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비를 너무 많이 맞아서 일단 씻고 나오기로 했다. 정서는 집에 들러 5분 만에 씻고 나와 2층 테라스에서 얼른 저녁을 준비했다. 반 정도만 열어놨던 폴딩 창문을 열 수 있는 곳은 모두 열고 방충망도 쳤다. 혹시 몰라 곳곳에 모기향도 피워놓았다.
세라는 날파리 같은 작은 벌레도 아주 질색했다. 그리곤 가끔 금요일 파티를 테라스에서 할 때 쓰는 간이 테이블과 접이식 의자를 순식간에 설치했다. 이후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전구 조명까지 켰다. 빗소리가 들리는 잔뜩 흐린 날씨에 분위기 있는 음악과 은은한 조명. 괜찮은 분위기에 절로 만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정서는 이렇게 조금이나마 세라의 마음이 풀릴 수 있길 바랐다. 이 모든 게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잽싸게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했다. 얼린 오징어를 따듯한 물에 몇 번 넣었다 빼며 빠르게 해동시키고 쪽파와 고추를 써는데 막힘이 없었다. 부침가루와 물 농도를 세심히 조절해 반죽을 만들고 재료들을 담아 잘 섞어줬다. 그는 간장도 허투루 만들지 않겠다는 듯 식초와 고춧가루, 참기름에 고추까지 썰어 넣고 테라스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세라가 들어간 후 삼십 분쯤 지나있었다.
이제 나올 때가 된 것 같아 버너에 팬을 올리고 불을 켤 때 세라가 테라스로 나왔다. 아직 덜 말린 머리에 화장기 없는 수수한 모습이었다. 정서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세라는 평소와 달라진 테라스를 둘러보고 조금 놀랐다.
“언제 이렇게… 오래 기다렸어요?”
세라가 정서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다행히 그녀의 표정은 아까보다 좋아진 느낌이었다.
“딱 맞게 왔어요. 막걸리 괜찮아요?”
“자주 먹진 않지만, 비 오는 날은 파전에 막걸리 마셔줘야죠.”
정서가 막걸리를 흔들어 보였다. 소주, 맥주부터 위스키. 와인, 막걸리, 청주까지. 정서는 문학관에 웬만한 술은 항상 구비해놓고 있었다. 세라는 뭔가 어색한 표정으로 정서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기분은 풀렸는데 내색하기는 싫은… 남자들이 어려워하는 그런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정서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얼른 막걸리를 따고 세라와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기름을 두른 팬에서는 서서히 열이 오르고 있었다. 정서가 팬을 한번 흔들어 보더니 바로 반죽을 올렸다. 열을 잔뜩 머금은 기름에 반죽이 튀겨지는 소리가 맛있게 들렸다.
“온도는 어떻게 맞춰요?”
딱히 팬 위에 손을 올려 열을 재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적당한 온도에 타이밍을 맞춘 그가 신기했다.
“기름 두르고 강불에 1분 정도 둬요. 기름이 뜨거워지면 물처럼 흐르거든요. 그때 넣어요.”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요리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얼마나 많이 해봤으면 이런 노하우가 생기는 걸까 궁금했다. 정서는 조금 더 있다가 뒤집개를 이용해 한 번에 뒤집고는 불을 중불로 낮췄다. 반죽은 이제 파전이라 불러도 될 비주얼을 보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정서는 파전을 살짝 들어보더니 만족한 듯 접시에 담았다.
“매운 거 잘 드시는 것 같아서 청양고추도 조금 넣었어요. 너무 매우면 빼고 드세요.”
“잘 먹을게요. 다 익었는지는 어떻게 알아요?”
“소리도 듣고 눈으로도 보는데 그냥… 뭐 감이죠. 한잔할까요?”
정서가 잔을 들어 내밀었다. 세라도 자기 것을 들어 잔을 부딪쳤다. 술집에서 흔히 보는 양은으로 만든 잔이 아니라 도자기 잔이었다. 막걸리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시큼하면서 달큰한 막걸리 특유의 맛이 진하게 남았다. 그러면서도 뒷맛은 깔끔했다.
“맛 괜찮아요? 제가 군 생활했던 양평에서 유명한 막걸리예요.”
“좋은데요? 파전도 맛있고. 되게 바삭하다.”
“다행이다. 천천히 먹어요.”
세라는 아예 눈을 감고 음미했다. 반죽보다 파와 오징어 같은 건더기가 더 많아 씹는 맛이 좋았다. 한동안 파전 만드는 법에 대한 노하우 같은 걸로 스몰토크를 나눴다. 배가 고팠던 둘은 파전 두 접시를 금세 비웠다. 술이 들어가니 취기도 올랐고 이제 배도 어느 정도 찬 것 같았다. 이제는 본론을 말해야 할 차례였다.
“이 문학관은 대표가 따로 있어요.”
정서가 세 번째 반죽을 올리면서 말했다. 세라도 전에 정은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처음 온 날 정은이 옷가지들을 가져다줬을 때 넌지시 들은 이야기였다.
“알아요. 정은 언니한테 살짝 들었어요.”
“그랬구나. 그러면 최흔이라는 작가 혹시 들어본 적 있어요?”
최흔. 세라도 아는 이름이었다. 해외 유명 문학상을 받으며 천재 작가라고 불렸던 사람.
“알죠. 책도 많이 내시고… 방송에도 자주 나왔던 분 아니에요?”
장르를 가리지 않는 필력도 상당한데 잘생기기까지 한 외모로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작가. 토크쇼나 예능에도 자주 나와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분이 여기 진짜 대표예요. 형 이름 ‘새벽 흔’자를 따서 이름도 새벽 문학관으로 지은 거고. 제 대학 선배이자 정은 누나 남친이에요.”
“아……”
그는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와 명예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모종의 일로 한순간에 자취를 감춘 사람이기도 했다. 그 사람이 이 문학관의 대표이고 정서, 정은과도 인연이 깊은 사이라니. 세라는 뭐라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형은 제 우상이었어요.”
정서는 계속 파전을 부치면서 말했다.
