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담 장편소설
“생각 바뀌면 장원이한테 말해. 나가봐.”
세라는 실장실 문을 조용히 닫고 나왔다. 촬영이 없는 날이었다. 집에서 쉬면서 정서의 소설을 읽고 있는데 남건호 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매니저인 장원은 하필 다른 배우의 팬 사인회에 지원을 나갔다. 오랜만에 쉰다고 좋아했던 장원의 휴식을 빼앗고 그를 보낸 사람이 남 실장이었다.
차가 없으니 모자를 눌러 쓰고 택시를 탔다. 사실 길거리를 그냥 다닌다 해도 세라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 드물었다. 조연으로 두 작품을 했지만 둘 다 시청률이 일이 프로 수준이었다. 가끔 길에서 만난 행인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지나가며 뒤를 돌아봐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지금 세라에게는 인지도가 필요했다.
여자가 차린 기획사라고 당했던 무시를 이겨내고 20년 넘게 업계에서 살아남은 서주희 대표도 그걸 알고 있었다. 서 대표는 스타가 될 재목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세라도 그녀의 눈에 들었다. 지난 두 작품은 망한 거나 다름없는 시청률을 보였지만, 감독과 작가의 탓이었지 세라의 연기는 괜찮았다. 성장통이라고 치고 이제 제대로 된 작품 한두 개만 잘 만나면 바로 주연급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주희가 보기에 세라는 연기력도 괜찮았고 매력도 충분했다. 이번 윤 피디의 새 작품 캐스팅에 세라를 적극적으로 밀어 넣은 이유였다. 배역 비중이 조금 낮긴 해도 시청률이 보장돼서 인지도를 높일 수 있을 만한 드라마였다.
세라는 예뻤다. 하지만 지금은 예쁘기만 하다고 스타가 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의 이력서는 넘쳐났다. 이 세계에서는 자기 매력이 없으면 순식간에 이름이 잊혔다. 리나 다음으로 키울 배우를 세라로 점찍었을 때쯤 대표는 세라의 지난 작품 촬영장에 몰래 찾아갔다. 하필 농촌 배경 드라마였고 한여름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스태프들 뒤에서 슬며시 세라를 지켜봤다.
귀하고 예쁘게만 자라왔을 것 같았던 세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논에 첨벙첨벙 들어갔다. 휴식 시간에는 거리낌 없이 사마귀를 잡아내며 스태프들을 놀라게 하던 세라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마스크가 온통 땀으로 젖을 정도로 더웠지만 잘 왔다고, 잘 봤다고 생각했다. 도시적이고 청순한 외모와는 달리 시골틱한 행동, 벌레를 잡고 스태프들에게 장난치던 모습, 흙물이 튀기는데도 해맑게 웃던 모습. 세라만의 매력을 찾아낸 것 같았다.
20년 내공으로 세라를 어떻게 밀어줄지 청사진이 그려졌다. 그랬는데… 그랬던 세라만의 자연 무광한 아름다움이 드라마가 끝날 때쯤에는 빛을 잃었다.
시청률이 낮은 드라마는 이유가 있다. 농촌에서 찍었던 초반 장면 외에는 작가가 말아먹었다. 반만 찍은 상태에서 방영을 시작했는데 시청률이 기대 이상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작가는 부담을 느꼈다. 하필 그 작가는 여섯 작품 연속으로 쓰는 족족 대박만 치던 스타 작가 권종선이었다. 흥행 보증 수표라 불리며 성공 가도만 달려가던 본인도 처음 겪는 상황에 대본은 산으로 갔고 악플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화풀이로 촬영장에서는 배우 연기 탓을 하고, 인터뷰에서는 책임을 감독 연출 탓으로 돌렸다. 그나마 남아있던 작은 팬심도 등을 돌리며 결국 1.4%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종영을 했다.
