
“네? 아니… 이게 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십 대로 느껴지는 목소리의 남자도 적잖이 당황한 듯 버벅댔다. 그는 방금 전화를 한 사람이 끊자마자 쫓기듯 뛰어갔다고 했다. 정서는 양해를 구하고 하나씩 침착하게 물었다.
“다른 사람 전화로 걸었더라고요. 누구한테 쫓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장원이가 자주 간다던 야구장 어딘지 기억해요?”
세라에게는 장원의 목소리가 다친 사람처럼 끙끙댔던 건 말하지 않았다. 전화의 주인이 설명해 준 장원의 얼굴이 피와 멍투성이인 채로 비틀댔다는 것도.
“촬영 대기 길어지면 저도 몇 번 갔었어요. 근데 저는 뒷좌석에만 타서 가는 길은 잘… 아, 오빠 히어로즈였어요!”
정서가 곧바로 네비게이션을 검색하고 히어로즈 2군 야구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사실 정서는 그동안 세라 몰래 장원과 연락을 해왔었다. 테라스에서 단둘이 술을 마신 날 이후 정서는 세라에 대한 감정에 확신을 갖게 됐다. 요 며칠 정서는 그녀가 서 대표 일로 근심이 깊어지는 걸 보고 속이 상했다. 문학관에 온 후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밝아지는 모습이 좋았는데 안타까움이 컸다. 그녀의 근심을 덜어주고 싶었다.
사람이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좋아하게 되면 안 하던 짓을 하게 된다. 세상 남 일에 관심이 없던 정서가 먼저 장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원아. 형이야.”
일주일 전 정서의 전화를 받았을 때 장원도 놀랐다. 문학관과 책방에 종종 찾아가고 밥과 술을 같이 먹은 적도 몇 번인데 정서는 아직도 그를 대하는 데 불편함이 느껴졌다. 자기 울타리 밖의 사람을 안으로 들이는 게 한없이 어려운 사람이라는 게 보였다. 야구할 때도 이런 후배가 한 놈 있었다.
그래도 야구는 곧잘 해서 지금도 히어로즈에서 주전 외야수로 뛰고 있는 후배였다. 가끔 승리한 경기에서 수훈 선수로 인터뷰할 때도 매번 단답형으로만 답해서 리포터들을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팬들은 운동만 아는 선수가 미녀 리포터 옆에서 부끄러워한다고 오해하며 귀엽게 봤다. 그를 잘 아는 다른 선수들은 그럴 때마다 킥킥대며 놀리고 장난 치기 바빴다.
정서는 그 후배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MBTI에 ‘IIII’가 있다면 딱 한정서 이 사람이었다. 그와 세 마디 이상 나눠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전화해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세라를 좋아하게 됐다느니 그런 말은 없었지만 장원은 정서가 세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뭐 하나 작은 일이라도 돕고 싶다는 정서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세라까지 굳이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장원도 정서에게는 상황을 알려줬다.
서 대표의 횡령 기사를 악의적인 모함으로 믿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사실이라 자신도 너무 당황스럽다고.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서 대표는 아무 말도 없었다고. 뭔가 이상한 게 있긴 한데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든 직원이 패닉 상태라고 말했다.
세라에겐 절대 말하지 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장원과의 통화를 끊고 정서는 집필도 접고 기사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알바생 효민도 도왔다. 아무래도 이런 쪽은 효민의 촉이 더 좋았다.
연예계 쪽 언론이 으레 그렇듯 기사 대부분은 악의적이고 일방적이었다. 몇 달 전 스캔들 사건 때와 비슷한 느낌도 들었다. 기자들은 벌써 서 대표에 대한 범죄 사실을 특정하고 기소 후에 판결까지 내리고 있었다. 세라와 장원을 통해 서 대표에 대해 듣지 못했다면 자신도 그녀를 나쁜 사람으로 믿을 법했다.
일단 장원이 횡령 자체는 사실로 드러났다고 했으니 횡령 과정을 다룬 기사는 넘겼다.
며칠을 살펴봐도 딱히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장원도 연락이 뜸해졌다. 일을 해결하느라 바쁜 건지 손을 놓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돕겠다고 나서긴 했는데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최흔과 세라가 당한 일을 곁에서 지켜보며 들었던 무력감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정치질로 더 나쁜 짓을 해대는 높은 사람들에겐 무관심하면서 연예계 쪽 일이라면 만만하게 돌을 던지고 보는 대중들에게도 화가 났다.
기삿거리라면 앞뒤 재지 않고 특종이라며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기자와 언론들이 혐오스러웠다. 뒤에 숨어서‘알 권리’라는 규범의 빈틈을 교묘히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는 이들이 더러웠다.
조금 더 믿어 주지…
조금만 더 지켜봐 주지…
어느새 정서의 마음속에 이번에도 누군가를, 세라를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의심이 무의식적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음? 또 이슈팩트네?”
효민이 중얼거렸다. 지난번 장원의 전화를 받은 이후 그녀도 정서를 도와 기사에서 뭔가 찾을 수 있을지 살피고 있었다. 정서보다는 이젠 옆집 언니처럼 친해진 세라를 돕는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연예인 지인이 생겼다는 기쁨이 컸다.
