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이 법정에서 끝없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때 정은과 정서가 법정에 나가 참고인 진술이라도 하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흔은 연인이자 아끼는 후배인 그들에게까지 짐을 지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사코 반대하며 고집부리는 흔 때문에 둘은 공판에도 가보지 못했다.
어떻게든 흔의 지지부진한 소송을 끝내고 싶었던 정은은 밖에서 당시의 동아리 부원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당연히 도와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은 정은을 피했다. 성규가 미리 손이라도 쓴 건지 갑자기 약속을 펑크 내거나 만나도 무언가 말하길 꺼렸다.
무기력한 상황에 한 부원이 일하던 출판사 앞까지 찾아가 겨우 얼굴을 봤다. 성규와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다는 후배라 연락을 망설이다가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정은이 그의 회사 앞에서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만났는데도 그 역시 기억이 잘 안 난다며 둘러댔다. 다른 부원들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나마 조금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일말의 기대심도 생겼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정은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허탈감에 근처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그 후배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할 말이 있다며.
짧은 이야기가 아니니 퇴근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이었다. 전화 건너편에서 살짝 떨리며 갈등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정은은 당연히 알겠다고 말했다.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는 공원 벤치에서 정은은 꼼짝하지 않고 몇 시간을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일이 조금 늦게 끝났다며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미안해하는 후배에게 정은은 초조한 기색 없이 괜찮다고 말했다.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아직 무언가 말하길 고민하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그의 말을 기다리던 정은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나 다른 부원들이 다 알면서도 피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오빠가 많이 힘들어. 연애를 십 년 넘게 하면 내색하지 않아도 힘들어하는 건 다 보여. 너 오빠가 엠티 가서 영감 떠오르면 술 마시다가도 펜 잡고 끄적거리던 거 기억나지? 매일 단 몇 줄이라도 글을 안 쓰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 지금 몇 주째 못 쓰고 있어… 너도 이 업계에 있으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잖아. 근데 그걸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나는 어떨 것 같니?”
“……”
그는 말없이 마른침만 삼켰다. 말은 차분하게 해도 은은하게 돌아있는 정은의 눈빛에 눌려 움츠러들어 있었다.
“내가 학생 때 비평 시간에 하도 지랄을 해서 내 별명이 펜 잡으면 또라이… ‘펜또’였다며? 내가 지금 괜찮아 보여도 속에선 그때의 미친년이 뛰쳐나오기 직전이거든. 다시 연락이 온 건 너밖에 없어. 그래서 오늘 여섯 시간 넘게 기다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넌 그래도 양심이란 게 조금 있는 거 같으니 다시 연락한 거겠지. 네가 오늘 말하기 힘들면 난 며칠, 몇백일이라도 저 공원 벤치에 앉아서 내 안의 미친년 달래가며 기다릴 수 있어. 그런데 내 앞에 앉았는데도 다시 연락한 게 후회되고 말 못 하겠다면 미친년 마주하기 전에 지금 나가면 돼.”
“만약에 제가 그냥 간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의 목소리는 긴장한 듯 떨리고 있었다. 그는 학창 시절의 정은이 어땠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은이 스스로 말한 ‘미친년’ 상태가 되면 선후배 가리지 않고 그녀 앞에서 오금이 저렸다.
“글쎄. 부모님도 어떻게 못 하는 나를 유일하게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인 오빠가 말려서 간신히 참고 있는 건데… 아마 김성규 찾아가서 귀싸대기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그는 생긋 웃으며 살벌하게 말하는 정은을 보고 목이 타서 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어느새 마셨는지 자기 앞에 놓인 잔의 커피가 바닥을 보였다.
“한 잔 더 시켜줄까?”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그는 추가로 시킨 커피가 나오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성규를 고등학교 때부터 옆에서 지켜봤던 그의 입장에서 성규가 자라 온 이야기였다.