그런데 권 작가가 배우들에게 화풀이하는 과정에서 세라가 타격을 입었다. 강자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약점을 잘 꿰뚫어 본다. 남들은 모두 세라의 연기를 칭찬하는데 권 작가는 달랐다.
“시골 소녀를 서울 애가 억지로 연기하는 것 같네. 됐어. 그냥 가자.”
예고를 다니면서 고등학생 때부터 단역으로 활동했던 세라는 그동안 연기로 지적받은 적이 없었다. 아직 뜨지 못한 건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고 애써서 달래 온 세라만의 자존감이기도 했다. 하지만 티 나지 않게 웃으면서 까는 대작가 앞에서 그게 무너졌다. 세라의 연기는 갈수록 어색해졌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그래도 드라마 막판을 제외하곤 대체로 잘한 편이라 세라를 향한 큰 후폭풍은 없었다. 서 대표는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고 따로 불러서 세라를 위로했다.
“괜찮아. 너 욕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항상 좋은 작품만 골라서 할 수도 없는 거고. 한 2주 푹 쉬고 다음 거 준비하자.”
“대표님, 저 이제 못할 거 같아요……”
펑펑 울며 말하던 세라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가 갑자기 왜 무너졌는지 알았다. 다음날 주희는 직원들에게 앞으로 권종선 작가의 작품에는 적당한 배우가 없다고 거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세라는 집밖에 잘 나오지도 않은 채 내리 일 년을 쉬었다. 주희는 배우들을 귀하게 여겼다. 이미 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들과 오랫동안 계약을 유지하는 게 그녀만의 자부심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세라의 상태를 체크하다가 윤 피디의 대본을 보고 다시 그녀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리나를 담당했던 장원을 세라에게 붙였다. 그는 긴 무명 시절 동안 떨어진 세라의 자신감을 잘 케어할 수 있을 적임자였다.
그런데 촬영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났는데 장원에게서는 아직 좋아졌다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남은 일정을 고려하면 방영이 시작될 여름 전까지는 세라의 자신감이 올라와야 했다. 주희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예능, 다음 작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작품으로 인지도를 확고히 다지고, 몇 번 예능에 출연하면서 세라의 매력을 드러낼 수만 있다면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라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주희는 자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삼 개월 남짓. 리나의 일본 팬 미팅이 현지 사정으로 갑자기 앞당겨지지만 않았다면 촬영이 없는 날 세라를 불러 물어볼 참이었다. 잔뼈가 굵은 주희의 경험으로 볼 때 지금 타이밍을 잡지 못하면 세라의 배우 커리어는 끝이었다. 주희는 이런 감이 좋았다. 그동안 소속된 모든 배우를 성공시킨 건 아니었다. 가끔 대표인 자신의 제안도 반대하며 고집을 부리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 배우도 많았다. 세라는 그래선 안 됐다. 조금만 더 버티면 세라도 회사도 모두 웃을 수 있었다. 주희는 한국으로 돌아가면 세라와 꼭 면담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조용히 팬 미팅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장실을 나온 세라는 장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오래 이어진 끝에 뒤늦게 전화를 받았다.
“오빠, 어디예요?”
“나 아직 현장이야. 끝나려면 멀었는데, 왜?”
전화기 너머에서 팬들의 함성이 시끄럽게 들렸다.
“남 실장님이 저한테 권종선 작가 드라마 또 들어가라는데, 혹시 들으셨어요?”
“뭐? 아이 씨…”
다시 들려온 함성에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장원이 욕을 내뱉은 것 같았다.
“지금 어디야? 아직? 그럼 나가지 말고 로비에서 커피 한잔하고 있어. 괜찮아. 여기 나 없어도 돼. 20분이면 가니까 잠깐만 기다려.”
세라의 짧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장원이 계속 말을 이었다. 행사장을 빠져나온 듯 전화 너머 소리가 조용해졌다.
“네. 기다릴게요.”