일반인 중에 여배우와 언니, 동생 하며 지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이 백세라라는 여배우는 너무나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연예인들은 카메라 밖에선 다 싸가지없고 거만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물론 아직 스타급 반열에 든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런 건 상관없었다.
세라와의 수다는 이 조용하고 따분한 책방에 생기를 가져다줬다. 그 예쁜 얼굴을 보고 있자면 같은 여자라도 반할 것 같았다. 저 바보 멍청하고 속이 다 보이는 한 작가가 좋아할 만했다. 나이는 거의 열 살 차이인데 가끔은 세라가 오히려 동생처럼 느껴질 정도로 챙겨주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과 달리 그녀만의 순하고 다정한 매력이 예쁘게 돋아나고 있었다. 이제는 세라가 연예인이든 아니든 그저 친한 언니로 생각해서 도우려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세라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하는 일에 재미도 있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경찰도 못 찾는 범인을 잡는 일반인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효민은 웹상에서 무분별하게 돌아다니는 기사 중에 쓸만한 알맹이만 쏙 골라내는 재주가 있었다. 학생 때 여느 또래들처럼 아이돌 덕질도 만만찮게 했던 덕이었다. 다른 언론사의 기사를 베껴 양산된 기사, 자극적인 썸네일로 어그로를 끌며 조회수를 늘리려는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 같은 건 몇 초만 훑어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언론이라도 기사 내용은 거의 비슷비슷했는데 매일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고 있었다. 소속 배우들에게 원래 정산금의 일부를 떼고 줬다느니, 마케팅비 명목으로 상납금을 낸 배우들만 좋은 배역을 줬다느니, 이런 행위가 2년 넘게 이뤄졌다느니 같은 내용들이었다.
요즘 매일 기사를 읽어보며 같은 일을 하다 보니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효민은 지금 인터넷 창을 여러 개 띄워놓고 PEARL 엔터테인먼트와 서주희 대표에 관한 기사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검색 옵션을 조작해 새로운 기사들만 간추렸다.
그녀의 눈에 한 언론사가 눈에 들어왔다. 연예계 전문 인터넷 언론사인 ‘이슈팩트’였다.
효민은 검색하기 전에 검색 옵션의 여러 조건 중 기간을 ‘1일’로, 나열 방법을 ‘오래된 순’으로 선택했었다. ‘최신순’이었다면 오늘 날짜의 가장 첫 기사는 가장 밑으로 내려간다. 검색창 최상단에는 이슈팩트의 기사가 보였다.
즉, 오늘 나온 기사 중 이슈팩트의 기사가 가장 처음 나왔다는 뜻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제도, 그제도 이슈팩트 기사를 항상 상위권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효민은 다시 검색 옵션을 조작해 날짜를 바꾸고 다시 검색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기사가 터진 날부터 지금까지 이슈팩트 기사가 항상 맨 위에 자리했다.
같은 이슈팩트 기사 중에서도 다른 기자들이 쓴 PEARL 엔터 내용을 다룬 기사가 몇몇 있었다.
그런데 항상 첫 번째 기사를 쓴 기자는 안태인 기자였다.
특정 언론사의 특정 기자가 매일 같이 새로운 내용을 가장 처음 내보낸다?
단순히 촉이 좋거나 정보를 입수할 좋은 루트를 가진 기자일 수도 있었지만, 효민은 뭔가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종업계 관계자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관심갖고 찾아보지 않는 이상 일반인들은 알기 힘든 일이었다.
효민은 이번엔 한동안 다른 내용을 찾아보더니 확신이 생긴 듯 정서를 불렀다.
“작가님. 이거 잠깐 보실래요?”
효민은 최근 일주일 동안 날짜별로 같은 조건으로 검색한 결과가 나온 창을 띄우고 정서를 불렀다. 그리고 정서에게 자기가 찾은 것을 하나씩 설명했다.
이슈팩트의 안태인 기자가 쓴 기사를 제외하면 같은 날짜의 다른 기사들은 특별할 게 없었다. 특히 지방 언론이나 작은 언론사 기사들의 대부분은 안태인의 기사를 그대로 복사해서 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세라 언니네 회사 사건이 겉보기엔 모든 언론에서 엄청 화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요 안태인 기자부터 시작된 거죠. 나머지는 볼 것도 없어요. 안태인 기사 짜깁기 하거나 자기 추측만 조금 더 붙인 것 뿐이에요. 기삿거리는 찾았는데 정보가 없을 때 이렇게 기사들이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나오는 거죠.”
“뭐 하러 이러는 거야? 자기가 알아낸 것도 아니고 확실한 것도 아닌데.”
정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론사들도 돈 벌어야죠. 요즘 인터넷 기사는 클릭 수만큼 광고비로 돈 벌어요. 제목으로 어그로 끈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제대로 된 특종 잡은 기자들이 제목 앞에 ‘단독’이라고 강조하는 거고요. 그들 세계에선 대단한 거죠.”