아니, 그는 모두의 우상이었다. 정서가 신입생 때 문학 동아리 ‘글꾼’에 들어갔을 때 최흔은 군에서 복학한 2학년이었고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었다. 밤낮없이 바쁜 작전과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하던 중에도 조금씩 글을 썼다. 그리고 제대 후 휴학 기간에 완성한 단편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동아리 최초로 재학 중에 등단한 그는 이미 모두에게 우상이 되어 있었다.
반면 온통 국문과나 문창과 학생이었던 동아리에서 경영학과인 정서는 별종 취급을 받았다. 처음엔 관련 없는 다른 과 학생이 가입한 걸 신기하게 여겼지만, 그들은 점점 정서를 업신여겼다. 소위 ‘배웠다’는 그들은 자기들도 아직 어려운 전문 용어를 읊으며 아는체하곤 했다. 가입하려면 원고지 단 몇 장이라도 직접 쓴 글을 심사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동아리였다.
그래서 가입했다는 자체로도 그들은 자부심을 가졌다. 관련 학과 학생들도 아무나 못 들어오는 동아리인데 저 녀석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두 궁금해했다. 회장인 최흔이 정서의 글을 읽고 그 자리에서 가입을 승인했다는데 다들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의 존재가 불편했던 부원들 몇은 정서가 어떤 교수의 아들이라느니 등단한 졸업생 누군가의 사촌이라느니, 헛소문을 퍼트렸다.
흔이 정서의 글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아 소문을 공공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정서는 경영학과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은 채 흔과 정은을 따라다녔다. 그 무렵 정은과 흔은 이미 연인 사이였다.
여름 방학 중에 부원들은 11월에 있는 교내 문학상 공모전에 낼 작품을 썼다. 교내 문학상은 30년이 넘은 오래된 전통이었고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특별했다. 우선 5위 안에 들면 졸업생 한 명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단편집을 내줬다. 기념 성격이 강한 출간이라도 자기 이름이 들어간 책을 낼 기회로써의 의미가 있었다.
최우수상 한 명과 우수상 두 명의 수상자는 더 큰 혜택이 있었다. 현역 소설가로도 명성이 높은 문예창작과 교수가 직접 출판사 몇 곳의 인맥을 연계해 주는 것이었다. 3위 안에 들면 연계된 출판사의 실제 편집자들의 비평과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작가의 길보다 출판업에 뜻을 둔 학생이라면 졸업 후 추천을 받아 출판사에 입사하기도 했다. 즉, 수상자는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업계 상황은 취업도 어렵고, 투고로 책을 내는 건 더 힘들었다. 등단은 그냥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학생들에게 교내 문학상의 이런 특전은 어쩌면 미래가 보이는 귀중한 기회였다. 그래서 다른 많은 대학 문학상에서 입상하는 것보다 교내 문학상 수상을 더 원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실제로 3위 안에 들었던 졸업생 중 등단하거나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감 기한은 2학기 개강 직전이었다. 문학상 공모에 도전한 학생들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방학을 보냈다. 동아리 부원들이 모인 자리에선 공모전에 대한 수다가 꽃을 피웠다. 문학에 조금 관심이 있는 다른 과 학생들까지 삼백여 명이 지원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비전공자인 정서를 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정서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최흔 곁에 붙어 다녔다.
2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예심을 통과한 오십 편의 명단이 발표됐다. 부원들은 동아리실, 도서관, 자취방에 끼리끼리 모여 자기 작품의 이름이나 지원 번호가 명단에 있는지 확인했다. 결과에 웃은 사람이나 아쉬운 사람이나, 자기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며 누가 최우수상이 될지 떠들어댔다.
이미 등단한 최흔이 공모전에 지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들 정은을 유력한 1등으로 점쳤다. 동기 중에서나 선배까지 포함해도 그녀의 필력은 최고에 속했으니까. 정서가 본심에 올라갔으리라고는 그들 중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11월이 되고 최종 본심 수상작이 결정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며칠 후 게시판에 공개된 다섯 편의 작품명을 본 지원자들은 역시 오정은이라며 추켜세웠다. 명단에는 아직 순위나 이름이 없었지만, 정은의 작품은 그녀가 오랫동안 계획하고 쓴 만큼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시상식이 열린 날 강당에 모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은이 1등이자 최우수상을 받은 건 맞았다. 이미 시상식 전에 어떤 작품을 누가 쓴 건지 다들 알고 있었다. 정보력 좋은 학생 누군가는 심지어 순위까지 아는 녀석도 있었다. 빛보다 빠른 소문은 모두가 들었다. 국문과 3학년생이 5등에 호명되고 흔의 동기가 4등에 호명되었을 때도 다들 알고 있었다는 분위기였다.
부원들의 이목은 3등이 대체 누구인가에 쏠렸다. 국문과와 문창과 학생 모두 한 작품만큼은 그 주인을 몰랐다. 어느 술에 취한 조교의 입을 통해서였는지 그 주인 모를 작품이 3등이라는 소문도 이미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세 번째 수상자의 이름이 발표됐을 때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우수상. 작품명 <새벽노을>. 수상자는… 경영학과 06학번 한정서. 축하합니다.”
짝, 짜작… 짝.
이전 두 명의 이름이 불렸을 때와 달리 이번엔 어색한 박수 소리가 났다. 오히려 웅성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학생들은 옆 사람과 소곤거리며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객석 앞에서 뒤로 3/4쯤 되는 자리에 앉아 있던 정서가 슬며시 일어나 단상으로 걸어갔다. 그를 따라 고개가 돌아가는 학생들은 입을 다물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앞서 4, 5등은 외부에서 초빙한 심사위원이 시상했다. 3등부터는 하필 문예창작과 홍 교수가 시상할 차례였다. 교수는 환하게 웃으며 정서에게 증서와 꽃다발을 수여했다. 최흔이 객석에서 다가가 웃으며 또 다른 꽃다발을 안겼다. 홍 교수는 정서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가의 길을 걷고자 객석에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그 교수였다. 모두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졸업생 중 이삼 년에 한 번꼴로 등단인을 배출한 명문 동아리 소속이라는 그들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흔이 형이랑 정은 누나만 저를, 제 글을 믿어줬어요. 이후로도 동아리에선 계속 왕따처럼 지냈지만… 그래도 형이랑 누나가 있으니까 상관없었어요.”
