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담 장편소설
어느덧 날이 더워진 6월 초.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겨울의 끝에서 시작해 여름의 시작을 맞이하며 문학관 사람들도 옷차림이 바뀌었다. 정서는 오늘 마지막 촬영이 끝나면 회식이 예정되어 있어서 책방도 가지 않고 미리 저녁거리를 만들어 놓는 중이었다. 메뉴는 미역국과 고등어조림이었다.
“우리 한 작가님 요즘 기분 좋나 봐? 요리하는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여.”
“그러게. 촬영장 나가더니 누구랑 썸이라도 타는 거 아냐?”
식탁에는 심심해서 문학관에 놀러 온 정은과 마침 쉬고 있던 보라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동갑내기인 그녀들은 털털한 성격도 비슷해서 아예 친구가 됐다. 둘은 마치 어린 남동생에게 장난치며 노는 누나들처럼 정서를 놀리는데 재미가 들려있었다. 처음엔 살살 긁다가 나중엔 정서가 터지기 직전까지 놀려대는데 호흡이 척척 맞았다.
“잠깐만. 그런데 웬 미역국? 작가님. 오늘은 콩나물국 차례 아닌가요?”
보라가 수상쩍다는 듯 말했다.
정서는 요리에도 루틴이 있었다. 메인요리가 제육볶음처럼 간이 센 요리면 된장찌개나 소고기뭇국으로 궁합을 맞추곤 했다. 특히 국 요리는 김치찌개부터 미역국, 된장찌개, 소고기뭇국, 순두부찌개 등 10가지 국을 자기가 정한 순서대로 만들었다. 빨간 국이 나오면 다음 날은 맑은국이 나오니 입주작가들도 아예 순서를 외울 정도였다. 보라의 기억에 미역국은 사흘 후에 나와야 했다. 정은이 거들었다.
“오늘 작가 누구 생일이야? 아니지? 쟨 누구 생일이건 말건 지 루틴대로 요리하잖아.”
보라가 그새 거실에 걸려있는 화이트보드 달력을 봤다. 오늘 설거지 당번은 혜리였고 청소 당번은 자기였다. 그것 말고 6월엔 입주작가의 생일 표시가 없었다.
“없어. 없어! 내 생일 땐 미역국 네가 끓여줬잖아. 이상한데? 한 작가가 요리 순서를 바꾼다고? 냄비도 더 큰 걸로 했네?”
눈이 마주친 둘은 금세 먹잇감을 찾은 하이에나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정서에게 다가갔다. 정은이 열심히 뭔가 하고 있던 정서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속삭였다. 여태 말이 없는 것도 수상해 심증을 더했다.
“정서야. 누나한테만 말해 봐. 누구야아? 누구 생일 챙겨주려고?”
간드러진 말투로 다가간 정은은 가까이서 정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직 제대로 된 장난은 시작도 안 했는데 정서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요리 열로 발개진 건 아니었다. 문학관 주방은 설계부터 대인원을 위한 구조였고 환풍구는 식당 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심증이 물증으로 확정된 순간 두 여인은 꺅꺅거리며 난리가 났다.
“어머, 미쳤나 봐! 아, 진짜 누구지? 쟤 전 여친들 내가 다 아는데.”
하필 미혼 여성이던 둘은 자기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원래 남의 연애가 더 재미있는 법이었다. 그때 정서가 뒤돌아섰다. 아직 얼굴은 벌겠고 손에는 미역국이 가득 담긴 네모난 용기를 들고 있었다. 저 둘이 제대로 시동을 걸기 전에 얼른 챙겨서 나가려고 말도 안 하고 서둘렀는데 두 사람이 더 빨랐다.
“소문내면 죽는다…”
짧게 말을 뱉은 정서는 민망함에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고 남은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이틀 후가 세라의 생일이었다.
세트장으로 가는 내내 정서는 마음이 조금 들떴다. 드디어 촬영이 끝난다는 게. 그러면서 아쉬웠다. 이제 전처럼 세라를 자주 못 볼 것이.