정서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에 담쌓고 살았어도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퇴근하고 종종 들리는 근처 초등학교 교사였다. 손님은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효민의 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정서를 보고 멈칫했다. 이 손님은 정서가 이 시간에 모습을 보인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문에 달린 벨소리를 들은 효민이 얼른 손님을 맞았다. 손님은 모니터에 가려있던 효민의 얼굴이 보이자, 그때야 안심하고 들어섰다.
효민이 손님을 응대하는 동안 정서는 한 번 더 효민이 찾은 것들을 살폈다.
이슈팩트의 안태인 기자가 서 대표의 횡령을 알아내고 매일 같이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며 기사를 냈다.
횡령을 알아낸 게 그의 능력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거나 정보를 제공받은 건지는 몰랐다. 어쨌든 안태인에게서 기사가 시작됐고 연예계 전체로 확산되고 있었다.
효민이 알아낸 내용은 추측이긴 해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다만 지금 찾아낸 게 지금 장원과 서 대표에게 도움이 되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정서가 생각에 잠긴 동안 효민이 손님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녀는 손님이 문을 나서자마자 높아진 톤으로 말하며 마우스를 조작해 다른 창을 클릭했다.
“그리고 제가 또 뭘 찾았는지 아세요?”
효민이 띄운 창에는 정서도 본 적 있는 익숙한 기사가 나타났다.
몇 달 전 세라가 이곳에 온 계기가 된 그녀의 스캔들 기사였다. 효민은 스크롤을 내려 기사 맨 밑의 기사 작성자를 보여줬다. 거기도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세라 언니 스캔들 기사도 안태인 이 사람이 처음 낸 거예요.”
입술을 뜯고 있던 정서의 손이 멈췄다. 정서의 반응을 본 효민이 신난 듯 속사포처럼 말했다.
화면에는 안태인의 기자 정보창이 나타나 있었다.
“안태인 이 사람은 다른 배우들, 다른 기획사도 많은데 여기 기사만 냈어요. 여기 밑에 보이죠? 제가 봤는데 그전에 쓴 다른 기사들은 죄다 복사, 붙이기 해서 올린 쓰레기 기사들이에요. 그런데 올해 PEARL 엔터테인먼트랑 관련된 기사들은 갑자기 자기가 단독처럼 기사를 쓰기 시작해요.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나? 아무튼! 기레기였던 사람이 갑자기 특종을 연달아 두 개를 따낸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효민이 씩 웃으며 정서를 돌아봤다. 정서도 이번엔 표정이 밝아졌다.
정서는 효민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장원의 번호를 눌렀다.
“이슈팩트야 알지만, 안태인… 전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제가 아직 기자들이랑 많이 접할 일이 없기도 했고. 대표님이랑 리나가 굳이 기자들이랑 친해질 필요 없다고 했었거든요.”
세라는 덤덤하게 말했다. 창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정서는 일산으로 가는 길에 그동안 알아낸 사실을 들려줬다. 세라는 그가 장원과 따로 연락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그렇게 친해졌었나…?’
정서가 컴퓨터 앞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 건 책방에 있는 시간밖에 없었다. 아마 자기 루틴도 버려두고 집필도 미뤄둔 채 기사를 뒤졌을 게 눈에 그려졌다. 정서가 내색은 안 했지만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같이 고생해 준 효민에게도 고마웠다.
감사를 표할 겨를도 없이 정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운전 중이라 시선은 앞에 두고 있었는데 표정은 한없이 차분해 보이고 진지했다. 마치 그가 글을 쓰는 동안 집중하는 것처럼.
어두워져서 잘 보이진 않아도 세라는 그의 옆모습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다.
“장원이도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더라고요. 그 회계팀 김동현이라는 직원 알죠?”
“친하진 않지만 인사는 몇 번 했었죠. 장원 오빠는 신입 때부터 친한 사이랬는데… 정서 씨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세라가 놀라 물었다.
“제가 안태인 기자 얘기를 들려주고 나서 장원이가 알려줬어요. 아마 세라 씨한텐 얘기 안 했을 텐데 내부자가 그 직원이었던 모양이에요.”
세라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젠 놀랄 것도 없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자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서와 효민이 인터넷을 뒤지고 있을 때 장원은 김동현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퇴사하겠다는 마지막 연락 이후 동현과 연락한 적이 없었다. 전화를 걸었는데 꺼져 있었다. 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몇 주 전 갖고 싶어 하던 수입차를 샀다며 자랑했었는데 주차장에 차도 보이지 않았다. 동현이 자주 가는 클럽과 술집을 뒤져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장원은 동현에게 화도 나고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걱정됐다. 서 대표 일로 회사가 어수선해져서 짜증이 났는데 알고 보니 아끼던 동생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심란한 마음이었다.
장원은 답답한 마음에 회사를 나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운동할 때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처음 해보는 낮술이었다. 입맛도 없어서 국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소주는 한 병을 금세 비웠다.
술기운이 오르면서 동현과의 추억이 생각났다.