다음 해에 정서는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그는 남들은 다 꺼리는 GOP에 가고 싶어했다. 어느 한 예비역 선배가 술자리에서 했던 군대 이야기가 떠올라서였다. 최전방 부대에서 철책 경계 근무를 하면 생각할 시간도 많고 특히 야간 근무는 절경이라던 말이 딱 정서의 취향에 맞았다. 험한 지형이 힘들다지만 운동 부족을 대체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그는 육군에서 가장 훈련이 많다는 맹호 부대의 전차병으로 배치받았다. 행정병 출신 흔은 당직 근무를 설 때마다 PC로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정서는 생각할 틈도 없이 촘촘한 훈련 일정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군 생활에 훈련이 많으면 시간이 빨리 가는 법. 2년은 금세 지나갔다.
제대 후 복학했을 땐 최흔과 정은은 졸업반이었다. 흔은 두 번째 장편을 쓰고 있었고 정은은 드라마 작가를 준비하느라 둘 다 얼굴 보기 힘들었다. 두 사람 없이 학교를 혼자 다니는 느낌에 왠지 공허했다. 흔이 회장일 때와는 달라진 동아리도 나가지 않았다. 정서는 글도 쓰지 않고 무언가 목표도, 별다른 꿈도 없이 그저 학교에 다녔다. 자연스레 공모전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혜택도 관심에서 멀어졌다.
3학년이 되었을 때는 이미 졸업한 흔의 소식이 들려왔다. 흔이 쓴 두 번째 소설이 미국의 유명 SF 문학상을 받았다. 순식간에 팬덤이 생기더니 소설계에선 마의 벽처럼 여겨지던 10만 부 판매를 훌쩍 넘겨버렸다. 흔의 글은 초반부터 순식간에 독자를 몰입시키고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학창 시절에도 장르를 가리지 않고 썼던 흔은 후에 ‘장르의 마술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정은도 보조작가로 일하는 동안 단막극도 하나 쓰면서 경력을 쌓고 있었다. 그녀가 참여한 드라마의 엔딩 크레딧에 오정은 이름 세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서는 물론 두 사람이 잘 되는 걸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과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4학년은 군 생활이 지나가는 것보다 더 빠르게 다가왔다. 이젠 정서도 앞으로 무얼 할지 선택해야 할 때였다. 성적이 나쁘진 않았는데 그렇다고 경영학이 재미있는 건 아니었다. 1년에 한 권씩 내는 흔의 책을 읽으면 정서도 다시 글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읽고 쓰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흥미였다.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배고픈 직업은 안 된다며 잔소리만 실컷 들었다. 그때는 더 소심했던 정서는 부모님의 뜻을 못 이기고 마지못해 취업 준비를 했다. 학점 관리 말고는 한 게 없어서 어느 정도 스펙을 갖춰놓은 동기들과는 달리 토익 학원부터 끊었다. 2년 넘는 취준생 기간에 책과 글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어찌저찌 적당히 괜찮은 공공기관에 합격해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흔과 정은은 그런 정서를 아쉬워했지만, 인생에서 누구나 꿈을 선택하는 건 아니었다. 정서에게 회사는 학교와 비슷했다. 학생 때의 자유가 회사에서 규칙과 통제로 바뀌었을 뿐 재미없는 건 똑같았다. 남들은 나름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는 3년 차가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이면 일어나 꾸역꾸역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는 삶. 돈은 버는데, 다들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삼십 대가 되었는데도 정서는 뭔가 답답했다.
그 무렵엔 흔이 방송에도 출연하고 있었다. 글도 잘 쓰는 사람이 토크쇼에서 말도 잘했다. 관찰 예능이 막 뜨던 때는 금방 문제점을 짚어 해결책을 제시하는 흔의 매력에 팬덤이 더 커졌다. 예능 프로 네 개에 출연하는 바쁜 일정에도 책도 꾸준히 냈다.
“저 형이 사람이 맞나 싶었었죠.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처럼 책을 냈으니까. 그 바쁜 일정에도 참… 천재 작가 소리는 아무나 듣는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아, 그때 그 형이 찍었던 통신사 광고 혹시 알아요?”
“들으니까 생각나네요. 진짜 그땐 엄청 핫 하셨구나.”
조용히 듣기만 하던 세라가 맞장구쳤다. 네 번째 파전은 반 정도 남아있었고 막걸리는 어느새 세 병을 비웠다. 정서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때 흔이 형은 방송 출연료랑 광고 수입을 하나도 안 쓰고 모으고 있었어요. 형이랑 정은 누나랑 저. 셋의 오랜 꿈을 위해서.”
이야기가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이전의 이야기는 오랜 과거의 일이었다. 이제 나올 이야기는 현재와 연관있는 부분이라는 걸 직감했다. 방금 마신 정서의 빈 잔에 막걸리를 따라주며 다음 사연을 기다렸다. 술은 넉넉했다.
매년 나오는 흔의 책을 읽다 보면 정서도 손이 근질거렸다. 그는 정말 로맨스, 스릴러, 추리, SF, 역사 소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이도 써냈다. 어디서 그런 영감이 떠오르는지 부러울 지경이었다. 퇴근 후엔 습관처럼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봤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었고 세상에 영상 콘텐츠들은 넘쳐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볼 때는 시간이 그렇게 잘 갈 수가 없는데 끄고 나면 공허했다. 보이지 않는 철창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무료함과 따분함이 얽힌 하루하루는 아무것도 재미있는 게 없었다. 정서는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수동적으로 사는 건 싫었다. 회사원이 자기에게 맞는 옷이 아니라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던 터였다.
정서는 결국 노트북을 켰다. 학생 때 썼던 단편을 다시 읽는데 멋쩍은 웃음이 났다. 우수상을 받고 나서 처음 읽는 것이었다. 거의 십 년 동안 컴퓨터 폴더 한구석에 처박아둔 글을 마주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이가 들고 읽어보니 조금 유치하기도 했고 손댈 곳도 많이 보였다. 무엇보다 흔의 글감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때는 동경하던 흔을 따라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조용히 파일을 닫고 새 창을 열었다. 예전 글은 추억으로 묻어두고 새로운 글을 쓰고 싶었다. 검은 활자로 가득했던 화면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백지는 곧 다시 글자로 채워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리모컨을 들고 무엇을 볼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무거나 고르고 자기 전까지 멍하니 있던 시간에 타이핑 소리만 조용히 들렸다.