시원섭섭하다는 단어가 딱 이런 감정인 것 같았다. 세라라면 언제든 지나는 길에 책방에 들르겠지만, 공식적으로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조수석에는 지난번에 약속한 책들이 담긴 종이가방이 있었다. 책은 정서가 고르고 고른 선물이었다. 그 옆의 보온 가방에는 미역국이 들어 있었다. 미역국은 정서의 마음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한 세라는 생일에 미역국도 제대로 못 챙겼을 것 같았다. 친해졌어도 세라는 연예인이고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냥 생일에 따뜻한 미역국을 챙겨주고 싶은 마음 하나뿐이었다. 정서는 단지 그거면 됐다.
마지막 촬영이지만 세라의 대사는 많지 않았다. 애초에 내용이 회사에서 남자들끼리 벌이는 정치 싸움에 관한 스토리였다. 많지 않은 분량에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세라를 지켜보며 정서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컷…트! 오케이!!!
이윽고 윤 피디의 마지막 오케이 사인이 호쾌하게 들렸다. 동시에 수많은 스태프가 배우들과 감독 그리고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며 마지막 촬영을 축하했다. 누군가 갖고 들어온 커다란 케이크와 함께 곳곳에서 축포가 터졌다. 항상 카메라와 윤 피디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정서도 지금은 촛불을 같이 불며 자리를 즐겼다.
일산의 한 갈빗집에서 백 명이 넘는 스태프들이 모였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정서는 윤 피디와 연출팀 스태프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작가님 술 잘 드시네요? 아예 입에도 안 대실 것 같았는데.”
정가현 피디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못 먹진 않아요. 정 피디님도 잘 드시네요.”
“법카로 먹는 거잖아요. 끝장 봐야죠.”
익살맞은 가현의 말에 윤 피디가 타박했다.
“형 조심해. 얘가 술만 마시면 집을 안 갈라 그래. 자꾸 한잔 더하자고 그냥.”
“놀 땐 놀라면서요! 아, 근데 저 작가님 소설 읽었는데 진짜 재밌던데요? 역시 원작이 좋으니까, 그림도 잘 나오네. 진짜 비전공자 맞아요?”
정서는 윤 피디와 가현의 투덕거림이 보기 좋았다. 가현은 촬영장에서는 정서 못지않게 조용하고 각 잡힌 군인처럼 움직였었다. 그런데 사석에선 MBTI를 갈아 끼운 것처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냥 친한 형한테 조금 배웠어요. 얘기하자면 길어요.”
예전엔 말끝을 흐렸을 질문에도 지금은 불편함이 없는 듯 나직하게 말했다. 정서는 대화는 연출팀과 나눠도 시선과 귀는 옆의 출연진 테이블에 가 있었다. 기민서가 아까부터 앞에 앉은 세라에게 자꾸 술을 먹이고 있었다.
빨리 마시면 취하던데…
당장이라도 저놈을 치워버리고 전처럼 두런두런 말장난하며 그녀와 한잔하고 싶었다. 걱정하며 신경을 쓰던 중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참는 것이 보이는 미소 섞인 거절로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를 떴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잠깐 기민서를 흘겨보다가 세라가 걱정돼 따라가려고 할 때였다. 이제 입사 2년 차라던 정 피디의 후배가 놀라며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대…박. 미쳤나 봐.”
“왜. 무슨 일인데. 어머!”
옆에 있던 가현이 궁금해하며 들여다봤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게 비슷한 반응이었다. 가현은 후배의 폰을 빼앗아 들고 윤 피디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곁에 있던 정서도 자연스레 눈이 갔다.
[이슈팩트 단독] 기민서 - 백세라 열애설
— 같은 드라마 찍다가 깊어진 사이? 극 중 부부로 출연.
— 저녁 식사 후 집으로 데려다주는 장면 여러 번 포착돼.
정서는 화면에 뜬 뉴스 기사의 헤드라인을 믿을 수가 없었다.
* * *
스캔들 기사는 회식 자리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는 모두 알았는지 다들 출연진 테이블을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가 다른 배우들의 테이블에 앉은 세라도 뭔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미 배우들도 기사를 본 것 같았다. 이번에 친해진 한 여배우가 세라에게 귀띔했다. 낯빛이 급히 어두워진 세라는 기민서를 노려보다가 걸려 온 전화에 다시 자리를 떴다. 그는 다른 여배우 옆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기민서만 모른 채 회식은 애매한 분위기에서 끝이 났다.