신입 매니저 시절 법인카드 영수증과 온갖 지출 서류들의 처리를 부탁하며 동현과 안면을 텄다. 한 살 터울의 둘은 금방 친해졌다. 리나의 스케줄이 끝나고 늦은 시간에 회사에 복귀하면 녀석도 줄곧 야근하고 있었다.
자신이야 선수 생활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덕에 이 정도 고생이야 별거 아니었는데 동현은 벅차 보였다. 한 살 차이긴 해도 그런 녀석이 안쓰러워 억지로 데리고 나와 술을 사 먹이곤 했었다. 막내끼리의 설움이었을까. 어느덧 동지 의식이 생긴 둘은 직무가 다름에도 늘어가는 주량과 함께 꽤 끈끈한 사내 우정을 자랑했다.
운동이 부족한 동현을 꼬드겨 가끔 사회인 야구도 데려갔다. 처음엔 질색하던 녀석도 점점 야구에 빠지는 걸 보며 흐뭇함을 느끼기도 했다. 어쨌든 사회에서 만난 사람치고는 드물게 속마음까지 터놓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
동현은 어제 날짜로 해고됐다. 사유는 내부정보 유출. 당분간 집에 머무르기로 한 서 대표를 대신해 남 실장이 지시한 일이었다.
만약 동현이 퇴사하고 싶다고 했을 때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줬다면 어땠을까.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게 자신의 탓인 것 같아 자책감이 들었다. 도대체 동현이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맨날 일이 많다며 투덜대기는 해도 잘 다니고 있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이라도 만나서 이유를 묻고 싶었다.
장원은 습관처럼 동현의 번호를 눌렀다. 전화를 꽤 많이 건 듯 화면에는 발신 이력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통화음이 길게 이어진 끝에 낯선 여자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렸다. 동현은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멍하니 액정 화면을 바라보던 장원이 핸드폰을 테이블에 세게 내리쳤다. 갑자기 들린 쿵 소리에 다른 손님들이 흘긋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진상 손님으로 몰려 가게에서 쫓겨날까? 테이블이라도 엎으면 경찰을 부를까? 실없는 생각이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시끄럽게 떠드는 아저씨들이 거슬렸다. 그들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까 한 사람은 장원을 보며 ‘뭐여 젊은 놈이…’라고 내뱉은 게 어렴풋이 들렸다. 기분도 더러운데 지금이라도 가서 조용히 하라고 시비를 걸고 싶었다.
어떻게 시비를 걸까 한창 생각하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혹시 동현은 아닐까 황급히 폰을 집었는데 발신자는 정서였다.
지난번에 정서가 뭐라도 돕겠다고 했을 때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연예계에 딱히 연도 없는 그가 어떻게 돕겠는가. 그냥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 감사하다고 말했었다. 정서가 세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세라도 마음이 없진 않은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베스트셀러 작가라고는 해도 거의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정서가 세라와 잘 되긴 힘들었다. 서 대표가 키우기로 작정한 세라는 분명 몇 년 후면 리나만큼 스타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정서는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둘 사이의 격차는 점점 커질 것이었다.
아쉬워도 정서의 마음은 세라가 문학관에 있는 동안까지만이었다. 사적인 친분을 넘어 장원은 세라의 매니저였다. 누군가 이기적이라 욕하더라도 장원은 매니저로서 크든 작든 정서의 도움을 이용하고 있었다. 세라가 문학관에서 지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정서의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 술도 마시고 옆자리 아저씨들 때문에 기분도 좋지 않았다. 그가 무엇 때문에 전화했는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서 대표와 이사들을 포함해 회사 직원들도 해결 못 하는 일을 그가 도울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없었다.
진동이 다섯 번쯤 울렸을 때 문득 전화를 받았다. 세라 안부도 묻고 술 마신 김에 여차하면 지금 파주로 가서 그와 술을 마시면 되겠다 싶었다.
“네, 형.”
— 응. 장원아. 별일 없어?
전화 너머로 들리는 정서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그냥 안부 차 전화한 것 같았다.
“뭐, 특별한 건 없어요. 세라는 잘 지내죠?”
— 응. 나 말고도 문학관 식구들이 다 잘 챙기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다행이네요. 항상 감사드려요.”
— 별말씀을. 아 장원아. 너 혹시 안태인 기자라고 들어봤니?
“…….”
— 아는 모양이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전에 연예계에 관심도 없는 정서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아는지 궁금했다.
“형이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아요?”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안태인 기자는 장원의 기억에 남 실장이 다니는 골프 모임의 주요 멤버였다. 모임의 멤버는 남 실장 같은 기획사 간부와 작가, 감독, 기자에 연예인도 몇 있었다. 남 실장이 전에 그런 인맥을 자랑하며 장원에게도 골프 칠 것을 권유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도 회사 상사가 자꾸 권유하니 마지못해 한번 나갔다가 다시는 나가지 않았다. 장원의 골프 실력은 그렇다 쳐도 자기 분야에서 잘나간다는 사람들의 본성을 목격했다. 그들은 돈 얘기, 여자 얘기가 전부였다. 어떤 작가가 쓰는 드라마에 남 실장이 장예지 같은 배우들을 소개해 줬고 어떤 감독은 제작사 임원과 투자자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를 떨었다.