주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흔은 그 많은 장르를 다루기 위해 수많은 자료 조사 과정을 거쳤다. 십 년 가까이 글만 쓴 흔을 지금 따라 할 수는 없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사회에서 그동안 보고 느낀 이야기를 적고 싶었다. 회사를 다니며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팀장과 선배들이 주인공이었다.
정서가 회사를 열심히 다니진 않았어도 쓸만한 아이템들이 회사 안에 즐비했다. 정서는 평소 야근도 거의 안 하고 퇴근 후에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었다. 진급 욕심도 없던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래도 근무 시간 내에 자기 할 일은 제대로 해놓으니 크게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MZ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전이어서 사람들도 정서를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별종 취급했다.
그 덕에 퇴근 후 저녁 시간을 오롯이 글을 쓰는데 보낼 수 있었다.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 덕에 생각보다 진도가 빨랐다. 3주 만에 50여 쪽의 초고를 썼고 다시 3주 동안 퇴고하며 60쪽짜리 단편이 완성됐다. 마음 같아선 장편을 쓰고 싶었는데 아직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는 힘이 부족했다. 애써 쓴 단편을 공모전에 내볼지 어쩔지 며칠 고민하는데 흔의 연락이 왔다.
— 주말에 뭐 하니? 오랜만에 셋이 같이 파주로 놀러 가자.
주말이라고 별다를 게 없던 정서는 고민도 없이 가겠다고 답했다. 그때도 여름이었다. 왜 파주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다. 남들처럼 딱히 어디 다녀올 계획도 없던 정서에겐 여름휴가나 다름없었다. 효자동 조용한 골목에 살고 있던 최흔의 집에서 만난 셋은 정말 오랜만에 같이 길을 떠났다.
간간이 얼굴을 보긴 했어도 여행은 졸업 후 처음이었다. 서울을 빠져나와 자유로와 통일로를 따라 파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셋이 학교를 같이 다닌 건 2년 남짓이었는데도 가는 동안 옛날이야기로 즐거웠다. 파주에서 군 생활을 했던 흔이 종종 곳곳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지금은 신도시가 생겨서 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말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국도를 달리던 차가 시골길로 들어섰다. 주변엔 작은 공장들이 있었고 2차선 도로는 한산했다. 골프장을 지나자 ‘장곡마을’이라는 이정표가 자리 잡은 삼거리가 나왔다. 다른 한쪽에 관광단지를 가리키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는데 흔은 관광단지가 아닌 마을 쪽으로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 화면도 딱히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평범한 시골 마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의아해진 정서가 어디로 가는지 물어도 흔과 정은은 말없이 조용히 웃기만 했다. 흔은 마을을 가로지르더니 언덕으로 올라갔다. 나무가 무성한 마을 뒷산이었는데 산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높이의 언덕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길의 끝에서 새 건물 티가 역력한 2층 건물이 나타났다.
“설마 그 건물이…?”
“네. 그게 바로 여기 새벽 문학관이었어요.”
정서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그때 일이 생생했다.
“형… 여기 뭐야?”
차에서 내린 정서가 문학관 입구 앞의 간판석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뭐긴 뭐야. 인마, 보면서도 모르냐.”
흔 대신 정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다정하게 팔짱을 낀 정은과 흔이 눈에 들어왔다. 둘 다 씩 웃고 있는걸 보니 정은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세 사람이 붙어 다니던 시절. 담당 교수와 함께 공모전 수상자들이 충청도의 한 문학관에 견학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작가들이 없는 겨울, 정서가 입대를 몇 주 앞두고 있을 때였다. 가보니 교수와 친분이 있었던 문학관 관리인은 심지어 등단한 시인이었다. 그에게서 작가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소위 예술을 한다는 이들의 실제 삶이 어떤지 조금 무거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정서가 후에 부모의 뜻을 따라 취업을 선택한 건 이때 들은 이야기의 영향도 있었다.
관리인은 마지막에 거의 기부나 지자체 지원으로만 운영되는 문학관이 예산 부족으로 2년 후에는 폐관될 수도 있다는 어두운 소식도 들려줬다. 작가들이 생계 걱정 없이 작품을 쓸 수 있게 문학관을 짓겠다는 꿈. 그곳에서 하룻밤 묵으며 술 한잔을 기울일 때 했던 세 사람만의 약속이었다.
사실 흔은 2년 전부터 문학관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야외 훈련을 할 때 봐둔 이곳을 점찍어둔 덕분에 부지를 찾아다닐 시간이 줄었다. 돈이 점점 모이면서 먼저 땅부터 매입했다. 지자체 문화예술과의 예산 지원과 마을 주민들의 협조도 받으면서 천천히 건물을 지을 기반을 다졌다. 주변에 편의 시설이 거의 없는 게 단점이었지만, 두문불출하며 집필에 매진하는 작가들에게는 어쩌면 최적인 곳이기도 했다.
그나마 근처의 골프장과 캠핑장 덕분에 걸어서 10분 거리에 편의점이 하나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원래는 반년쯤 더 빨리 완공할 계획이었는데 지자체의 예산이 해가 지나 편성되면서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그래도 흔이 투자한 돈 덕분에 큰 차질 없이 1년 반 만에 문학관을 완공할 수 있었다.
“형이 군대에 있을 때 여기서 일주일 동안 야영하면서 훈련한 적 있었어. 그때 저 산에서 바라보는 이 저수지랑 마을이 너무 예쁘더라고. 처음엔 집 짓고 살고 싶단 생각이었는데 너희랑 그 문학관에서 했던 약속을 여기에서 지키고 싶었던 거지.”
흔이 다가와 정서에게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그들의 앞에는 드넓은 부지에 들어선 문학관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서는 문학관의 벽돌 하나하나까지 눈에 담는 듯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그 약속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 그때 갔던 문학관보다 훨씬 큰 거 같은데?”