성규의 부모님 두 분은 모두 문학계에 큰 영향력이 있었다. 거장이라는 수식어까지는 몰라도 국내에선 꽤 손꼽히는 작가들이었다. 성규 역시 그런 부모를 보고 자라며 작가에 대한 꿈을 키웠다. 유전적인 영향도 있었는지 성규는 어릴 때부터 줄곧 교내 백일장에서 상을 타오곤 했다.
대부분 부모가 학교 선생님에게 연락해 성규가 상을 받게끔 한 일이었지만 어린 성규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어쨌든 상을 받아오는 성규를 볼 때마다 그의 부모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들도 자신들의 길을 따라 걷는다는 기쁨이었다.
부모의 입김은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이어졌다. 성규는 청소년 문학대회나 고교 백일장에서도 크고 작은 상을 빼놓지 않고 타왔다. 결국 부모가 나온 학교의 문예창작과에 합격했을 때 느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모가 잘못된 방법으로 아들을 지원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성규는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대학교에는 부모의 입김이 전처럼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성규 부모보다도 더 대선배인 홍 교수 때문이었다. 홍 교수는 현재까지도 한국 문학계의 살아있는 거장이었다. 홍대가 미술로 유명하다면 중대가 문학으로 유명해진 건 그의 영향력이 컸다.
홍 교수의 필력에 대쪽 같은 성품과 좋은 인재를 발굴하려는 그의 사명감 앞에서는 그 누구의 청탁도 먹히지 않았다. 창작의 고통이나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과정을 겪지 못한 성규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건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반면 최흔은 1학년 때 과제로 낸 산문이 홍 교수의 극찬을 받으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홍 교수가 흔이 쓴 산문을 복사해 모두에게 나눠줘서 어쩔 수 없이 읽게 됐다. 확실히 잘 쓴 글이었다. 성규는 속에서 질투심 같은 게 느껴졌지만 금방 묻어버렸다. 전국 대회에서 얼굴 한 번 못 본 놈이 한 번쯤 운이었을 뿐이라며 치부했다. 그날 강의실의 모두가 박수를 보낼 때 굳은 표정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던 성규를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2학기가 되었을 때 흔의 이름은 성규 부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요즘 최흔이라는 애 이름이 자꾸 들리더라.”
“엄마가 걜 어떻게 알아요?”
“민 교수가 엄마 친구잖니. 홍 교수님이 그 아이 엄청 칭찬하셨다며?”
“난 모르겠던데… 그냥 운이에요.”
“그래. 걔 교내 백일장만 몇 번 받아본 게 다라며. 다음엔 우리 아들 차례지. 홍 교수님 눈에 한 번만 들면 돼. 알았지?”
“알았어요.”
하지만 기대와 달리 성규의 글은 유독 홍 교수의 눈에 띄지 못했다. 오기로 홍 교수의 강의만 듣고 어느 날은
며칠을 밤새워 써내도 마찬가지였다.
“자네 글은 속이 빈 느낌이야. 형태는 예쁜데 정작 의미는 공허하달까. 자신이 진짜 글에 담고 싶은 게 뭔지 깊이 생각해 본 적 있나? 화려하게 쓰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정작 본질이 흐려지지. 자네는 작가가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 건지 가장 기본부터 먼저 다져야겠는데.”
어느날 홍 교수가 성규를 불러 건넨 말은 충격적이었다. 성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은 쓴맛의 조언이었다. 그리고 그즈음부터였다. 성규의 부모가 최흔과 성규를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 항상 칭찬만 들어왔던 성규의 마음속에는 흔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넘어 조금씩 분노라는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1학년을 마친 겨울 방학 때 흔이 신춘 문예에 등단했다는 소식은 성규가 흔을 완전히 증오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김성규는 계속 부모한테 흔이 형과 비교당했나 봐요. 최흔은 등단도 하고 군대에서도 쓰고 있다는데 넌 뭐하냐는 둥… 학교 얘기가 발넓은 부모한테까지 소식이 들어가니 그 사람도 스트레스 참 많이 받았겠죠.”