안태인 같은 기자들은 골프가 끝나면 그들에게 접대받고 좋은 기사를 써주는 것 같았다. 반대로 특종 거리가 생기면 기자들이 법인카드를 썼다. 그런 접대 술자리가 생길 때마다 신인으로 보이는 여배우들이 따라갔다.
조금 더 고상한 대화가 오갈 줄 알았던 자리에서 그들의 속물근성에 구역질이 났다. 성공한 사람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만난 건지 참 자기 같은 사람들만 모인 자리에 남 실장이 잘도 찾아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태인 기자는 남 실장 사무실에 심심하면 놀러 오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기삿거리를 직접 찾는 진짜 기자가 아니라 떡고물 받듯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하이에나에 불과했다. 그는 광고비를 달라고 대놓고 요구했다. 만약에 주지 않으면 회사에 부정적인 기사를 내는 걸로 복수했다. 기자만 아니었다면 서 대표가 진즉에 출입금지령을 내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정서의 설명은 길게 이어졌다. 그의 추측에 같은 의견이었다. 장원은 아직 심증에 불과한 이 일을 물증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직 불확실하지만 어쩌면 단서가 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은 걸지도 몰랐다. 시간이 없었다.
정서의 설명이 끝날 때쯤 장원은 술값을 계산했다. 핸드폰 진동이 여러 번 울리는 걸 보니 정서가 말한 화면들을 효민이 캡처해 메시지로 보낸 것 같았다.
식당을 나오는 장원의 표정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확고한 의지로 가득했다.
야구하던 시절의 촉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안태인과 남 실장 그리고 다른 한 명이 장원의 용의선상에 올랐다. 정신없는 상황에 미처 놓쳤던 부분들이 퍼즐 맞추듯 장원의 머릿속에서 짜맞춰졌다.
장원은 아까 걸었던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며 발걸음을 옮겼다.
동현의 집 방향 쪽이었다.
장원은 안태인의 이름을 들은 후부터 귀로는 듣고 머리로는 계속 생각 중이었다. 문득 동현이 지난번에 수입차를 끌고 출근한 날이 생각났다. 서 대표의 사건이 터지기 전에 한창 바빴을 때라 그땐 그러려니 하고 잊고 있었다. 그러다 머리가 차분해지고 가만 생각해 보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장원은 친한 만큼 동현의 사정도 다 알고 있었다. 동현은 코인 붐이 일었을 때 모은 돈과 영끌해서 받은 대출까지 더해 1억 넘게 코인에 넣었다. 결과는 대다수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2년 동안 마이너스 육십 프로가 났다. 술자리에서도 매번 코인 얘기를 꺼내며 신세를 한탄했던 녀석이었다. 장원도 동현을 따라서 재미 삼아 오십 만원을 넣었다가 본전을 겨우 찾고 발을 뺀 적이 있었다. 적금 말고는 금융에 아는 게 없어서 그나마 조금만 넣은 게 다행이었다. 동현도 말리고 싶었는데 이미 늦은 상태였다. 몇 번 수백만 원의 수익을 본 후로 녀석은 눈이 돌아갔다.
코인 시장을 확인했다. 동현이 갑자기 수입차를 살 만한 상승장이 아니었다. 애초에 코인이 그 정도로 떡상했으면 장원에게 자랑부터 했을 녀석이었다.
장원은 동현의 오피스텔에 찾아갔다. 주차장부터 확인했다. 동현이 끌고 왔던 같은 종류의 차가 있었다! 혹시나 해서 앞 유리의 연락처를 확인했다. 동현의 번호였다. 몇 번을 왔어도 보이지 않다가 마침 날을 잡은 것 같았다. 녀석이 그렇게 자랑했던 수입차가 햇빛을 받아 삼각별을 반짝였다.
장원은 이 브랜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릴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삼각별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과시하는 느낌이었다. 진짜 차를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들은 다른 브랜드를 타는 걸 서 대표와 서 대표의 지인들을 통해 많이 봤다.
차를 확인한 장원은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 비밀번호까지 알 정도로 동현의 집에도 자주 놀러 왔었다. 녀석은 회사와 가깝다는 핑계로 이곳을 골랐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실 이 오피스텔은 동현의 연봉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월세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겉치레 좋아하는 녀석은 굳이 이곳에 살았다. 그게 동현의 성향이었기에 말려봤자 소용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을 눌렀다. 더 높은 층을 못 가서 아쉽다던 동현의 말이 떠올랐다. 비싼 오피스텔답게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12층에 도착했다. 장원은 익숙한 동현의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에 귀를 살짝 갖다 대자 미약하게 TV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집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동현에게 할 말은 오는 길에 이미 생각해 뒀다. 장원은 망설이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동현아. 형이다.”
마침 이웃집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몇 번 본적이 있는 분이라 가볍게 인사했다. 아주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장원을 지나쳐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다시 문에 귀를 대보니 TV 소리가 줄어들어 있었다.
장원은 다시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동현아. 형이라고.”
