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담 장편소설
세라는 문학관에서 오랜만에 푹 쉰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태프라고 해도 세라가 딱히 할 일이 많진 않았다. 아침, 점심은 작가들이 자기가 먹은 것은 알아서 치웠고 청소 당번도 정해져 있었다. 처음에 세라가 주로 한 일은 식재료 관리였다. 아직 작가들이 일을 맡기지 않아서 세라는 심심했다. 일이 너무 없어서 그나마 정서가 관리인으로서 하던 식재료 관리 일을 억지로 빼앗았다. 그마저도 안 하면 자꾸 다른 생각이 날 것 같았다. 세라는 아직 도망 중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래도 되나 싶은 느낌이 들 정도로 세라는 마음이 편안했다. 예전 슬럼프를 겪을 땐 답답하고 갇혀있는 느낌이었다. 반면 지금은 자의는 아니었으나 온전한 휴식이었다.
정서로서는 세라가 부족하다고 적어주는 식재료만 사고 저녁밥만 지으면 되니 나름 편해졌다. 다만, 한번은 세라가 찌개를 끓였는데 이후로 세라가 요리하려고 하면 다들 말렸다.
세라는 문학관에 온 지 삼 일째에 겨우 용기 내어 휴대폰을 켰다. 금요일 첫 파티를 한 다음 날이었다. 숙취로 고생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전원을 켜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밀린 알림을 한 번에 토해내듯 진동이 끊임없이 울렸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1층으로 내려왔다.
마침 정서와 덩치가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해장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문학관에는 일찍 일어나는 자만 제대로 된 해장을 한다는 불문율도 있었다. 늦게 일어나면 자기들끼리 라면을 끓여 먹든 해야 했다. 열한 시에 출발하는 ‘해장행 차량’에 가까스로 합류한 혜리까지 넷은 근처 국밥집에서 속을 달랬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덩치와 정서가 유일하게 잘 맞는 것이 해장 철학이었다.
덩치는 짬뽕이니 마라탕이니 그런 매운 음식들은 오히려 속을 망친다며, 뜨끈한 국물에 밥을 말아 먹는 국밥에 대한 예찬론을 늘어놓았다. 세라는 설렁탕같이 그나마 얌전한 메뉴를 고를 거라 생각하던 그들의 예상과 달리 내장탕을 시켜 싹 비웠다. 덕분에 사람들은 여배우에 대한 편견과 환상을 깰 수 있었다.
잘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인연을 맺은 세라는 거리낄 것이 없어 보였다.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돌아오는 길에 덩치는 운정역에서 내렸다. 그는 아무리 글이 밀려도 주말엔 항상 가족에게 가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켰다.
문학관으로 돌아온 세라는 잠시 방문 앞에서 망설였다. 침대 위에 던지다시피 두고 온 핸드폰에 어떤 연락이 와 있을지 궁금하면서도 긴장됐다. 핸드폰은 밀린 업무를 다 처리했는지 조용했다. 기분 탓인지 쇳덩어리 주제에 괜히 지쳐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다. 폰을 손에 쥔 채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겨우 용기 내 화면을 켰다.
다행히 기자들이나 모르는 번호보다는 걱정을 묻는 연락이 더 많았다. 당분간 폰을 꺼둔다고 했음에도 부모님 전화가 예닐곱 통 정도 와 있었다. 찍힌 부재 전화만 이것뿐이지 아마 속으로는 곱하기 열 번은 더 하셨을 분들이었다. 서 대표와 장원의 전화는 수십 통이 찍혀 있었다.
그때야 자기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떠오른 세라는 얼른 전화를 돌렸다. 기사를 본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고 기자 몇이 본가까지 찾아왔더라는 소식엔 직업정신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회사 배려로 조용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다며 안심시켜 드렸다.
서주희 대표와 장원은 연락이 두절 된 며칠 동안 세라가 어떻게 된 건 아닌지 더 안달이 나 있었다. 서 대표가 처음으로 세라에게 큰소리로 혼을 냈다. 그런데도 세라는 그게 걱정에서 나오는 화라는 게 느껴져 한편으론 따뜻함을 느꼈다.