세라는 1차가 끝날 무렵 데리러 온 장원의 차를 타고 급하게 떠났다. 마지막 자리인데도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연출팀 테이블에 와서 인사할 땐 정서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불안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정서도 속이 심란했다.
기민서는 한참을 더 정신 팔린 채 놀다가 뛰어 들어온 매니저로부터 그때야 소식을 들었다. 술에 취한 듯한 그는 기사를 보고 상욕을 뱉고는 전화를 걸며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본 정서는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형, 천천히 마셔. 그나저나 세라 걱정이네. 하필 기민서한테 걸려서.”
윤 피디가 정서의 빈 술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그의 걱정과 달리 정서는 마실수록 정신이 깨는 느낌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아니지, 업계에서 이 스캔들 믿는 사람 한 명도 없을 거야. 기민서 저놈 저거 상습범이야. 여태 스캔들만 열 번은 될 걸?”
마침 기민서가 다시 돌아와 거칠게 겉옷을 챙긴 후 사람들에게 인사도 안 하고 나가고 있었다. 옷을 챙길 때 술잔이 넘어져 옆자리 배우의 옷에 술을 쏟았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런 기사가 나?”
연예계엔 문외한인 정서가 이해 안 된다는 투로 물었다.
“사람들이 이런 가십거리 환장하잖아. 이슈팩트 여기 연예 전문 언론이거든. 몇 번이 됐든 기민서 정도면 특종이지.”
정서는 인상을 쓰며 술을 한잔 더 털어 넣었다.
“아무튼 근데 저 새끼는 뭐 찍을 때마다 하나씩 터지냐. 아씨, 기자들 나한테도 전화 겁나 오네. 정 피디. 우리 드라마엔 문제없겠지?”
윤 피디의 핸드폰은 조금 전부터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는 그때마다 받지 않은 채 전화를 돌려놓았다.
“저희야 뭐 홍보가 됐으면 됐지… 크게 문제 될 건 없지 않을까요. 근데 저 팬클럽 때문에 게시판이 좀 걱정이긴 하네요. 세라 씨랑.”
“팬클럽이 왜?”
정서의 질문에 가현 대신 윤 피디가 답했다.
“쟤 아이돌 때부터 팬클럽 극성맞기로 유명하거든. 여태 저놈한테 걸린 여자 연예인 중에 남아난 사람이 없어요. 최소 1년은 강제 휴식이야. 정 피디 일단 우리는 게시판 닫자.”
윤 피디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엔 본부장님 전화가 왔다며 잠시 일어났다.
“네 감독님. 아무튼 게시판 다운될 정도로 악플은 기본이고 낙서에, 스토킹에, 협박에… 지나가면 계란 날라오고 집밖에 나오지도 못하게 해요. 전에 어떤 배우는 하도 시달려서 정신과 다니다가 결국 은퇴하고 캐나다로 이민 갔어요.”
“이런 미친!!”
정서가 듣다못해 술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놀란 일행을 뒤로하고 짐을 챙겨 대강 인사하곤 자리를 나섰다.
대리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는 정서의 옆에는 건네지 못한 미역국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은 더 난리가 났다.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두 사람을 찍은 사진이 공개되며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정서는 책방에서 독서도 안 하고 집필도 내버려둔 채 기사만 들여다봤다.
어제 윤 피디와 가현이 말한 대로 기사 댓글에는 세라에 대한 욕으로 넘쳐났다. 아직 조연인 세라가 기민서 덕을 보기 위해 끼를 부렸다느니, 누굴 넘보냐는 등의 악플이었다. 클린댓글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어떤 내용이 었을지 모를 삭제된 댓글도 많았다. 반대로 ‘기민서 버릇 못 고치네’ 같은 소수의 댓글은 ‘싫어요’ 몰표를 받고 있었다. 정서는 입술을 뜯으며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세라의 SNS는 이미 어둡게 닫혀 있었다.