인기척이 살짝 들린 것 같았는데 방음이 좋은 집이라 긴가민가했다. 장원은 동현이 안에 있으면서 없는 척하는 거라고 믿었다.
이번엔 노크가 아니라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조용한 복도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임마. 너 안에 있잖아. 잠깐 얘기 좀 하자. 나와봐.”
“형, 미안해. 나 할말 없어. 그냥 가줘.”
드디어 문 건너에서 동현의 대답이 들렸다. 일단 말이라도 하게 만든 게 수확이었다. 장원은 조금 더 밀어붙였다.
“야, 너 왜 그래. 형 전화도 안 받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문 좀 열어봐.”
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좀 더 실랑이를 벌였다. 동현은 다른 집 사람들이 나올까 봐 걱정됐는지 얼른 장원을 돌려보내려 하고 있었다.
“형이 왜 왔는지 대충 알 것 같은데 나 진짜 할말 없으니까 오늘은 그냥 가. 다음에 내가 연락할게. 미안. 나 들어간다? 괜히 밖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가.”
정이라도 떼려는 건지 동현이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어서 동현이 집 안쪽으로 들어가는 소리도 들렸다. 장원에게 들리게 하려고 일부러 슬리퍼를 크게 끄는 게 분명했다. 곧 문 너머에선 TV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쯤 되니 장원은 동현에게 뭔가 있음을 확신했다. 고민거리가 생기면 작은 일이라도 먼저 말을 꺼내던 녀석이 자신을 피하려는 것부터 이상했다.
장원은 승부수를 던졌다. 증거는 없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동현아. 너 차 무슨 돈으로 산 건지 다 알고 왔어. 너까지 큰일 나기 전에 문 열고 형이랑 얘기 좀 하자.”
TV 소리가 다시 끊겼다. 장원은 틈을 오래 주지 않고 조금 더 압박했다.
“야! 너 남 실장 그렇게 똑똑한 인간 아닌 거 알잖아! 그 계좌 누가 썼는지 내가 다 찾았어. 지금 안 나오면 너 어떻게 되든 말든 형 그냥 경찰서 간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동현은 침묵을 유지했다. 이 정도면 반응이 있을 것 같았는데 아직 조용했다. 동현의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다시 문을 두드릴지 조금 더 기다릴지 고민하던 순간 문이 열렸다.
고개를 내민 동현의 안색은 창백해 보였다.
장원은 거실 테이블에서 동현과 마주 보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였다. 동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꿰뚫어 보듯 바라보는 장원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장원은 천천히 동현을 추궁했다.
“남 실장한테 돈 얼마나 받은 거야?”
동현은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빨리 말 안 할래!”
장원은 테이블을 치면서 언성을 높였다. 동현은 탁 내려치는 소리에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부모님께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1억……”
“겨우?”
장원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돈을 받았을 거라 짐작했지만 너무 작은 금액이었다. 서 대표가 직원들 연봉을 적게 주는 것도 아니었다. 연예 기획사 회계의 특수성 때문에 서 대표는 특히 회계 쪽 직원들을 많이 신경썼다. 1억이면 동현의 연봉으로 성과금까지 합쳐 1년 반 정도면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일 다 끝나면 1억 더 주기로 했어…”
“그래도 그렇지. 겨우 2억 갖고 대표님이랑 회사에 배신을 때리냐? 네가 정신이 있는 놈이야?”
많이 봐줘서 2억이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그중에 거의 반을 차 사는 데 쓰다니. 친한 동생이었지만 그 철없음에 동현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직 삼십 대고 회계 전공이면 어느 회사든 갈 수 있겠다 싶으니 당장 눈앞의 이익에 혹한 게 분명했다. 장원이 아는 동현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횡령… 남 실장이 한 거지? 안태인 기자 동원해서 일 키운 거고.”
안태인의 이름까지 나오자 동현이 놀라는 티가 역력했다. 동현의 반응에 장원은 한숨을 쉬었다. 짐작이 맞았다.
“형이랑 지금 경찰서 갈래? 아니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형한테 다 말할래?”
장원은 핸드폰을 꺼내 112 번호를 누르는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크게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다 들켰다고 생각하는 동현에겐 효과가 좋을 것 같았다.
동현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장원은 다독이는 말투로 설득했다.
“지금 말하면 대표님한테 잘 말해서 너한테 피해 안 가게 해달라고 부탁드릴게. 그, 뭐냐… 처벌 불원서인가 뭔가 같은 것도 있잖아. 네 잘못도 있지만 마음이 바뀌어서 대표님 누명 벗을 수 있게 돕는 거니까. 형이 얘기하면 들어주실 거야. 자료까지 내놓으면 확실하지.”
천천히 고개를 들은 동현은 그때야 겨우 장원을 쳐다보고 말했다.
“말할게……”
동현이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할 때 장원은 핸드폰 녹음을 켜는 걸 잊지 않았다.
“그 동현이란 동생도 그렇게 영리한 친구는 아니었나 봐요. 장원이가 남 실장이랑 안태인 기자 이름 대고 공범이네 뭐네 하고 압박하니까 전부 실토했대요. 돈을 받았으면 차라리 잠수라도 타던가.”