“부지 350평에 건폐율만 거의 200평이다. 형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느낌이 오냐 자식아. 아무튼 다음 주가 준공식이야. 너도 와라?”
흔이 정서의 머리를 헝클이며 말하고는 나무로 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은도 흔의 뒤를 따라 들어가다가 정서의 어깨를 탁 치며 말했다.
“뭐해. 구경 안 할 거야?”
깨끗하게 정돈된 문학관은 이미 사람을 맞을 준비가 끝나 있었다. 거실과 휴게실, 작가들의 방을 포함한 곳곳이 온통 새 가구로 가득했다. 아직 새집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던 그 순간은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였다.
준공식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잘 치렀다. 흔의 출판업계 지인들과 동료 작가들이 보낸 화분이 가득 놓인 가운데 문학 잡지사와 몇몇 언론에서도 찾아와 인터뷰하고 축하를 건넸다.
예전에 안면이 있었던 문예창작과 교수도 학생들 몇을 데리고 찾아왔다. 과도 다르고 동아리도 1년밖에 하지 않아 자신을 기억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흔이 간략하게 소개하자 놀랍게도 교수는 정서를 금방 기억해 냈다. 지금은 그냥 회사원이 되었다는 말에 교수는 아쉬워했다. 그는 언젠가 다시 글을 쓰게 되길 바란다며 손을 내밀었다. 정서는 수줍게 알겠다 답하고 악수했다. 그때 교수의 말이 지나가는 인사였을지 몰라도 그가 정서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을 땐 분명 응원의 뜻이 느껴졌다.
출장 뷔페를 불러 저녁까지 먹고 모두가 떠난 늦은 시간. 문학관에는 흔과 정은, 정서만 남아있었다. 꿈이자 목표였던 약속을 이룬 기념으로 셋만의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식탁 위에는 각자 준비해 온 와인 두 병씩과 육포, 치즈, 남은 케이크 같은 가벼운 안주가 놓여있었다. 학창 시절에도 주량이 셌던 이들에게는 와인도 여섯 병은 있어야 했다. 지금은 수십 명의 작가가 거쳐 간 1층 주방 테이블에서의 첫 술자리였다.
“당분간은 주에 이삼일은 여기 와서 지내려고.”
흔이 와인잔을 흔들며 말했다.
“형 혼자? 작가들도 없는데?”
“응. 방송 없을 때나 주말엔 여기 와있을 거야. 여기도 이제 사람 지내는 공간인데 작가들 들어오기 전에 손 볼 곳은 미리 봐둬야지.”
전에 갔던 충청도의 문학관은 작가들이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이상을 입주했다. 흔은 운영 방식을 그 문학관에서 많이 따왔다. 다만 올해는 벌써 반이 지나가서 이번엔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만 입주할 작가를 받을 생각이었다. 일종의 시범운영이었다.
“여기서 글 쓰기도 좋잖아. 방해받을 것도 없고. 그리고 집에 사람이 안 살면 금방 망가진댔어.”
정은이 흔을 거들었다. 말은 안 했어도 주말이면 흔과 같이 이곳에 와 있을 생각이었다.
“내년부터는 서울 집도 정리하고 아예 여기 눌러앉아야지.”
흔은 벌써 그때를 상상하는 듯했다.
“문학관에서 아예 산다고?”
정서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무리 이곳이 좋아도 여기서 아예 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흔의 아무렇지 않은 표정에 정서가 다시 말했다.
“기숙사 사감 같을 것 같은데… 여기 프라이버시도 없고.”
무언가 뾰로통한 정서의 표정을 보고 정은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학창 시절부터 툭하면 사악한 표정으로 정서에게 장난을 쳤던 그 표정이었다.
“바보야. 밖에 아직 공사 중인 건물 못 봤냐?”
그러고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건물은 아직 공사 중이었다. 준공식 날인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그냥 창고 같은 건물이려니 하고 넘겼었다.
“거기가… 집이야?”
와인을 마시려다 잔을 내려놓고 정서가 말했다. 친한 형, 누나의 눈에는 정말 장난을 치고 싶은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 여기 부지 용도 정할 때부터 저 집 포함이었어. 그 덕에 복에도 없는 건축법까지 공부했는데 이것도 언젠간 책 쓸 때 도움이 되겠지.”
순간 아까 공사 중이었던 건물의 배경이 떠올랐다. 큰 은행나무 옆 공터에 아담하게 지어진 집 한 채가 자연스럽게 상상됐다. 아마 언젠가 앞에 있는 두 사람의 신혼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니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정작 자신이 몇 년 후 살게 될 줄은 몰랐지만.
“형. 실은 나 이번에 짧게 소설 한 편 썼는데… 한번 봐주면 안 될까?”
정서는 그날 내내 글을 다시 썼다는 이야기를 꺼낼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 말이 툭 나왔는지는 몰랐다. 그냥 당시의 무미건조한 현실에서 벗어나 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 같았다. 그저 이 두 사람이 이곳에서 그려갈 미래에 자신도 담기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예전처럼. 이들과 함께했던 1학년 시절이 정서에겐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으니까.
“응…?”
“네가?”
흔과 정은이 동시에 물었다. 졸업 이후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둘은 더욱 놀랐다. 동시에 반가웠다.
“사실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했어. 회사 3년 넘게 다녔는데 나랑은 안 맞는 거 같고… 형 책들 읽다 보니까 나도 손이 좀 근질근질해 지더라고.”
정서는 조금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서류봉투 두 개를 꺼내 흔과 정은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빼앗다시피 봉투를 채갔다. 봉투 안에는 정서가 쓴 단편이 깔끔하게 제본되어 들어있었다. 흔과 정은은 제본과 정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니, 그냥 프린트만 해서 주긴 뭐해서… 회사 제본실 좀 썼어.”
둘의 반응에 멋쩍은 정서가 괜히 주제를 돌려 말했다.
“야… 이만한 개관 기념 선물이 없다. 잘했다. 응? 잘했어.”
“고생했다. 얘가 이상한 데서 감동을 먹이네. 누난 집에 가서 읽어볼게. 술 마시면 글자가 눈에 잘 안 들어와.”