서 대표는 자초지종을 다 듣고는 오히려 잘됐다며 당분간 문학관에서 지내는 걸 허락했다. 정서와 문학관에 대해서는 그가 얼마 전에 찍은 드라마의 원작자이고 촬영하다가 친해진 사이라며 둘러댔다. 매사 꼼꼼한 서 대표인데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바로 그다음 날 장원이 문학관으로 찾아왔다. 세라는 그를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봉변은 자기가 더 당해놓고 자기는 매니저 자격도 없다며 한참을 울먹거렸다. 덩치도 큰 사람이 아이처럼 우는 모습에 사정을 아는 정서와 몇몇 작가들은 웃음을 삼켰다. 장원은 정서를 보더니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다며 정서를 난처하게 했다. 윤 피디에 이어 올해만 두 번째로 좁디좁은 정서의 인간관계를 비집고 들어간 사람이었다.
겨우 진정된 장원은 이번엔 조금 머뭇거리며 민감한 이야기를 전했다. 세라가 다음에 출연하기로 예정됐던 최하늘 작가의 드라마에 예지가 다시 들어가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한창 주가를 올려야 할 타이밍인 세라에겐 아쉬운 일인 만큼 장원은 세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사실 지금은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가는 게 득 될 것이 없다는 서 대표의 생각이었다. 다른 스캔들이었다면 한 달도 안 되어 대중의 관심은 식었겠지만 기민서라면 달랐다.
“괜찮아요. 그러죠. 뭐.”
세라는 소식을 듣고도 예상외로 무덤덤했다. 오히려 문학관에 온 김에 조금 더 쉬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던 참이었다. 같은 회사 노년의 대선배는 후배들에게 항상 이렇게 조언했었다.
“배우는 쉬고 있을 때 어떻게 보내면서 다음을 준비하느냐가 가장 중요해.”
이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지내고 무엇을 얻을지 아직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안식년 같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장원에게서 바뀐 번호의 새 핸드폰을 전달받은 후에야 세라는 온전히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로는 장원도 매주 한두 번씩은 문학관이나 책방으로 발 도장을 찍으며 세라를 살폈다. 가끔은 금요일 파티에 장원이 낀 적도 있었고 작가들과 함께 거나하게 취하기도 했다. 특히 야구 에세이를 쓰는 선호와 죽이 잘 맞았다.
장원은 세라가 문학관에서 지내면서 예전보다 점점 밝아지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통해 세라의 안부를 확인하던 서 대표도 안도했다. 스캔들 사건은 양측 회사에서 할 일은 다 한 상태였다. 시간만 지나면 팬들도 가라앉고 세라는 적절한 타이밍에 지금처럼 좋아진 모습으로 복귀하면 될 일이었다.
문학관의 오전은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이었다. 어떤 작가는 이른 아침부터 집필에 열중했고 어떤 작가는 밤새 쓰다가 동이 트면 잠을 청하곤 했다. 처음엔 세라를 챙기려 책방에도 가지 않았던 정서는 나흘째부터 다시 책방으로 출근했다. 스태프 일이 많지도 않았고, 이 큰 건물에서 밥시간을 빼면 더없이 조용하게 혼자 보내는 시간은 금방 무료해졌다. 저수지와 마을 산책을 다녀오기도 하고 낮잠도 잤는데 여전히 뭔가 허전했다. 세라는 대선배가 조언해 준 것처럼 자기만의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테라스는 문학관에서 세라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처음 왔을 때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테라스 난간을 따라 폴딩 통창이 둘려 있었다. 정서는 벌레가 많은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는 창문을 쳐놓는다고 했다.
그래도 창문을 열 수 있는 곳마다 방충망이 설치되어 있어서 바람은 잘 통했다. 누가 설계했는지 꼼꼼하게 신경 쓴 부분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여름에도 벌레 걱정 없이 야외 느낌을 내며 술 한잔하기도 좋을 것 같았다. 밤에 전구 조명까지 켜면 영락없이 캠핑 분위기였다.
햇빛이 쨍한 여름의 낮에도 테라스는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했다. 문학관에서 바라보는 풍경만큼은 오랜 시간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풍경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에 평안했다. 이른바 ‘풍멍’이었다. 어느 날부터 세라는 테라스에 나와 풍경을 즐기거나 소일거리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지금도 테라스 벤치에서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새끼 제비들이 짹짹거리는 소리도 백색소음처럼 편안했다. 자연에서 나는 소리는 귀가 피곤하지 않았다. 주변을 부리나케 나다니는 아빠 제비가 눈에 들어올 때면 세라는 조용히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저… 세라 씨? 잠깐 시간 돼요?”