두 사람의 소속사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캔들을 부인하는 기사를 냈다. 그러나‘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는 확신이 담긴 글에도 소용이 없었다. 대낮부터 PEARL 엔터 사옥 앞에는 극성팬들이 몰려왔다. 온갖 현수막을 걸고 가져온 스프레이로 건물 벽에 낙서했다. 그들은 확성기를 통해 시위하듯 큰소리로 난동을 피우다 경찰의 제지로 일단 물러났다. 반면 기민서의 소속사 앞은 몇몇 기자들 말고는 조용했다. 피해는 온전히 세라와 PEARL 엔터만 보고 있었다.
신상 털기로도 유명했던 그들은 집요했고 기어코 세라가 사는 오피스텔을 알아냈다. 팬클럽은 출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막힌 채 주거지임을 고려했는지 이번엔 침묵시위를 했다. 시간이 지나자, 연예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한두 명씩 나타나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세라는 밑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세라가 읽으라는 듯 대놓고 위로 펼쳐놓은 현수막 문구들이 그녀를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한 시간 전에는 장원의 전화가 걸려 왔다. 잠시 피해 있자며 데리러 온다고 했다. 장원은 조용히 주차장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차를 알아본 팬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먼저 달려들었다. 차를 에워싸고, 두드리고, 흔들고 창을 깨는 온갖 난리 속에서 순찰 중이던 경찰이 그들을 말리는 틈을 타 장원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기자들은 그 장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뛰어가 카메라에 담았다. 기사가 나고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처음 구름처럼 모여든 팬클럽과 기자들을 봤을 땐 혼자가 된 것 같아 외로웠다. 그러다 애꿎은 장원이 봉변당하는 걸 보니 이젠 화가 났다. 이제 겨우 나아지고 있었는데 억울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 나가서 아니라고, 꺼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문득 엉망으로 파손된 채 버려진 자신의 검정 밴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 있다간 자신이 저 꼴이 될 것 같았다. 다시는 그러기 싫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 회사에서 호텔 잡아줬어요. 잠깐 연락 안 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가족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세라는 집을 나섰다. 갈 곳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전에 1년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자책하면서 지냈던 시간이 있었다. 겨우 밖으로 나왔는데 다시 이 안에 갇힐 순 없었다. 그때 이후로 바깥세상을 가리던 암막 커튼도 전부 없애버렸다. 그땐 스스로 갇혔던 그녀는 지금은 스스로 나서고 있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뛰기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런닝화를 신었다. 머리가 방해되지 않도록 모자를 눌러썼다. 마스크는 쓰지 않았다. 화려한 옷은 아니더라도 숨는 것처럼 보이긴 싫었다. 도망친다고 삿대질해도 상관없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단지 그냥 잘 뛰는 것만 중요했다. 계단을 통해 2층까지 내려왔다. 내려오는 중간에 핸드폰과 지갑이 든 작은 가방 외에 아무것도 챙겨 나오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조금 성급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긴 싫었다.
— 될 대로 돼라. 그래도 여기보단 낫다.
전에 정서가 한 말이었다.
“그래도 갑자기 회사 그만두고 글 쓰는 게 무섭진 않았어요? 불확실하잖아요.”
“될 대로 돼라 였어요. 회사 가면 숨 막히고 밤에 잠도 못 잘 정도로 답답했어요. 아침에 눈 뜨면 ‘아, 회사 가기 싫다’라는 생각부터 들고. 지옥이었죠. 더 있다간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이러고 죽으나, 저러고 죽으나 마찬가지다. 더 늦기 전에 해보고 싶은 거 해보자. 될 대로 돼라! 그래도 여기보단 나을 거다!”
지금은 옆에 없지만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졌다. 1층까지 내려온 세라는 로비로 통하는 출입구를 열기 전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시위는 조용했다. 괜히 밖에서 고생하고 있을 경비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밖은 경찰들이 와 있었다. 저녁 먹을 시간에 입주민 중 누군가 신고한 건지는 잘 몰라도 경찰들이 팬클럽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그 덕에 팬클럽의 시선이 부산스러워졌다.
세라는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처음엔 지하 주차장으로 가려다 생각을 고쳤다. 아까 장원이 탄 밴도 파손한 그들이 지하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저들에게 봉변당하더라도 꽉 막힌 지하에서 잡히긴 싫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이 오피스텔은 정문과 뒷문으로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종의 옆문처럼 분리수거장에서도 외부로 나갈 수 있었다. 분리수거 차량이 오가는 전용 통로는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었다.