“자격지심 같은 게 생겼겠네요…”
세라가 연민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군대를 다녀오고 졸업할 때까지 홍 교수의 눈에 들지도 못하고 부모한테는 인정을 못 받았던 것 같아요. 나중에 등단하긴 했는데 그것도 부모가 잘 아는 작은 신문사의 신춘 문예에서 된 거라는 말도 있고… 사실이 어쨌든 그 사람 책은 잘 안 팔렸어요. 그게 이유였던 것 같아요.”
“네? 그게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세라의 물음에 정서는 담담하게 말했다.
“정은 누나가 만난 그 준기라는 후배의 말에 따르면 김성규는 그동안 자기도 대단한 작가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 했나 봐요. 부모한테, 홍 교수에게, 그리고 주변인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술에 취하면 왜 세상이 자기를 인정 안 해주는지 그런 인정 욕구가 대단했었대요. 그런데 하필 그때 흔이 형의 그 책이 나왔어요.”
“최 작가님을 이용… 했다는 건가요?”
“그 후배가 확답을 말하진 않았지만 김성규가 지내온 시간을 들어보면 정황상 그렇게 보여요.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자기 아이디어가 최흔의 손에서 대박이 나니 다른 생각이 들었던 거 같고요. 아마 자기 아이디어로 형이 잘나가는 게 싫었겠죠. 아이디어를 빼앗겼다고 말하고 다녔다니 자기 딴엔 억울함을 느꼈나 봐요. 그리고… 지금 시대에 유명인을 흠집 내면서 자기 명성을 얻는 경우가 은근히 많이 일어나죠.”
“그런…”
세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김성규라는 사람의 비뚤어진 마음과 잘못된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그렇게 된 원인을 제공한 건 그의 부모였다. 결국 자식에 대한 과한 기대감이 잘못된 훈육으로 이어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 진짜 좆같네. 최흔 이 개새끼… 남의 아이디어 갖고 잘된 주제에. 준기야 진짜 형이 어떻게 하나 지켜봐
라.”
김성규는 바에서 준기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독한 위스키를 많이 마신 터라 성규는 이미 취해있었다. 최흔이 이번에 낸 책이 미국에서 상을 받고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된 이후 성규는 매일 이렇게 술만 마셨다.
“그래도 형. 소송까지 가는 건 좀…”
“됐어! 소송에서 져도 상관없어. 최흔이 얻은 명성에 내 것도 있으니까 이제 그걸 다시 찾아오는 것뿐이야. 그 새끼는 도둑질한 대가를 치러야지.”
성규는 분한 듯 또 온더록스 잔을 비웠다. 준기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본 이 선배는 이럴 때는 옆에서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평소엔 괜찮은 형인데 가끔 이렇게 격한 감정에 휘둘릴 때는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말끝마다 씨발, 개새끼 같은 욕을 추임새처럼 달고 있었다.
성규가 아이디어를 말했던 그날 동아리방엔 준기도 있었다. 자기 기억에도 최흔은 잘못이 없었다. 성규가 지금 복수심과 억울함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괜한 무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언론에 제보하고 소송까지 가는 건 양쪽에 득 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규에게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서 그를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최흔에 대해서라면 유독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성규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거 형이 다 공유한 아이디어였잖아.”라고 말했다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본 성규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성규를 겨우 택시에 태워 보내는 준기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결국 며칠 후 인터넷에 성규가 제보한 최흔의 표절 의혹 기사가 떴을 때 준기는 한숨만 쉬었다.
“흔이 형을 이용해서 자기도 유명해지려는 의도였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죠. 소송 후에도 독자들은 그 사람 책을 외면했으니까. 이후의 일은 모르겠네요. 시간이 지나니까 김성규가 이해는 돼요. 부모한테 그런 비교를 당하고 부모에 의해 자기 능력이 부풀려진 채 살았다면 저라도 그랬을 것 같긴 해요.”
정서가 덤덤하게 말했다. 길어진 이야기에 술은 이미 동이 났다.