* * *
30분 전 실장실. 세라는 노크하고 조심스럽게 실장실에 들어섰다. 마스크만 벗고 모자는 아직 눌러쓴 채였다.
“배우가 꼴이 그게 뭐냐.”
남 실장의 말에 세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쭈뼛거렸다. 괜히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두 달 전 리나가 해외 촬영을 마치고 모자를 쓴 채 회사에 왔을 때는 모자로 가려도 예쁘다며 칭찬을 쉬지 않던 그였다.
“뭐해, 앉아.”
그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미소를 지으며 투박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상반됐다.
세라는 표정이 굳은 채 소파에 앉았다. 남 실장은 앉으라고 해놓고 잠시 전화를 한다더니 5분이 넘게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세라는 당장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벽 한가운데에 ‘PEARL ENT.’라고 쓰여 있는 회사 로고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겨우 참고 있었다.
사람 불러놓고선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에 세라도 슬슬 화가 날 무렵에야 건호는 겨우 통화를 마쳤다. 일 얘기면 모를까, 여태 들은 통화 내용은 골프 이야기였다. 세라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아, 미안. 갑자기 친구 전화가 왔네. 뭐 좀 마시지 그랬어.”
남 실장은 그때야 비서에게 커피를 가져오라 시켰다.
“하실 말씀이 뭐예요?”
표정만큼이나 말투에도 감정 없이 건조한 말이 나왔다. 세라는 예전부터 남 실장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PEARL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배우나 직원들 대부분이 그랬다. 서 대표가 어쩌다 저런 사람과 결혼했는지 모를 만큼 그녀가 안팎으로 쌓은 신뢰를 남편이란 사람이 갉아먹고 있었다. 주희는 말단 매니저까지도 세세하게 챙기면서 사람들이 믿고 따랐는데 남 실장은 다들 피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필 대표도 없고 매니저도 없는 이럴 때 자기를 부른 게 불편했다.
“어, 뭐 별건 아니고. 너 지금 드라마 4월엔 촬영 끝나지?”
안 그래도 불편한데, 남 실장이 꺼낸 주제에 왠지 불안해졌다.
“아뇨. 6월까진 일정 잡혀있어요. 7월까지… 늦어질 수도 있고요.”
세라는 혹시 몰라 괜히 7월까지 없는 일정을 만들어 답했다.
“그래? 그렇게 늦어졌나? 흠, 조금 겹칠 수도 있겠네.”
“뭐가 겹쳐요?”
뭐가 겹친다는 건지 더 불안해진 세라가 바로 답했다.
“그전에, 너 권종선 작가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세라는 귀를 의심했다. 친하다니…?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긴, 저번 드라마 배역이 꽤 분량이 있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네.”
그는 황당한 세라의 표정을 마치 어떻게 알았는지 놀란 표정으로 착각한 듯했다.
“누가… 그래요?”
세라는 제멋대로 단정 지어 버리는 남 실장의 생각을 고쳐주고 싶었다. 누구 때문에 일 년 넘게 쉬었는데.
“어제 권 작가 전화 왔었어. 다음 드라마 준비 중인데 마침 너랑 딱 맞는 배역 나왔다고, 또 같이 하고 싶다고 하더라?”
세라는 기가 막혔다.
“너랑 친하다는데 전화를 안 받는다고 나한테 했더라고. 너 번호 바꿨냐?”
안 받은 게 아니라 세라가 수신 차단을 한 것이었다. 다신 그녀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실장님. 뭔가 잘 못 알고 계신…”
“번호야 어쨌건, 6월 한 달만 촬영 스케줄 잘 조정해 봐. 내가 장원이한테 얘기 해놓을 테니까. 너 이럴 때 작품 연속으로 하면 인지도 팍팍 쌓아놓고 좋잖아. 정 안되면 한 달 정도는 겹쳐도 괜찮고. 안 그래?”