오후 두 시쯤 정서가 추천해 준 책을 한창 읽고 있는데 테라스 문이 살짝 열렸다. 근영이 한 박자 늦게 고개만 빼꼼 내밀고 세라에게 말을 걸었다.
“아, 네. 괜찮아요. 뭐 도와드릴 거라도…?”
정서가 세라를 처음 소개한 날 작업이 급하다며 먼저 들어갔던 근영은 알고 보니 세라와 동갑이었다. 대화는 많이 못 나눴어도 유일한 또래인 그를 편하게 대하게 됐다. 이근영은 4년 전 신춘문예에 당선된 소설가였다.
이후 계속 단편만 썼던 그는 이번엔 처음으로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문학관에 입주했다. 지난 술자리에서 시놉시스를 완성하는 데만 석달이 넘게 걸렸다던 근영의 얼굴엔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럼에도 눈이 반짝반짝했던 그는 그만큼 열정적으로 글을 써내려 가고 있었다.
괜찮다는 세라의 말에 근영이 출입문을 밀고 들어왔다. 근영은 손에 들고 있던 A4 용지 한 다발을 링으로 제본한 책자를 내밀며 말했다.
“저, 그럼 혹시 이것 좀…”
무심코 받은 책자의 겉표지에는 근영이 쓰고 있다는 소설의 제목이 써 있었다.
“어? 이거 작가님이 쓴다는 책 아니에요?”
“맞아요. 아, 그게… 처음 오신 날 비평 해주기로 하셨던 거 부탁 좀 드리려고…”
수줍음이 많은 근영이 조금 쭈뼛거렸다. 세라가 의외라는 듯 말없이 바라보자, 근영이 얼른 말을 이었다.
“아 저, 그… 부담 안 가지셔도 돼요! 그러니까… 제가 장편은 처음이라 다른 분들한테 부탁드리기엔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다들 자기 거 쓰느라 바쁘시기도 하고… 그냥 읽어보시고 독자 입장에서 어떤 점이 좋은지, 어디가 부족한지 정도만 편하게 말씀해 주셔도 돼요.”
다급하게 말을 내뱉은 근영이 세라의 눈치를 살폈다. 세라는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싫으…세요? 아, 혹시 다른 작가님 거 보는 중이신가…”
세라가 반응이 없자 근영은 당황했다. 사실 근영은 한창 결말 부분을 쓰다가 막힌 상태였다. 여태 쓴 글을 결말로 자연스럽게 넘기고 끝을 어떻게 맺을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몇 번 다시 읽어봤지만,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하던 때에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세라를 떠올렸다. 글과 관련이 없는 그녀라면 부담 없이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테라스로 찾아온 것이었다.
생각에 잠긴 듯했던 세라가 근영의 다급한 말에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죄송해요! 아니요. 싫은 게 아니라 아직 아무도 맡기신 분이 없어서 놀라서 그랬어요. 너무 좋아요. 열심히 읽어볼게요!”
그녀는 근영이 혹여 다시 가져가기라도 할까 봐 얼른 책자를 끌어안고 말했다.
“다행이네요. 아직 초고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에요. 결말이 미완성인데 쓰다가 막히는 바람에 대충 마무리 한 거니까 감안하고 봐주세요. 그리고 혹시… 좋은 생각 떠오르시면 도움 부탁드릴게요.”
그는 마지막 말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 잘 읽어볼게요.”
근영이 돌아가고 세라는 책자를 살폈다. 깔끔하게 제본된 책자 표지에는 <걷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집게로 집어서 줘도 됐을 텐데 읽기 편하게 스프링으로 제본한 근영의 배려가 느껴졌다. 탕비실 옆에 있던 복사기와 각종 인쇄 용품의 용도를 이제 알 수 있었다. 세라는 읽던 책을 방에 두고 늦은 점심을 시리얼로 해결한 후 근영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가 쓴 책은 제주도 올레길을 다룬 소설이었다. 등단 이후 제주도 한달살이를 했다던 근영은 올레길을 걸으면서 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했다. 내용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스물일곱 개의 올레 코스를 걷다가 만난 여섯 명과의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이었다. 첫 장을 넘기고 어느새 그녀는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었다.