흔은 책장을 넘겨보고 있었고 정은은 옆에 제본을 내려놓은 채 마저 술을 마셨다.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지만 다른 한 손으로 제본을 매만지는 정은이었다. 그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정서는 조용히 웃었다.
“형한테선 며칠 후에 연락이 왔어요. 주말에 파주로 오라고.”
“좋은 평해주시던가요?”
“그때 워낙 오랜만에 쓴 거라 쓴소리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형이 딱 한 마디 하더라고요.”
“뭐라고요?”
세라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대화에 집중하면 술에 잘 안 취한다더니 세라가 딱 그런 것 같았다.
“장편으로 써 보라고요.”
“나 작법 배운 적도 없는데… 이 단편도 겨우 쓴 거야.”
“이 주에 한 번씩 문학관으로 와서 나한테 배워. 네가 쓴 거 중간중간에 스토리 들어갈 부분이 충분해. 어차피 네 경험이라며.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라면 더 쉬울 거야.”
일주일 전 술을 마셨던 그 테이블에서 흔이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서의 단편을 꽤 자세히 살펴본 듯 펼쳐진 곳곳에는 흔이 밑줄을 긋거나 메모한 흔적이 많았다.
“그래도… 장편은 부담되는데. 다 못 쓰면 어떡해. 쓰는 것보다 완성 못 하는 게 더 무서워.”
그 말을 들은 흔이 잠시 멍하니 정서를 쳐다보다가 이내 어이없다는 듯 피식하고 웃었다. 정서는 그가 왜 웃는지 영문을 몰랐다.
“참 내. 너한테서 그 말을 들을 줄이야.”
“왜… 내가 뭐 잘못 말했나.”
흔은 조금 기죽은 모습이 귀여워서 정서의 머리를 헝클였다.
“홍 교수님 알지? 교수님이 전에 나한테 하셨던 말이야. 그땐 내가 좀 기고만장했었거든. 너 군대 간 이후에 다음 작품 쓰다가 말고 또 다른 거 쓰다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접고 그랬었어. 그땐 어차피 등단도 했겠다 언제든지 또 다음 작품 쓸 수 있다는 자만심이 생겼었나 봐. 근데 사실은 잘 안 써져서 포기한 거였거든. 어떻게 아셨는지 교수님이 어느날 부르시곤 그러시더라. 작가는 완성 못 하는 걸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어떻게든 끝까지 쓰는 근육을 기르라고. 그래야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셨어.”
정서는 진지하게 흔의 사연을 들었다. 끝까지 쓰는 근육… 준공식 때 잠깐 뵌 홍 교수가 해줬다는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
“그러니까 너는 됐다. 그 마음이면 충분해. 형이 도와줄 테니까 한번 해보자. 이거 장편으로 나오면 진짜 재미있을 거야.”
이번엔 정서의 등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그만한 응원이 없었다. 전에 남들은 다 따돌렸던 동아리 때도 지금도, 흔은 정서에게 가장 든든한 멘토이자 친형 같은 존재였다.
“알았어. 해볼게. 형.”
정서의 나이 어느덧 서른한 살. 거의 십 년 만에 보는 정서의 의지가 깃든 표정이었다. 그날 흔은 참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이후로 정서는 격주로 주말마다 꼬박꼬박 문학관을 찾아갔다. 2주 동안 쓴 글을 수요일쯤 미리 흔에게 메일로 보냈고 흔은 세심하게 살폈다. 흔 본인도 집필하느라 신경 쓸 틈이 없을 텐데도 매번 소홀함이 없었다. 정서는 그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근데 나 때문에 형 쓰는데 차질 생기는 거 아니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형 거의 매년 책 내느라 형 거 쓸 시간도 부족할 텐데… 내 거 봐주느라 형 그만큼 못 쓰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날의 수업이 모두 끝나고 저녁을 먹을 때 정서가 말했다(정서는 흔과의 비평 시간을 수업이라고 생각했다). 7년 전 가을로 접어들 무렵 오늘 세라와의 술자리처럼 테라스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흔이 고기를 집어 쌈을 싸다가 말고 대답했다.
“너 국문과나 문창과 애들이 대학 때 왜 수업에 삼분의 일 이상을 비평하는 데 쓰는지 알아?”
“아니, 몰라.”
“다른 사람 글을 비평하면서 자기 글도 느는 거거든. 잘 쓴 글에서만 배우는 게 아니라, 안 좋은 글을 보면서도 배우는 거야. 비평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좋은 거고 비평 해주는 사람도 그 과정에서 같이 발전하는 거지.”
정서가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난 사실 비평이 조금 부담돼. 못 썼다고 혼나는 느낌이야. 형이나 누나가 해주는 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한테 안 좋은 소리 들으면 힘들 것 같아.”
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처음이라 그래. 괜찮아. 물론 비평이 아니라 비판만 하는 사람도 있긴 한데 그런 것들도 잘 걸러내면서 받아들이는 법도 터득하게 돼. 물론 속은 좀 상하겠지만 가끔은 그런 악플 같은 비평에서도 배우는 때가 있어. 작가는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야.”
말을 마친 흔이 술잔을 들어 정서와 건배하고 호쾌하게 술을 털어 넣었다. 물로 입가심한 흔이 말을 이었다.
“여러 사람이 같이 하면 좋긴 한데 그래도 넌 지금 전문 작가가 일대일로 봐주잖냐. 감사히 여기거라.”
“넵. 스승님. 한잔 받으시지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흔에게 장단을 맞춰 농담과 술을 주고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그리운 나날이었다. 회사 생활은 여전히 재미없었지만 문학관에 다니면서 정서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퇴근 후 피곤함이 가득하다가도 가만히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쓰면 다시 충전되는 것 같았다.
확실히 글이 점점 좋아지는 느낌도 들었다. 처음에는 비평을 위해 흔이 표시해 놓은 부분이 매 쪽마다 빽빽했다. 흔이 준비한 프린트를 보자마자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평 부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표시가 쪽당 3개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쯤 수업을 마치고 흔이 말했다.
“이제 너도 내 글 비평해도 되겠다.”