동현은 자백을 다 한 후 노트북을 꺼내 자료까지 건네줬다. 야근이 잦았던 동현은 가끔 집에서도 일하기 위해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했다. 동현이 자금 입출금 내역을 다운받고 장원에게 하나씩 설명해 줬다. 돈이 흘러 나간 곳은 서 대표의 계좌가 맞았다.
운동만 했던 장원이 법적인 일은 잘 몰라도 남 실장이 꾸민 짓이라는 동현의 증언이 있으면 충분한 증거가 될 것 같았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돈을 빼냈지만 빈틈은 충분히 있었다.
장원은 동현에게 당분간 친구 집에 가 있으라고 말한 뒤 동현의 집을 나왔다.
오피스텔을 빠져나와 서 대표에게 전화해 사실을 알리려는데 순간 걸음이 멈췄다. 남 실장이 왜 이런 일을 벌인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서 대표의 남편이었다. 장원은 서 대표의 곁에서 일을 도우면서 어느새 그녀를 존경하게 됐다. 훌륭한 대표이기 전에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남편이 몰래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걸 알게 되면 아무리 강인한 서 대표라도 충격이 클 것 같았다. 그녀가 상심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장원은 오피스텔 근처 공원에 앉아 한동안 고민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어쨌든 일의 전모는 서 대표가 알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만 제삼자에 의해 밝혀지기보단 본인 입으로 자백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 대표를 위한 장원의 배려였다. 장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회사로 향했다.
남 실장에게 뭐라고 말할지 생각할 겸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를 일부러 걸어갔다. 이십여 분 거리가 짧게도 느껴졌다.
회사에 도착한 장원은 실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모든 사실을 알았다며 남 실장에게 따졌다. 남 실장에게 자료를 보여주며 스스로 서 대표와 언론에 자백하지 않으면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이후 당황한 남 실장을 뒤로하고 실장실을 나왔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장원과 정서가 어젯밤에 통화한 내용이었다. 장원은 집으로 돌아가 자료를 정리하고 남 실장의 행보를 지켜보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런 장원의 폰이 오전에 해지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장원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하던 차에 아까 책방으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세라는 말없이 핸드폰만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세라 씨는 왜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상황을 설명하고 한동안 운전만 하던 정서가 말했다. 세라가 너무 심각해 보여서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그녀가 대답해 줄지는 모르나 전부터 궁금한 것이기도 했다.
“부모님이 원래 연극 배우셨어요.”
세라는 의외로 담담히 말했다. 정서가 자신을 배려해 말을 돌린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랬구나. 부모님 영향을 받으신 거네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저 태어났을 땐 두 분이 모두 다른 일 하고 계셨거든요.”
정서는 말없이 세라를 살짝 쳐다봤다.
“부모님이 속도위반하셔서… 그땐 연극 배우가 돈이 안 됐으니까요. 엄마가 저 가진 걸 알고 다른 일 찾으려고 아빠 고향 부산에 같이 내려가셨대요. 아빤 공사장이고 뭐고 일 가리지 않고 돈 벌러 다니셨어요. 지금은 택시하고 계시고. 엄마는 저 낳으신 후에 공부하셔서 간호사가 되셨고요.”
“아, 그러셨구나…”
세라는 부모님 얘기에 조금 민망한 듯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정서도 멋쩍게 웃었다.
“여유롭진 않아도 화목한 가정이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금실 좋으시고. 부모님이 당신들 꿈을 저한테 대신 강요하신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열두 살 때쯤이었나… 앨범을 보다가 부모님이 전에 연극 하셨을 때 사진을 봤는데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부터?”
“네. 힘든 거 아니까 아빠가 말리긴 했는데 제가 그땐 고집이 셌어서… 애가 밥도 안 먹고 버티니까 결국 중학교 때부터 연기 학원 보내주시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세라 씨 어렸을 때 모습 궁금하네요.”
장원의 일로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세라도 아까보다는 살짝 밝아진 내색이었다.
“정서 씨는 책방은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이번엔 세라가 물었다.
“처음엔 문학관 일 말고 다른 일도 해볼 생각이었어요. 정은 누나가 제발 밖에 좀 나가라고 떠밀기도 했고요. 그때는 문학관 안에만 처박혀 있었거든요.”
그때는 정서도 뭔가 다른 자극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소설 쓴다는 놈이 많은 걸 겪어봐야지 세상과 담을 쌓으면 어떻게 하냐는 정은의 압박도 도움이 됐다.
작가는 다른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한데 매번 책 사는데도 돈이 꽤 들었다. 그래서 그냥 책값을 아끼려 책방을 차려 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꽤 단순한 이유에 세라는 어이없어 웃었다.
“다른 이유도 있어요. 책방 근처에 고등학교가 두 군데 있거든요. 애들이 너무 입시에만 매달리지 말고 책도 좀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 동네에 차린 거예요. 요즘 사람들 책 참 안 읽잖아요.”
“어쩐지… 책방에 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싶었는데.”