남 실장이 세라의 말을 자르고, 다리를 거나하게 꼬면서 말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사람이 옷을 못 따라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안 해요.”
“뭐?”
건호가 금방 비서가 놓고 간 차를 들다 말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안 해요. 저 권 작가랑 안 친하고 다시는 같이 작업하기 싫어요.”
세라가 이렇게 단호하게 자기 의견을 말한 건 처음이었다. 남 실장도 놀란 표정이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래… 둘이 뭔 오해가 있었다고 치고. 근데 네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 작가가 널 찍었다고. 뭔 의미인지 몰라?”
“맘껏 휘두를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나 보죠. 그 사람 제 연기 볼 때마다 깎아내리기 바빴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대표님이…”
“대표는 내가 알아서 얘기할게. 네가 한다고만 말하면 대표도 생각 바꿀 거야. 그리고 이 판에서 그런 사람도 겪어보고 그러는 거지 뭘 새삼스럽게. 아니, 네가 주연급이야? 작가, 감독 따져가면서 일할 레벨이냐고. 하, 이게 진짜.”
세라의 톤이 높아진 만큼 남 실장은 더 언성을 높였다. 그는 스타급 배우나 유명한 감독, 작가들 앞에서는 싼 티가 날 정도로 비위를 잘 맞추면서 세라 같은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해졌다. 주희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성격이었다.
예전 권 작가의 경우처럼 조건에 안 맞는 사람이라면, 그게 감독이든 작가든 강하게 부딪치고 선을 긋는 게 주희였다. 그녀의 장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했고, 남 실장의 말마따나 그렇게 대표가 사고를 치고 오면 달려가서 해결하는 사람이 그였다. 가서 어떤 접대와 아부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때론 자존심을 굽혀야 할 때 그는 대표를 대신했다.
세라는 말없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이렇게 상대방이 윽박지르는 데에 약해지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세라는 마지막 반항을 했다.
“대표님이 저 다음에 최하늘 작가님 드라마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확정은 아니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했던 서 대표의 말을 떠올렸다.
“아, 그거? 그건 예지가 들어가기로 했어. 벌써 얘기 끝났고. 그러니까 권 작가 드라마 타이밍도 좋잖아. 바로 작품 들어가는 게 뭐 쉽냐?”
건호가 팔을 소파에 기대며 말했다. 세라를 보는 표정이 넌 이제 도망칠 곳이 없다는 듯 의기양양했다.
“너 나중엔 영화하고 싶다며. 권 작가가 이번 드라마 잘 되면 배우들 한두 명 박성우 감독한테 꽂아준대. 권 작가랑 박 감독이랑 나랑 같은 대학 출신인 거 몰라? 우리 골프 모임도 같이 해. 아무튼 나도 잘 얘기해 줄 거라고.”
건호는 어떻게든 설득하려는지 이번엔 달래는 투로 말했다.
박성우 감독은 상업영화로 나름 성공한 감독이었다. 그런데 세라는 그걸 떠나서 권 작가와 남건호가 지금도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은 게 께름칙했다. 종선과 건호가 한때 CC였었고 지금도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은 업계에선 다들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싫어하는 두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미 세라는 박 감독에게 거부감이 느껴졌다.
생각이 길어진 세라를 보고 설득당하고 있는 걸로 착각한 듯 남 실장이 말했다.
“회사에서 하라면 해. 언제까지 회사가 너한테 퍼주기만 할 순 없잖니?”
“죄송합니다. 저 안 해요.”
“근데 저게…”
작게 말하고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남 실장이 뭐라고 하는 말이 들렸는데 듣지 않고 나왔다. 남 실장이 세라를 붙잡으려는 듯 뒤따라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실장니임~!”