세라는 신인 시절 대본이 해질 정도로 꼼꼼히 읽고 작품과 인물에게 몰입하곤 했었다. 단역에 대사가 몇 줄밖에 되지 않아도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예 자기 배역과 연관이 있는 다른 캐릭터의 대사까지 외운 적도 많았다.
그러고는 촬영장에서 그 배역을 맡은 배우가 연기할 때 따라서 속으로 연기하기도 했다. 나중에 조연이 되고 언젠가 주연으로 올라설 때를 대비한 세라만의 연습 방법이자 그녀의 장점이었다. MBTI를 검사하면 항상 I와 F는 변하지 않았던 만큼 공감력도 좋았다. 때론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라고 생각하며 주인공을 응원하기도 했고 자신과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하면 순식간에 공감했다.
근영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세라는 주인공이 비 오는 날 3번 코스에서 만난 ‘수미’라는 인물에게 애정이 갔다. 수미는 항상 자신감 넘치고 당당해서 친구 리나가 떠올랐다. 여자 혼자서도 올레길을 척척 걸었고 게스트하우스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인생의 답을 찾으러 올레길을 걸으러 온 주인공은 수미를 만나 4개의 코스를 같이 걸으며 그녀의 당당한 매력에 점차 매료됐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함께 걸을 수 없었다. 제주시의 18번 코스부터 시작해 이제 절반을 걸은 주인공과 달리 수미는 서귀포의 7번부터 시작해 6번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여정은 끝났다. 둘은 6번 코스 종점인 ‘올레 스테이’에서 아쉬운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술 한잔을 마셨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두려울 것 없을 것 같은 수미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지난 2년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목표를 달성한 기념으로 제주도에 온 것이었다. 이후는 주인공이 남은 절반의 코스를 걸으며 인생의 해답을 얻고 육지로 돌아와 수미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였다. 조금 뻔한 클리셰도 있었는데 그걸 딱히 지적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의 글은 좋은 소재와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가 강점이었다.
읽다가 조금 아쉬운 부분은 접어서 표시를 해놨는데 표시한 부분이 몇 개 없을 정도로 책은 완성도가 높았다. 일단 내용이 재미있었다. 올레길과 오름에서 내려다본 제주의 풍경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직접 가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반쯤 읽었을 땐 펜과 노트를 들고 와서 중간중간 메모하며 읽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라는 저녁도 빨리 먹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기를 개수대에 내려놓고 커피를 챙겨 가려 할 때 이상함을 눈치챈 정서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어요? 뭔가 급해 보이시는데.”
“저도 일이 있거든요? 비밀이에요.”
세라는 괜히 비밀이라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특별한 일도 아니고 정서가 알아도 상관없는 일인데도 괜히 장난을 치고 싶었다. 살짝 삐진 것 같은 정서의 표정이 재미있어 웃음을 참고 얼른 방으로 돌아왔다. 세라는 근영이 부탁한 일을 얼른 끝내고 싶었다.
사실 그녀는 하는 일이 없어서 식객이 된 기분이 없잖아 들던 차였다. 그래서 작가들이 얼른 비평을 맡겨주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들어온 근영의 부탁이 반가웠다. 처음 받은 일이니 잘하고 싶었다. 작가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리고 정서에게도.
세라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작업을 시작했다. 표시해 놓은 부분을 펼치고 노트에 적은 메모를 보면서 느낌을 되살렸다. 그리곤 정성스럽게 쓴 포스트잇을 붙였다.
— 이 부분은 설명도 괜찮긴 한데 대화를 넣으면 긴장감이 더 생생할 것 같아요.
— 주인공이 길을 잃고 헤매다 다시 찾아가는 과정에서도 주인공의 과거 회상과 함께 심리 묘사가 들어가면 어떨까요? 더 입체적일 것 같아요!