“그래도 방법은 잘못된 거죠. 아무리 상황이 절박해도 해선 안 될 일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잠시 대화가 멈췄다. 정서는 말을 오래 해서 그런지 술에 취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꺼낸 이야기에 술이 더 당겼지만 여기서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괜히 빈 술잔만 어루만지다가 물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세라가 궁금했던 정서의 이야기는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사건은 그렇게 2년을 질질 끌었어요. 흔이 형은 그동안 저랑 수업하는 거 외엔 하던 방송들도 스스로 하차하고 다른 활동은 안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수업이 형한텐 글을 놓지 않기 위한 도피처였던 것 같기도 해요. 그땐 자기 집필도 중단한 상태였으니까. 제 첫 책이 완성될 즈음에 소송이 끝났어요. 그리고… 형은 쪽지 한 통만 남기고 갑자기 떠나버렸죠.”
“어디로요?”
세라가 깜짝 놀라 물었다. 문학관을 세운 사람이 지금 여기 없으니 다른 사정이 있겠다 싶었다. 그저 사람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 다른 곳에서 조용히 지내겠거니 하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가 아예 떠났다는 건 예상 못 한 말이었다.
“몰라요. 그냥 해외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 같아요. 쉬고 있는 걸 수도 있고.”
“그랬군요…”
세라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후로 잘 놀라지 않게 된 것 같아요. 형이 떠난 게… 저한텐 꽤 큰일이었어요. 성인 되고 나서부터 부모님보다 더 의지했던 사람이었거든요.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돌아올 건지… 그런 말도 없이 영영 떠난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정서의 얼굴에는 그때 일이 떠올랐는지 그늘이 져 있었다.
— 정서야. 형한테 안식년이 필요한 것 같다. 나중에 때가 되면 연락할게. 그동안 정은이 좀 부탁해.
출간 미리 축하한다. 앞으로도 글 계속 쓰고. 지켜볼 거야!
마지막 수업 이후 2주가 지나 찾아간 문학관에는 이런 쪽지만 놓여있었다. 1월이었고 문학관은 다음 입주작가들을 모집하는 기간이라 한산했다. 이제 겨우 퇴고했는데 갑자기 출간은 또 무슨 소린지… 급하게 눌러본 흔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정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정은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는 기운이 없었다.
“알고 있어… 문학관은 당분간 내가 운영할 거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오빠 금방 돌아올 거야.”
정은의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오히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져 정서가 그녀를 위로해야 할 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항상 강하고 털털했던 정은이 처음으로 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니 사실 소송이 진행되는 그 2년 동안 정은과 정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흔의 고통을 나누며 지친 상태였다. 언제나 셋의 구심점이자 의지할 곳이 되어주었던 흔이 자리를 비운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정은도 정서도 한동안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정서는 회사에 2주 동안 무리해서 휴가를 냈다. 목적지는 우도였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냥 흔을 떠나게 만든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다.
멀리 성산일출봉과 지미봉이 보이는 우도의 한 펜션에서 넋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펜션 주인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손님이 수상해서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렸다.
베란다에서 하염없이 일몰을 지켜보는 게 당시 정서가 유일하게 한 일이었다. 사실 정서는 어떤 결정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미세먼지도 없이 한라산과 오름들 사이로 발갛게 내려앉는 해를 보고 있자면 다른 잡생각은 들지 않았다.
펜션을 예약한 마지막 저녁. 정서의 고민도 끝나있었다. 전날 내린 눈으로 흰색을 뒤집어쓴 제주가 겨울 석양빛에 붉게 물들었다.
“누나. 나 회사에 사직서 냈어.”
“뭐……?”
두어 달이 지난 어느날 정서는 주말에 문학관을 관리하던 정은을 찾아가 대뜸 말했다. 정서를 잘 아는 정은은 부모님은 어쩌고 당장 어떻게 먹고살 거냐며 친누나처럼 타박했다.
“흔이 형이 소개해 준 출판사에서 내 책 출간하기로 결정했어. 다음 주에 계약해. 부모님은 괜찮아. 이제 내가 결정해도 될 나이야. 퇴직금도 좀 되고… 그냥 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래. 나도 오래 고민한 일이야.”