장예지였다. 세라보다 한참 후배인 그녀는 가수 지망생이었다가 배우로 전향한 케이스였다. 예지는 연기나 외모가 엄청나게 특출나진 않았다. 그렇다고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 대표의 안목을 아는 회사 직원들은 대표가 왜 저런 연습생과 계약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실은 예지는 남 실장이 주식 모임에서 알게 된 어떤 돈 많은 벤처 기업가의 딸이었다. 곧 그녀를 데뷔시켜 주는 조건으로 십수억을 회사에 투자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원래의 서 대표는 돈이 아쉬워도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타협하는 법이 없는 사람인데 그녀도 약점은 있었다. 아무리 본인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일이라도 남 실장이 하는 일이면 마지못해 승낙하곤 했다. 남 실장은 세라 들으라는 듯 일부러 과장되게 그녀를 반겼다.
“아이고! 우리 장 배우. 대본 보느라 바쁠 텐데 어떻게 왔어. 얼른 들어와.”
뒷모습이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고 애써 힘줘 걸었지만, 세라의 표정은 쓸쓸했다.
* * *
세라는 로비의 회사 카페에서 장원의 것까지 커피를 시키고 앉아 있었다. 장원은 겨울에도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찾는 얼죽아였다. 작은 테이블 위에는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가 두 잔 놓여있었다. 자기 것도 아이스로 잘못 시켜버린 세라의 손이 커피로 향했다. 그녀는 아까 실장실에서 나온 이후 속이 답답했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 들어가는 느낌에 움츠러들었다. 잠시 후 속이 시원해지며 답답함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얼죽아들은 다들 속이 답답한 건가…?”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세라의 입에서 독백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에 누가 들었을까 흠칫 놀랐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멀리 반투명한 로비 창밖으로 검은 밴이 뒤편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게 얼핏 비쳤다. 장원의 전화가 걸려 오고 세라는 커피를 들고 뒷문으로 향했다.
“대표님이 분명 앞으로 권 작가 작품에 우리 배우 넣지 말라고 했는데, 남 실장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남 실장과의 일을 가만히 듣던 장원이 소리쳤다. 분이 안 풀리는 듯 몇 번 운전대를 내리치다가 다시 말했다.
“너 설마 한다고 한 거 아니지?”
“설마요…”
“잘했어. 신경 쓰지 마. 내가 이따가 대표님한테 전화할게.”
장원이 백미러로 세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 마세요! 대표님 정신없으실 텐데. 귀국하시면 그때…”
세라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원이 말을 끊었다.
“세라야. 남 실장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야. 배우들을 그냥 돈벌이 물건으로 생각한다고. 내가 이 짓 오래 한 건 아니지만, 그동안 괜찮은 유망주들 수도 없이 보낸 인간이 남 실장이야. 작품 보는 눈도 없고, 사람 보는 눈도 없다고.”
“알아요. 그런데 이번엔 제가 직접 대표님한테 말할게요. 오빠 마음 아는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한데 이번엔 꼭 제가 할게요. 어차피 이틀 후면 들어오시잖아요.”
백미러로 비쳐 보이는 세라의 눈빛이 의외로 단호했다. 그녀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답답하기도 한 장원은 대꾸 없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목적지가 없는 운전이었다.
“대표님한테 들었어. 그 작가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근데 또 그 사람 작품에 들어가라니 말도 안 되지. 일단 알았어. 대신 꼭 말하는 거다?”
“네. 꼭…”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조금 전 세라의 단호했던 모습을 처음 본 장원도 침묵에 동참했다. 운전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게 차는 마포에서 어느새 세라가 사는 상암동을 향하고 있었다.
“어디 조용한 데 바람이라도 쐬고 올래?”
계속 신경이 쓰였던 장원이 슬쩍 물었다. 세라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말했다.
“오빠 원래 오늘 쉬는 날인데 안 힘들어요?”
“괜찮아. 나도 사람 많은 데 있다가 와서 그런가. 좀 답답해서 그래. 한강 어때? 내가 조용한 데 아는데.”