“내가?”
정서가 놀라 물었다. 흔의 글은 무엇이든 다 재미있고 좋았었는데 자기가 감히 흔의 글을 비평한다니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당연하지. 비평은 같이하는 거라고 했었잖아. 아무리 베테랑도 막힐 때가 있는 법이야. 지금 정도면 너도 할 수 있어.”
“형 글은 다 좋은데…?”
뚱하게 말하는 정서에게 흔이 꿀밤을 한 대 먹이며 말했다.
“인마, 무조건 좋은 글이 어딨어. 나도 너처럼 2주 동안 쓴 거 보낼 테니까 앞으로 무조건 하나 이상 짚어내. 알았지?”
“아니 그래도… 차라리 작법 같은 걸 알려주지…”
흔이 한 번 더 쥐어박으려 하자 정서가 몸을 움츠리는 시늉을 했다.
“야. 내가 너랑 지금 이거 하면서 작법 알려준 적 있냐? 넌 지금 와서 작법 배우면 오히려 역효과야. 작법 배운 적 없어도 감 좋은 사람들은 잘 써. 앤디 위어 같은 사람 봐봐. 엔지니어 출신이 <마션> 같은 작품 쑥쑥 써내잖아. 너도 비슷해.”
그땐 자신이 어떤 글을 쓸지 미처 몰랐던 정서는 흔의 말을 듣고도 계속 꿍얼거렸다. 자기 말을 잔소리처럼 듣는 정서에게 살짝 열받은 흔이 한숨을 쉬더니 손가락 관절을 꺾기 시작했다. 이상한 조짐을 느낀 정서가 슬슬 자리를 피하더니 흔이 일어나자 잽싸게 튀었다.
“너 일루 안 와?!”
말 안 듣는 동생의 교육을 위해 흔은 한동안 정서를 잡으려 온 문학관을 뛰어다녀야 했다.
“풉. 톰과 제리도 아니고. 찐 형제 같네요.”
그날의 일을 들은 세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잡혀서 헤드락 당하고 하라는 대로 했죠. 작가가 무슨 힘이 그렇게 센지…”
“그런 선배, 멘토가 있는 것도 복이에요.”
“지금도 옆에 있으면 좋겠어요.”
즐거웠던 추억에 모처럼 웃은 정서가 다시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해 우리는>이라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유명해지고 돈 많이 벌면 세상이 꼭 그만큼 세금을 걷어간다고…”
좋은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흔에게 일이 생겼다.
“형. 괜찮아? 이번 주는 그냥 쉬어도 되는데.”
“됐어. 그건 그거고. 인마, 넌 쉴 생각 하지 말고 내일 늦지 않게 와.”
정서는 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걸렸다. 흔은 별일 아니라는 듯 호쾌하게 말했지만 인터넷 뉴스 창에 뜬 기사 제목들은 확실히 ‘별일’이었다.
흔이 두 번째로 쓴 SF 소설이 표절 의혹에 휘말렸다.
문학관에서 여느 때처럼 수업할 때도 흔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괜히 정서가 더 눈치를 보는 게 걸려서 흔이 또 한 대 쥐어박았다. 그래도 창작자에게 표절 시비가 얼마나 큰 이슈인지 알기에 정서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수업을 마친 후 저녁 먹는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물었다.
“언론이랑 인터뷰했다는 게 그 형이지? 형 동기 김성규 선배.”
“응. 걔 맞을걸?”
정서도 아는 사람이었고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성규는 부모님이 모두 등단한 작가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교수 몇 분이 그의 부모님과 안면이 있었고 성규에게 부모님 안부를 물을 때마다 괜히 주변을 의식하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다. 부모님이 돈도 좀 벌었는지 성규는 학생 때부터 차를 끌고 다닌 몇 안 되는 사람이어서 다른 의미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또한 그는 동아리 시절 정서가 비전공자라고 왕따를 주도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교내 공모전에서 3등을 한 정서의 옆에 서있었던 4등 수상자였다. 비전공자인 정서가 자기보다 위에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시상식에서도 표정이 좋지 않았고 따돌림은 더 심해졌다. 그런데 정서가 3등까지 주어지는 특전을 마다하고 동아리에도 나오지 않더니 그냥 취업을 준비하자 김성규의 분노는 더했을 것이었다.
김성규가 정서에게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건 아니었다. 성규는 흔을 시기했다. 통상 3학년이 맡던 동아리 회장 자리에 이른 나이에 등단한 흔이 회장을 맡은 것에 불만이 많았다. 성규 또한 교수들에게 글 좀 쓴다는 칭찬도 많이 받았고 성적도 좋았었다.
스스로 과에서 손꼽히는 필력이라 자부하곤 했었다. 그런데 홍 교수가 최흔을 예뻐하며 어딜 가든 항상 데리고 다니자 점점 흔을 질투하게 됐다. 어쩌면 질투를 넘은 감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자존심이 세다고 하던가. 성규가 꼭 그랬다. 성규는 동아리에서 흔과 사사건건 부딪쳤다.
대부분 흔을 잘 따르는 부원들이 더 많았다. 아직 학생 신분에 등단한 이력은 둘째치더라도 흔은 원래 인기가 많았다.
성규는 자꾸 술자리를 만들었다. 선배, 동기, 후배 가리지 않고 술자리에 사람들을 불렀다. 부모님이 준 용돈은 그런 술값을 감당하기 충분했다. 돈 없는 학생들 사이에서 ‘내가 살게’라는 말의 힘은 컸다. 그는 그런 식으로 자기편을 만들고 있었다. 흔이 인기가 많은 것도 알고 있던 성규는 사람들 앞에서 굳이 그의 욕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기도 흔 못지않게 실력도 있고 돈도 많고 리더십도 있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
1차고 2차고 술값을 계산할 때 사람들의 ‘우와’ 하는 탄성이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걸 너무 드러내지 않고 우쭐해 보이지 않으려는 영악함도 있었다. 흔과 정은, 정서와 몇몇을 제외하고 동아리 부원 대부분이 그에게 술과 밥을 얻어먹었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다음 해 동아리 회장에는 성규가 뽑혔고 졸업할 때까지 회장직을 지켰다.