— 육지에서 주인공이 수미를 찾으러 나섰다가 너무 우연히 만나게 된 것 같아요. 뭔가 다른 장치가 있으면 더 극적일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원래 산을 싫어해서 올레길도 고생했던 주인공이 수미가 자주 간다고 말했던 북한산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거라든가? 이건 작가님에게 맡길게요. ^-^
세라는 메모를 몇 번씩 고쳐가며 최대한 좋은 말로 다가갈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 혹시 사소한 말투 하나에도 근영이 상처받지 않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전에 정서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비평이 아닌 비판을 하다가 서로 주먹질까지 오갔다던 예전 작가들의 이야기였다.
물론 때로는 크게 무너져 보고 다시 일어서는 게 더 좋은 약이 될 수도 있었다. 세라도 슬럼프를 겪은 이후 연기의 깊이가 더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나중에 훈장이 될 흉터라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세라는 밤이 오래도록 펜을 꾹꾹 눌러쓰며 메모를 남겼다.
세라는 한때 촬영장에서 엄청난 질문을 쏟아냈었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대본을 보며 연습할 때 궁금한 게 생기면 작가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질색하며 귀찮아하는 작가도 있었다. 그래도 그런 모습을 기특하게 여겨 세라를 눈여겨본 작가들이 더 많았다.
감독이라고 세라의 질문 공세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종종 배우의 의견을 폭넓게 받아들이는 감독의 작품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어떤 배역이든 금방 몰입하는 세라는 그럴 때마다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떤지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기도 했다. 서 대표는 그런 세라가 아직 조연인 건 그저 운이 없었을 뿐 실력은 최고라고 응원을 보냈다.
정말 운이 없긴 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 쓸 때마다 히트했던 권종선 작가가 어쩌다 처참한 성적을 낸 작품에 들어간 건 가장 마지막이었다.
첫 조연 작품은 재미는 있었는데 동시간 대 다른 드라마에 스타 배우가 나와 밀렸다. 두 번째는 드라마가 역사 고증 오류로 엄청난 질타를 받으며 쫄딱 망했다. 여태 조연으로 출연한 세 작품이 모두 그렇게 망했다.
권 작가 때문에 뜨기도 전에 은퇴까지 할 뻔했다. 슬럼프 시절 우울감에 스스로를 짓눌렀던 세라의 감정은 윤 피디와 정서의 작품을 찍으면서 원래의 풍부한 감수성이 조금씩 드러났다. 정작 본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근영의 소설에 대한 비평을 적는 동안 세라는 즐거움을 느꼈다. 그렇게 그녀는 점점 회복하고 이곳에서만큼은 평안함을 느꼈다.
근영에게 비평을 담은 책자를 다시 돌려준 건 다음 날 오후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쓴 내용을 한 번 더 점검하고 마침 점심을 먹고 방으로 가려던 그에게 바로 전달했다. 하루도 채 안 지난 시간에 받은 비평을 본 근영은 얼떨떨했다. 그는 원래 글이 막힌 김에 세라의 비평을 핑계로 며칠 쉬려던 생각이었다.
그런데 세라가 포스트잇에 쓴 메모를 보자마자 당장 글을 쓰고 싶은 욕구와 영감이 샘솟았다. 속는 셈 치고 한 부탁이었고 크게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세라가 메모로 남긴 비평을 읽을수록 근영은 깜짝깜짝 놀랐다. 그녀는 독자이자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입장으로 작가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
결말 부분에 남긴 힌트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근영은 오전에 하다가 밥 먹느라 잠시 내버려 둔 게임 화면을 껐다. 꽤 오랫동안 근영의 방에서는 타이핑 소리만 공간을 메웠다.
“근영이가 엄청 감동했던데요?”
“정말요?”
“네. 아까 잠깐 얼굴 보고 왔어요. 고맙다고 전해달래요.”
“다행이다… 그 후로 얼굴을 못 봐서 혹시 제가 잘못했나 싶었어요.”
저녁을 먹고 휴게실에서 쉬던 세라에게 정서가 차를 건네며 근영의 소식을 전했다. 근영이 결말 완성을 앞두고 방에서 나오지 않은 걸 오해하고 있던 차에 세라는 꽤 신경이 쓰였던 듯 소식을 듣고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근영이가 한번 필 꽂히면 밥도 제때 안 먹고 작업만 하더라고요. 저도 이틀째 못 본 것 같아서 걱정돼서 잠깐 들어가 봤죠.”