말을 듣고도 정은은 이 세계에서 먹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국내 문학계는 등단을 해도 투잡을 뛰며 생계를 잇는 작가들이 많았다. 정서가 듣기 싫어해도 그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나오는 잔소리였다. 하지만 웬일로 쇠심줄 같은 고집을 부리는 정서의 선택을 결국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퇴사한 정서가 문학관에서 지내면서 문학관 관리도 정서가 맡아서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정은도 원래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정서는 처음엔 빈 입주작가 방을 쓰다가 나중엔 흔과 정은이 살던 집에서 살게 됐다. 정은이 흔 없이 그 집에서 혼자 사는 게 싫다며 따로 파주 시내에 방을 얻어 나간 것이었다.
정서가 관리인을 맡겠다고 했을 때 ‘글만 쓰기 심심할 거 같아서’라고 둘러댔다. 처음엔 정은이 고용한 아주머니가 매주 두 번씩 와서 청소를 돕고 있었다. 정서가 하는 일이라고는 매년 지자체에 보조금을 신청하고 공과금을 내거나 작가들을 모집하는 일이 전부였다. 흔이 매달 꼬박꼬박 정은의 계좌로 돈을 보내고 있어서 문학관 운영비가 부족하지도 않았다.
정서는 유튜브로 요리를 배우면서 직접 작가들의 저녁을 책임졌다. 그렇게 조금씩 자기 일을 늘려가더니 청소도 문학관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하게 하는 등 규칙을 만들었다. 정서는 자기도 모르게 관리인 역할에 재미가 들고 있었다.
문학관은 흔과 정은, 정서 셋에게 의미가 큰 공간이었다. 정서가 흔의 후계자라느니 제자라느니 그런 거창한 단어는 필요 없었다. 그저 흔이 남기고 간 유산을 그가 돌아올 때까지 지키고 싶다는 의중도 분명 있었다.
소설가이자 문학관 관리인 한정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흔이 떠난 지 두 달 후의 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흔이 형이 떠나기 전에 말도 없이 제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더라고요. 공들여 키운 후배 녀석이라고 말했다나… 쳇, 맨날 어린애 취급이라니까요. 뭐 덕분에 이름 없는 작가가 한 번에 출간하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죠.”
“작가님 실력이 있으니까, 행운도 잡을 수 있었던 거죠. 아무리 최흔이라는 스타작가 소개여도 출판사가 괜히 아무 책이나 내겠어요? 정서 씨 책 재미있어요.”
정서는 순간 세라가 말을 참 예쁘게 잘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조금 편해졌어도 내성적인 성격이 어디 가진 않아서 이런 순간에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래도 표정은 숨기지 못해 미소가 번져 나왔다.
세라는 이제야 조금 웃는 정서가 귀엽게 느껴졌다. 참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세라도 그런 마음이 비칠까 봐 화제를 돌렸다.
“정은 언니 지금은 괜찮은 거예요? 전 그런 모습을 못 봐서 언니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전혀 몰랐네요.”
“종종 누나한테 엽서 같은 걸 보내나 봐요. 누나가 가끔 기분이 업 되는 날이 있거든요. 누나는 제가 형 안부 물어보면 걱정 말래요. 치사하게 내 연락은 안 받고… 하여튼 흔이 형 돌아오면 한 대 좀 세게 맞아야 해요. 다 큰 어른이 주변 사람들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세라가 맑게 웃으며 호응했다. 술기운이 뒤늦게 도는지 그 미소에 또 아찔해졌다. 정서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니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술 때문인지 세라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얼굴에 찬물을 축이고 뺨을 몇 번 두드린 정서는 심호흡까지 몇 번 하고 나서야 화장실에서 나왔다. 마실 게 다 떨어진 상태여서 얼른 주방으로 가 맥주 두 캔까지 챙겼다. 다시 테라스로 돌아와 보니 세라는 난간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저수지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인기척이 났는데도 세라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비가 그친 후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살살 건드리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세라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조용히 허밍을 하고 있었다.
“여기 바람 좋죠?”