세라는 울타리에 가까운 큰 문을 담 넘듯 넘었다. 순식간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서 자신도 조금 민망했다. 그녀는 곧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를 힐긋거리고 지나가는 사람이 몇 있었다. 세라는 상관하지 않았다. 멀리서 택시가 오는 게 보였다. 탈 때도 조급해 보이지 않으려 했다.
“파주 신도시로 가주시겠어요?”
택시는 우회전해 팬클럽이 죽치고 있던 정문 앞을 지났다. 그전에 세라는 창문을 내렸다. 모자도 벗고 맨얼굴을 드러낸 세라를 알아본 그들이 택시를 가리키며 뭐라 소리쳤다. 입 모양만 봐도 욕지거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세라의 기분은 오히려 태연했다. 세라는 그들에게 환한 미소와 함께 우아하게 손을 흔들어 주며 그곳을 떠났다. 말로 못 할 통쾌함과 함께 그녀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 * *
택시에서 내렸다. 책방 앞이었다. 퇴근 시간에 겹쳐 서울을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8시가 다 된 시간이라 어두웠지만 기자나 그 팬들이 찾아올 일은 없어 조금 안심되었다. 막상 오긴 했는데 갑자기 긴장됐다. 전에 듣기로는 지금은 정서가 없을 시간이었다. 효민도 분명 기사를 봤을 텐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걱정됐다.
세라가 조금 망설이고 있을 때 책방 불이 꺼졌다. 잠시 후 효민이 나오면서 문을 잠그고 보안을 걸었다. 뒤돌아서던 찰나, 가로수 밑의 어두운 곳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세라를 보고 효민이 깜짝 놀랐다. 효민은 세라를 한 번에 알아봤다.
“엄마야, 놀래라! 세라 언니…?”
“아, 효민 씨… 퇴근하는 거예요?”
세라는 조금 민망하게 인사했다. 알바생이긴 해도 정서에겐 가까운 사람인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떨렸다.
“언니! 괜찮아요? 지금 뉴스에… 아, 일단 들어와요!”
효민은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세라의 팔을 잡고는 가타부타 긴말 없이 다시 책방 문을 열었다. 불을 켜고 세라를 안쪽으로 들이고는 곧장 창문 블라인드를 내렸다.
“언니. 걱정했어요. 어떻게 해… 그새 야위신 것 같아. 잠시만요. 따뜻한 것 좀 드릴게요.”
효민은 세라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초라한 차림에도 이것저것 묻지 않고 챙겨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녀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세라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정서가 매일 작업한다는 책상과 노트북. 아마도 오늘 오전에도 읽었을 독서대 위의 책. 이곳저곳 붙여놓은 메모들과 한쪽에 수북이 쌓인 원고들. 종종 낮잠 잘 때 쓸 것 같은 목 베개까지. 전에 왔을 땐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자리에 정서가 있는 것처럼 그의 일상이 그려지며 미소가 지어졌다.
“드세요. 제주도에서 주문한 청귤차인데 조금 진정되실 거예요.”
잠시 후 효민이 쟁반에 차 두 잔을 들고 왔다. 은은한 노란빛 액체에 띄워진 청귤이 참 예뻤다. 한 시간 넘게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목이 조금 탔던 세라는 귤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큰한 향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속이 조금 따듯해졌다. 효민은 너무 뜨겁지 않게 온도 조절에도 신경을 쓴 듯했다.
“맛있네요. 고마워요.”
“다행이다. 제가 커피는 작가님만큼 맛있게 못 내려도 차는 자신 있거든요.”
정말 자신 있어 보이는 효민의 표정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그리고 넌지시 물었다.
“기사… 봤어요?”
“네. 안 볼 수가 없었죠. 사람들 진짜 너무해. 굳이 집까지 찾아가서… 하여튼 기민서 그 인간이 문제예요. 제비족처럼 생겨 가지고.”
“풉, 그런 단어도 알아요?”
“아, 작가님이 기사 보면서 기민서 욕 엄청 했거든요. 기생오라비니, 제비족이라느니. 아무튼 자기가 더 열 받아서는 요즘 일도 안 하더라니까요.”
“그랬어요…?”