“그런데 왜 저한텐 아무 말도 안 하시고… 힘들게 썼을 텐데 상처 준 건 아닌가 싶어서 진짜 걱정했단 말이에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세라를 보고 정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작가들이 그런 경향이 있죠. 뭔가 영감이 떠오르면 놓치기 싫어서 다른 거 생각이 안 나요. 원래 영감이라는 놈이 뒤돌아서면 금방 까먹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초고 완성하면 나타나서 감사 인사 할 거예요.”
“눈은 퀭한 채로요?”
“아마도요? 다크서클이 푸바오 저리 가라일 수도.”
정서가 손을 둥글게 말아 눈에 대고 판다 같은 시늉을 했다. 세라가 풉 웃었다. 요즘 그의 표정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금방 들통날 거 그때 그냥 알려주지. 비밀로 하기 있어요?”
정서가 말을 이었다. 조금 섭섭하다는 표정이었다.
“아, 그냥… 제가 평론가도 아닌데 조금 민망했죠. 근영 씨가 처음 맡긴 거라 잘하고 싶기도 했고요. 결과가 좋으면 그때 말하려고 했어요. 미안요!”
“근데 생각보다 잘했던데요? 장점은 치켜주고 단점은 잘 돌려쓰고. 꽤 꼼꼼하게 하셨던데.”
“그걸 읽어봤어요?”
세라가 눈이 동그라진 채 놀라 물었다.
“조금요. 근영이가 마저 써야 한다고 얼른 나가라고 해서 끝부분만 살짝?”
“보면 어떡해요! 나 잘 못한 거 같은데. 아이 정말 그걸 왜 봤어요…”
손사래를 치며 호들갑을 떠는 세라가 귀여워 정서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잘했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근영이가 감동 먹었다고.”
“진짜요…?”
세라는 못 믿겠다는 눈으로 찡그린 얼굴로 정서를 쳐다봤다.
“잘할 줄 알았어요. 엄청 신경 써서 쓴 게 다 보이더라고요.”
“아, 그냥… 씬 구분 없는 대본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어요. 대본처럼 대사가 많진 않아도 소설의 서사를 지문(地文)이라고 치고 봤죠.”
“그랬구나. 어쩐지. 저도 한번 부탁드려 보고 싶던데요?”
“정서 씨도 비평 싫어하는 쪽 아니었어요?”
“그랬죠. 그래도 세라 씨라면 제 것도 한번 보여드리고 싶네요. 메모가 많이 붙을까 봐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그럼 저한테 잘 보이세요.”
이보다 더 어떻게… 새침하게 말하는 그녀 앞에서 뒷말은 차마 말하지 못한 정서는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세라가 문학관에서 지낸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근영은 초고를 완성하고 드디어 밖으로 나왔고 오랜만에 금요일 파티에서 다른 작가들과 마주했다. 아예 세라의 메모가 담긴 그 책자를 들고나와서는 그녀의 비평을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사람 많은 자리에서 이목이 쏠리는 게 어색한 세라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이후 다른 작가들도 많든 적든 세라에게 비평을 의뢰하는 일이 많아졌다. 덕분에 스캔들 일도 금방 털어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여름을 맞이했다.
장원은 여전히 종종 책방을 방문했다. 얼마 전엔 생각보다 스캔들이 빠르게 잊히는 분위기라며 세라를 안심시켰다. 서주희 대표는 공식 발표 이후 무대응으로 일관했고 진상 팬들도 제풀에 지쳐 점점 회사 앞에 모이는 숫자가 줄어들었다. 가을쯤엔 세라의 복귀를 점치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한번은 주희가 전화를 걸어 이제는 서울로 돌아오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세라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대표님. 저 복귀 전까지 문학관에 좀 더 머무를게요. 여기가 좋아요. 일도 좋고 작가들이랑 지내는 것도 재미있어요. 일 때문에 부르시면 언제든 갈게요. 근데 지금은 여기 더 있고 싶어요.”