정서는 괜한 말을 건네며 세라의 옆자리에 앉았다. 세라는 대답 없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자꾸 그녀의 눈을 피해 다른 곳을 향했다. 안 그래도 멀쩡한 난간을 훑어보다가 시공 참 잘됐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를 따서 건네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세라는 정서가 선곡한 인디밴드의 노래가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
한 곡이 끝났다. 세라의 허밍도 멈췄다.
“아무튼…! 전 그래서 일부러 안 유명해지는 거예요. 지금 수입으로 충분해.”
뭐라도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았던 정서가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어머, 돈 많이 버셨나 봐요?”
세라가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정서는 대충 얼버무렸지만 나름 40만 부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올해 윤 피디를 통해 드라마화된 소설은 해외 판권 계약도 앞두고 있었다.
세라와 가벼운 장난을 치다 보니 과거 얘기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멀리 저수지의 산책로를 따라 드문드문 켜진 조명이 물에 비춰 예쁘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늦여름이라 그런지 비가 왔는데도 공기가 그렇게 진득하진 않았다. 바람과 풍경. 세라가 왜 유독 테라스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문득 정서가 말했다.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가십거리에만 몰입하죠. 사무실에서, 화장실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술 마시다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남긴 댓글들이 대중의 반응이라며 오히려 논란을 키우고 사람을 매장하죠. 나중에 잘못이 없다고 밝혀져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사람 가슴에 못을 그렇게 박아댔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책임이 없는 건 아니죠. 그래서 밖에 알려지는 게 겁이 나요. 흔이 형이나 세라 씨가 당한 일들… 옆에서 보면서도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도 화가 나고. 미안하고. 참… 복잡하네요.
잘 버텨요! 바람은 지나가니까. 세라 씨가 괜찮아질 때까지, 여기 떠나고 싶을 때까지 언제든 있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정서의 표정에서 그가 받은 상처와 여러 감정이 느껴졌다. 그의 감정이 진심이라는 것도 전해졌다.
세라가 말했다.
“그럴게요. 오늘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그러고는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정서는 잔뜩 굳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이 가벼운 무게감이 현실인지 헷갈렸다. 자기 몸이 떨리는 건지 그냥 맥박인지도 모를 만큼 머리가 아찔했다. 떨리는 거라면 제발 세라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의 이 작고 여린 무게감이 온 우주의 질량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 반대로 공기 한 줌만큼 가볍기도 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수축 이완 운동을 하는 횡격막이 그녀를 불편하게 할까 싶어서 숨도 겨우 쉬었다. 그러면서도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황홀했다. 단지 어깨에 기댔을 뿐인데도 황홀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았다.
노래 한 곡이 또 끝나고 세라가 머리를 일으키며 맥주를 마셨다. 영원 같은 순간이 일찍 끝난 게 못내 아쉬웠다. 아직 어깨에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세라는 달리 말이 없었다.
어쨌든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자유로워지며 숨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그런 걸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맥주만 마시는 세라가 얄밉기도 했다.
시간은 열 시가 넘어 있었다. 문득 아까 문학관으로 오는 차에서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저도 놀라는 게 있어요.”
“뭔데요?”
세라가 고개를 홱 돌리며 정말 궁금한 듯 쳐다봤다.
“공포영화 못 봐요. 무서운 거 싫어.”
민망한 듯 말하는 그가 재미있어서 입을 가리고 쿡쿡대며 웃었다.
“진짠데. 밤에 잠 못 자요. 귀신 나올 것 같아서…”
세라는 이번엔 박수까지 동원하며 자지러지게 웃다가 겨우 말했다.
“의외네요? 전 공포영화 좋아하는데. 같이 볼래요?”
동그란 눈으로 누가 봐도 짓궂게 장난을 치는 세라였다.
“세라 씨가 더 의외네요. 저 그럼 눈 감고 귀마개 끼고 볼게요.”
“그게 무슨 보는 거예요!”
한동안 테라스에선 두 사람이 장난치면서 투덕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멀리 저수지 위의 밤하늘에선 짙었던 먹구름이 물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