정서가 전역 후 다시 찾아간 동아리에서 전과 다른 분위기를 느낀 것은 성규의 영향도 있었다. 동아리방 앞에서 다른 과 학생의 가입을 받지 않는다는 빛바랜 게시물을 봤을 때는 두 눈을 의심했다. 공지 날짜는 정서가 입대한 해였다. 흔과 정은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봤던 동아리방 앞에서 걸음을 돌렸다. 학생회관을 나오던 길에 성규와 동아리 부원들을 마주쳤다.
성규는 정서를 잠시 흘겨보다가 시선을 돌려 부원들과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며 지나갔다. 보라는 듯 과장된 행동에 담긴 의미를 눈치 못 챌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몇몇 안면이 있던 다른 부원들도 정서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쌩하니 지나갔다. 이후 정서는 다시는 학생회관에 가지 않았다.
“형 진짜 괜찮아? 뭐라도 반박하거나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거참, 말 많네. 밥이나 먹자?”
여전히 그 주제의 대화를 피하는 흔이 답답했다. 그날 정서는 처음으로 흔 앞에서 언성을 높였다.
“왜 가만히 있냐고! 그 아이디어 훔친 게 아니라 그냥 동아리 비평 자리에서 다 같이 공유하던 거였잖아. 그리고 형 스타일대로 써서 아예 다른 작품이 된 거잖아.”
흔이 씩씩대는 정서를 바라보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처음 보는 동생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가 이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식, 다 컸네.”
정서는 다시 말하려다가 흔이 술을 따라주려는 바람에 화를 내다 말고 가만히 잔을 들어 내밀었다.
“형이 바보냐. 기사 나오기도 전에 출판사에서 알려줬어. 난 당연히 학생 때 동아리에서 공유된 아이디어였을 뿐이라고 말했고. 성규 그놈이 이제 와서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곧 출판사에서 입장 발표할 거야.”
“그 사람이 냈던 아이디어랑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됐는데 이게 표절이야? 아니, 학생 때부터 그러더니… 그 사람은 대체 왜 그럴까? 형한테 무슨 자격지심이라도 있대?”
“지도 등단했는데 책은 안 팔려서 배알이 꼬였나 보지. 몰라. 더 이상 걔랑 엮이기 싫어. 됐지? 이제 그 얘기 그만.”
흔이 질색하자 정서도 더 이상 그에 관한 말을 더 하지 않았다. 흔은 예전부터 성규와 엮이는 걸 싫어했다. 동아리 회장을 넘길 때도 오히려 이제 글 쓰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겠다며 미련 없이 넘겼었다. 이번에도 그가 큰 스트레스 없이 잘 넘길 거라 생각하고 조금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성규는 최흔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단순히 공유된 아이디어를 쓴 게 아니라 명백한 아이디어 도용과 표절이라며 인터뷰했다. 보다 못한 정은이 나서 그때 동아리에 있었던 다른 부원들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나서지 않았다.
결국 소송으로까지 사태가 번졌다. 여론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생기자, 흔은 더 이상 집필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그 아이디어가 뭔데요?”
어느새 정서의 이야기에 몰입한 세라가 물었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조금 더 다양한 장르를 다뤄보자는 취지로 만든 세미나였어요. 요즘은 사람들이 웹소설을 더 많이 읽잖아요?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그때 전공자들은 순수문학을 고집하던 경향이 있었어요. 흔이 형이 회장을 하면서 앞으로는 장르에 치우치지 말아야 발전할 수 있다며 처음 시도해 본 거였죠. 처음엔 반발도 조금 있었는데 직접 해보니 나중엔 부원들도 잘 참여하게 됐어요. 오히려 그 덕에 지금 웹소설 쪽에서 잘나가는 선배들도 있고.”
흔은 격주로 주제를 나눠서 다양한 아이디어와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날의 장르는 SF였다. 공상과학이라고 해서 남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어떤 여학생은 SF에 로맨스를 결합한 아이디어로 꽤 좋은 반응을 받기도 했다. 한번 물꼬를 틔우자 한창 꽃피우는 젊은 학생들답게 온갖 상상력이 터져 나왔다.
인간들이 전쟁과 환경오염 등으로 지구가 피폐해졌을 때 나타난 정령들의 이야기로 인류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내용도 꽤 재미있다는 반응을 얻었다. 의외로 성규의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상상만 해봤을 뿐 SF에는 자신 없다며. 누가 하든 이 내용으로 먼저 쓰는 사람이 아이디어 임자라고 말했었다. 오히려 누가 쓰든 잘 써주길 바란다는 덕담과 함께, 분명 그날 동아리 세미나는 훈훈한 분위기로 마쳤다.
“그래 놓고선 당시 오 년도 더 지난 일을 가지고 흔이 형을 공격했던 거예요.”
“전 표절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건 가져다 쓰라고 공개적으로 허용한 건데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요?”
“나중에 정은이 누나한테 들은 건데 다른 이유가 있었죠. 그리고 흔이 형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보고 영감을 얻었어요. 김성규의 아이디어를 차용 한 건 맞는데 기획 의도부터 완전히 다른 내용이에요. 사실 형도 무의식적으로 쓴 거였죠.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걸 도둑맞았다고 보진 않아요. 결과도 흔이 형이 이겼고… 그런데 그동안 형은 소송에 시달리면서 지칠 대로 지쳤어요.”
흔은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자기 작품의 진도는 나가지 못해도 정서와의 수업은 빼놓지 않고 했었다. 그런데 소송이 2년째 진행되면서 지친 흔이 수업을 쉬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흔은 무의식적 도용이나 단순 아이디어 참고 등 해외 사례를 들어 여러 근거를 제출했다. 법정에서도 최흔 쪽에 손을 들어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표절 시비에 능통한 변호사를 대동한 성규 측의 집요한 응수에 법정도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흔은 성규에게 몇 번 말이라도 걸어보려 했었다. 그때마다 성규는 변호사를 방패로 삼아 흔을 본체만체 하곤 했다.
세라가 무거운 분위기에 고개만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자 정서가 말을 이었다.
“김성규 그 사람은 흔이 형을 시샘하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