세라는 정서가 보였다는 반응을 듣고 놀랐다. 글도 안 썼다니 괜히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회식 자리에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나왔던 게, 마치 몇 달 전 일처럼 느껴졌다.
“언니. 작가님 문학관 하시는 거 알죠? 괜찮으시면… 거기 잠깐 가 계시는 건 어때요?”
눈치 좋은 효민은 세라에게 어디 달리 갈 곳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오늘 그런 일을 겪고 이 시간에 이곳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답이었다.
“……”
세라는 망설여졌다. 지금 그 사람이 여기 없다는 게 차라리 나았다. 막상 아무것도 없이 이런 꼴로 오니 정서를 보는 게 겁이 났다.
“저도 몇 번 안 가봤지만, 꽤 아늑한 곳이에요. 거기 계신 작가님들도 좋고. 무엇보다 기자들이나 그 팬인지 뚜껑인지 하는 인간들도 절대 못 찾을걸요?”
그 모습을 본 효민이 좀 더 강하게 나갔다. 세라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그럴게요…”
먼저 꺼내기 어려운 말을 효민이 해줘서 고마웠다. 정서는 아직 문학관에 있을 거라던 효민이 전화를 걸었다.
“작가님. 저 효민이요. 지금 책방으로 와주실 수 있어요? 저… 세라 언니가 와 있어요. …설명하긴 어렵고 그냥 일단 오세요.”
문학관에서 책방까지는 차로 15분 정도 거리였다. 정서는 작가들 저녁밥을 챙긴 후 문학관을 살피며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그는 순식간에 달려 나가 곧바로 차 시동을 걸었다.
정서는 10분도 안 돼서 도착했다. 들어가기 전에 주변부터 살폈다. 근처 먹자골목과는 떨어진 곳이었고 지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심호흡을 한 정서가 책방 문을 열었다.
“괜찮아요?!”
방금 심호흡한 게 무색하게 그녀를 보니 진정이 잘 안됐다. 걱정인지 안타까움인지 다행인지 모를 감정들이 교차했다. 세라는 말없이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작가님이야말로 괜찮아요? 아니 완전 날아오셨네… 숨 좀 쉬어요. 왜 이렇게 헐떡여요.”
효민이 일부러 과장되게 정서의 어깨를 탁탁 쳤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세라는 딴청을 부리고 정서는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효민이 다시 나섰다.
“뭐해요! 언니 데리러 왔으면 빨리 모셔가지 않고! 언니. 같이 나가요.”
효민의 재촉 덕에 둘은 겨우 움직였다. 효민이 뒤에서 보기에 삐걱삐걱 어딘가 고장 난 사람들 같아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고 있었다. 효민이 다시 책방 문을 닫고 둘은 차에 올라탔다.
‘이럴 때 차 문 좀 열어 주지. 저 바보 작가…’
속으로 참 답답한 효민이었다.
“효민아. 당분간 책방 좀 부탁하자.”
“걱정하지 마시고 언니나 잘 챙기세요. 오전 추가 근무는 시급 두 배 챙겨주시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효민이 두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 풀기 위해 장난치듯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효민 씨.”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세라가 말했다. 효민은 맑게 웃으며 두 손을 들어 흔드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정서의 차가 출발한 후 효민은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까 세라에게 정서가 열 받아 했다는 얘기도, 문학관에 가라고 밀어붙인 것도 모두 효민의 계산이었다. 효민이 보기에 저 답답한 두 사람이 잘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뭐, 작가님이 잘 챙겨주시겠지. 아, 나 결혼정보회사를 가야 하나?”
효민은 기분 좋은 듯 에코백을 휘휘 돌리며 걸어갔다.
한편 회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세라는 전화도 받지 않고 나중엔 핸드폰도 꺼놓은 상태였다. 장원도 세라 집 앞에서 큰일 날 뻔하다가 겨우 빠져나온 걸 보고 주희는 다른 직원을 보냈다. 저들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장원도 당분간 호텔에서 지내게 했다. 세라 집에 도착한 직원에게선 안에 세라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답이 없다는 소식만 전해졌다. 주희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반면 건호는 세라의 일엔 관심도 없는 듯했다. 실장실에서 느긋하게 기사를 보며 상황을 지켜보던 남 실장의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이슈팩트 안태인 기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