이번엔 조금 깊은 뜻이 담긴 생각에 세라가 미소 지었다. 그는 평소엔 진중하다가도 가끔 아까처럼 단순해서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운전 중에 보이는 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의 조명이 종종 비치며 정서의 부드러운 턱선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정서는 나름대로 괜찮은 외모였다. 장원이 강인한 남성의 표본이라면 정서는 그 반대였다. 평범함 때문에 강남 한복판에서 지나쳐도 기억에 안 남을 것 같지만 그를 알게 되면 보이는 매력이 있었다.
문득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든 게 민망해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서 망정이지 분명 발개졌을 얼굴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오백 미터 전방에 목적지입니다.
마침 내비게이션 음성이 들렸다. 어느새 멀리서 야구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서 씨. 여기… 아닌 것 같아요.”
히어로즈 2군 야구장이 아니었다. 근처에 내려 주위를 둘러봤는데 어색함이 느껴졌다. 장원이 종종 데려온 야구장은 이렇게 규모가 크지 않았었다. 어쩐지 근처까지 오는 길이 낯선 느낌이었다.
정서는 당황하지 않고 지도 앱을 켜고 야구장을 검색했다. 일산 근처에 있는 야구 연습장 수십 개가 떴다. 실내 스크린 야구장을 제외하는 데만 시간이 꽤 걸렸다. 세라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조금 외진 곳이었어요. 들어가는 길에 다리도 있었고 큰 도로에 차도 많이 다녔는데…”
지도를 면밀히 살폈다. 세라가 말한 조건에 맞는 야구장은 한 곳이었다.
정서는 고양 장항 야구장으로 차를 돌렸다.
십여 분이 지나 차는 시내를 빠져나가 외진 길로 들어섰다.
“이 길 맞는 것 같아요!”
세라는 말했다. 길치이긴 했지만 몇 번 와본 길에 익숙함이 느껴졌다.
차선도 없는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주차장이 나타났다. 늦은 시간의 야구장은 깜깜했다. 옆의 자유로에서 차가 쌩쌩 지나는 소리가 들렸고 주변 언덕에는 야구장에 전력을 보급하는 건지 모를 태양광 패널이 빼곡했다.
야구장 출입문은 닫혀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정서와 세라 밖에 없었다. 어둡고 외진 이 야구장에 장원이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정서는 포기하지 않고 핸드폰 조명을 켜고 야구장 울타리를 따라 돌았다. 근처 자유로를 비추는 가로등 덕에 어렴풋이 보이긴 했다. 그러나 야구장 깊숙한 곳까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두어 바퀴를 돌아도 결국 장원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은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정서는 차분히 생각했다. 장원은 다쳤고 쫓기고 있었다. 그가 서울에서 이곳까지 올 방법은 택시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아니면 중간에 몸 상태가 안 좋아져 병원에 갔을 수도 있었다. 장원을 쫓고 있다던 사람들에게 다시 잡힌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세라 씨. 일단 타요. 다른 곳이라도 돌아보죠.”
차에 탄 정서가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고 핸들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차 전조등이 주차장 뒤편에 길게 나열된 태양광 패널을 비췄다. 패널 아래쪽의 풀밭이 전조등 빛을 받아 노랗게 보였다.
그 사이에 주변 배경과 다른 이질적인 검은 물체가 잠깐 비쳤다. 빨리 지나쳤다면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크기였다. 사람이 저 아래에 웅크려 있다면 딱 그 정도 크기일 것 같았다.
순간 정서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놀란 세라에게 설명할 틈도 없이 핸들을 돌려 아까 그곳을 향해 상향등을 켰다. 더 밝은 조명에 그 물체가 더 자세히 보였다.
정서는 바로 차에서 내려 태양광 패널 쪽으로 뛰어갔다. 세라는 정서의 행동을 의아하게 보다가 뒤늦게 패널 쪽을 확인하고 놀라서 내렸다.
태양광 패널은 겉에 초록색 펜스가 쳐져 있었다. 일반 성인 남자라면 쉽게 넘겠지만 다친 사람이면 상황이 달랐다.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린 정서가 물체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물체가 아니라 사람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해…! 장원 오빠 맞아요?”
펜스까지 다가온 세라가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쳤다.
정서는 바로 옆까지 다가가는 동안 조마조마하는 마음이었다. 혹시나 세라가 보면 안 될 장면이 나올 수도 있었다. 자기 몸으로 빛을 등져 그림자를 만든 후 핸드폰 조명을 켰다.
웅크린 채 엎드린 사람의 몸을 천천히 돌렸다. 조금 떨어진 세라에겐 잘 보이지 않겠지만 정서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핸드폰 조명은 차마 얼굴을 비춰 보지도 못했다.
“저기요… 장원아…?”
살짝 흔드는 데 의식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움직일 때 아픈지 신음소리를 냈다.
그가 아직 장원인지는 모르지만, 장원일 거라는 예감에 확신이 들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가 어떤 처참한 몰골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정서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조명을 얼굴에 비췄다. 탱탱 붓고 피떡으로 얼룩진 얼굴이지만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장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