망설임 없는 답변에 주희는 속으로 놀랐다. 세라가 이렇게 확고하게 자기 의견을 말한 적이 거의 없었다. 뭔가 변화가 있는 말투였다. 그래도 좋은 쪽의 변화로 느껴지는 목소리였기에 주희는 세라를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세라는 여유가 생길 땐 수시로 정은과 드라이브를 가거나 근처 시장을 돌아다니며 쇼핑도 했다. 맨얼굴에 편한 차림의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시장에서 세라는 모처럼 자유를 만끽했다. 어릴 적에도 거의 가본 적 없었던 시장은 마트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정은이 능숙하게 ‘이모님’들과 협상을 벌이고 못 이긴 척 한 줌 더 내어주는 시장 특유의 인심이 마음에 들었다. 입담이 좋은 정은과 붙어 다니다 그녀의 영향을 받았는지 세라도 말문이 터진 아이처럼 재잘대곤 했다. 작가들과도 점점 더 친해지며 말을 놓게 된 사람도 많아졌다. 세라는 중간에 그만두어야 했던 대학 생활을 다시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정은이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날은 정서의 책방에 놀러 갔다. 정서가 추천해 주는 책은 하나같이 재미있어서 책은 원 없이 읽었다. 효민은 틈만 나면 연예계에 대해 묻곤 했다. 들려줄 때마다‘우와’, ‘우와’ 하는 효민의 반응이 귀여웠다. 정서는 장난으로 입간판에 ‘떠든 사람 : 세라, 효민’이라고 써놨다. 그런다고 멈출 그녀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느 순간에는 둘 다 책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이 있었다. 정서는 책방의 오후 4~5시간 내내 글을 쓰는 게 아니었다. 어떨 때는 자료 조사를 하고 어떨 때는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잘 안 써질 때는 딴짓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타자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영감이 떠올라 집중하며 글을 쓰는 순간이었다. 평소 무표정인 정서는 집중할 땐 한없이 진지한 표정이 되어 꽤 멋있어 보였다. 그럴 땐 그를 방해하기 싫어서 효민과 떠들다가도 조용히 책을 폈다.
글을 쓰고(정서) 책을 읽고(세라) 공부하는(효민) 조용한 책방에 갑자기 창밖이 번쩍 했다. 3초 후, 무슨 가스 폭발이라도 난 듯한 천둥소리가 오래도록 하늘을 울렸다. 정서도 신경이 쓰였는지 일하다 말고 창밖을 내다봤다.
며칠째 비가 오고 있었다. 유독 더운 해가 될 거라더니 장마도 만만찮게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는 장마 주제에 태풍처럼 비를 쏟아냈다. 문학관은 선배가 설계부터 배수시설도 꼼꼼히 신경을 쓰고 지어놓은 덕분에 아직 큰 난리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밤중에 곳곳을 점검하느라 잠을 조금 설쳤다. 아침에 눈을 뜨니 날이 개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보여줬는데 잠깐이었다.
점심 무렵부터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풍경도 꽤 운치가 있었지만, 너무 길어지니 축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세라는 비 오는 날보다 맑은 날을 더 좋아한다고 했는데… 정서는 저 하늘에 낀 먹구름을 서큘레이터 강풍 모드로 날려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효민과 세라가 귀를 막고 잔뜩 움츠려 있었다. 하필 둘 다 잘 놀라는 편이었는데 가뜩이나 오늘 천둥소리는 유독 요란했다.
문득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 오늘은 여섯 시까지만 문을 여는 토요일이었고 곧 문 닫을 시간이었다. 천둥소리 때문에 흐름이 깨진 정서가 말했다.
“이 날씨에 손님도 안 올 거 같고 오늘은 이만 퇴근합시다.”
“진짜요? 아싸! 감사합니다.”
남친과 약속이 있다던 효민이 신이 났다. 이 날씨에 제대로 데이트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효민이 남친에게 데리러 오라고 전화할 때 정서와 세라는 퇴근을 준비했다. 남친이 올 때까지 책방에서 기다렸다가 문 닫고 가겠다는 효민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먼저 퇴근했다.
“오늘 저녁은 우리끼리 먹어야겠네요.”
“그러게요. 다들 나가셨지 참.”
오늘 문학관은 오랜만에 텅 비었다. 주말마다 집에 가는 덩치를 포함해 다들 약속이 있었다. 혼자 약속이 없던 보라까지도 정은과 약속을 만들어 술을 마시고 들어온다고 했다.
뭘 먹을까 고민하는데 생각이 자꾸 끊겼다. 호우경보까지 발효된 상황에 문학관으로 돌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화난 듯 움직이는 와이퍼 소리가 무섭게 느껴졌다. 옆에서 세라가 안전띠를 꼭 쥔 채 긴장해 있었다.
“날씨 보니 저녁에는 좀 잦아든대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무슨 비가 이렇게… 윽!”
세라가 말하는 순간, 맞은 편에서 오던 덤프트럭이 도로에 잔뜩 고인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며 엄청난 물을 정서의 차에 끼얹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물세례에 와이퍼가 움직여도 앞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정서의 차도 달리는 중이었던 터라 세라는 눈까지 감고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정서는 바로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차를 감속하면서 움츠러든 세라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 괜찮아요. 트럭이 왠지 물 튀길 것 같아서 앞차 거리 미리 봐뒀어요.”
“아, 네. 아우 놀래라…”
세라가 다시 좌석에 몸을 기대면서 자연스럽게 토닥이던 손을 거두었다. 세라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정서 씨는 진짜 잘 안 놀라시네요. 부럽다. 원래 그랬어요?”
며칠 전에도 그랬다. 근영이 늦은 점심을 먹으려 전날 정서가 알루미늄호일로 싸놓은 음식을 무심코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몇 초 후 스파크가 튀고 연기가 나면서 주변 사람들이 놀라 잠시 얼었는데 정서는 말없이 다가가 코드를 뽑아버렸다. 책방 앞에서 오토바이 사고가 났을 때도, 손님을 따라 책방에 말벌이 들어왔을 때도 정서는 태연하게 수습했다.
별거 아닌 일이더라도 잠깐이라도 놀랄 법한데 정서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원래 담이 커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가끔은 그런 정서가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아니요. 어릴 땐 저 엄청 잘 놀라고 완전 울보였어요.”
“에이, 안 그랬을 것 같은데.”
“진짜예요. 이십 대 때도 깜짝깜짝 잘 놀랐어요. 정은 누나도 알아요.”
“근데 지금은 안 그러잖아요. 어떤 계기가 있었어요?
세라가 고개를 돌려 정서를 쳐다봤다. 순간 그의 표정이 굳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방금 옛날 얘기를 할 때만 해도 살짝 웃고 있었다. 정서는 앞만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세라는 그 모습이 서운했다. 처음 본 날 세라가 다짜고짜 정서를 불러 세웠을 때도 그는 무표정이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굳은 표정과는 달랐다. 종종 어떤 질문에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걸 세라도 느끼고 있었다. 사람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과거가 있을 수 있으니 예전엔 그냥 넘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세라도 고개를 다시 돌렸고 이번엔 섭섭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그거 알아요? 가끔, 아니 자주 그렇게 대답 피하는 거?”
“……”
마침 사거리 신호가 빨간 불이었다. 정서는 말이 없었고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차 안은 비가 차창을 때리는 소리만 들렸다.
“제가 괜한 말 했네요. 뭔진 모르겠지만 그냥 제가 조심할게요. 말 안 해도 돼요. 괜찮아요.”
정서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괜찮은 게 괜찮은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때 신호가 바뀌고 정서는 다시 운전했다. 흘끗 보니 세라는 아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그를 외면하고 있었다. 정서는 문학관으로 가는 내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문학관까지 남은 거리 십여 분을 오는 동안 다른 대화가 없었다. 세라는 계속 창밖만 바라봤고 아까처럼 천둥소리에 놀라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주차장에 차를 대자마자 세라는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우산도 없이 차 문을 열었다.
정서는 급히 세라의 우산까지 챙겨 차에서 내렸다. 세라는 비를 그냥 맞으며 빠른 걸음으로 문학관 문 앞까지 가 있었다.
“파전에 막걸리 한잔할래요? 비도 오는데.”
정서가 얼른 따라붙으며 여전히 뒤통수만 보이는 세라에게 말했다.
“아뇨. 됐어요. 그냥 라면이나 먹고 쉴래요.”
단단히 삐졌구나… 세라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문학관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정서의 속이 탔다. 그리고 소리쳤다.
“제가 왜 변했는지. 어쩌다 문학관을 맡았는지. 왜 돈 욕심 안 내고 조용하게 사는 게 좋다고 했는지… 다 알려줄게요.”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힐까 봐 크게 낸 소리에 세라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정서도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세라 씨가 물어봤던 거 다 말할게요. 저랑 술 한잔해요.”
세라는 정서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