그녀는 뭐라고 말할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책방… 가실래요?”
백미러로 비치는 장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세라가 말한 곳은 예상 밖의 장소였다.
잠시 후 차는 자유로로 방향을 틀었다.
장원은 차에 관심이 많았고 운전을 좋아했다. 그리고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의 도로를 좋아했다. 도로 위의 차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서 운전하는 맛이 최대화되는 시간이었다. 그 두 시간 동안은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유로웠고, 곳곳으로 납품을 가는 화물차도 대부분 이미 떠난 뒤였다. 노란색 학원 차들만 조심하면 해가 떠 있는 시간 중 가장 한적한 시간이었다.
서울 구단의 지명을 받고 충청도에서 상경할 때 아버지의 중고차를 갖고 왔다. 훈련 때문에 기회는 많이 없었다고 쳐도 서울에서의 운전은 도무지 적응하기 어려웠다. 시원시원하게 밟고 싶은데 아침이나 저녁이나 이놈의 서울 운전은 굼벵이가 따로 없었다. 차가 문제인지 길이 문제인지. 그냥 사람이 넘쳐나는 게 문제였단 걸 알게 되었을 때 1군에서 밀려났다.
프로 지명만 받으면 꽃길만 걸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돔구장에서 멋지게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겨우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했는데 조급한 마음에 무리한 도루를 하다가 아웃이 됐다. 1점 차로 뒤진 9회 말이었고 하필 개막전이었다. 신인인데도 개막전 명단에 포함된 이름 ‘구장원’은 팬들에게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았다. 그마저도 빠르게 잊혔다. 장원은 오직 1군 콜업만 기다리며 2군에서 몇 년을 버텼지만 결국 방출당했다.
이듬해 중학교 야구부 코치 일자리를 겨우 구했다. 장원은 야구만 알고 살았고 은퇴 후에도 순수하게 야구가 좋아서 학교로 갔다. 그런데 가르치던 학생 중 몇이 장원의 개막전 사건을 알고 소문을 냈다. 아이들이 뒤에서 흉보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그런 마음도 사라졌다. 일자리를 마련해 준 예전 코치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치맛바람 좀 날리는 학부모들에게서 자기에 대한 불만을 듣고 있을 게 뻔했다.
코치를 그만두고 방황할 때쯤 프로시절 대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스프링 캠프에서 같은 방을 썼던 사이였다. 은퇴한 선배는 야구 에이전트 회사를 차렸는데 2년 만에 수도권 구단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치는 에이전트가 되었다.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술 사준다는 말에 나갔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연예계에도 인맥이 닿았던 선배는 장원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 야구만큼은 아니지만 촉이랑 눈썰미가 좋아야 하고, 너 좋아하는 운전 많이 하는 일 있는데 해볼래?
연예인 매니저라니. 체력 좋은 운동선수 출신을 선호한다는 말에 솔깃했다. 운동밖에 한 게 없는데 야구판을 떠나려니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고민이 많던 차였다.
장원은 미련 없이 야구계를 떠났다. 그리고 그해 서주희 대표와 아직 신인이던 리나를 만났다. 야구계에선 한참 전에 묻혔던 장원은 시간이 지나 이 세계에서는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한창 운전을 즐기는데 한 승합차가 장원의 눈에 들어왔다. 차에는 예전 장원의 소속 구단 엠블럼이 새겨져 있었다. 장원이 야구했던 시절에 비해 차가 요즘 모델로 바뀌었지만, 일산으로 옮긴 2군과 1군을 오가는 차량임을 알 수 있었다. 장원에게 아직 강렬하게 남아있는 엠블럼이 눈에 들어오면서 잠깐 옛 생각이 났다.
매니저 일을 제의받고 검색해 보았을 때 3D 업종이 따로 없다는 평이 많았다. 힘들긴 했다. 일하는 시간과 페이의 차이가 그래프로 그리면 한없이 반비례로 치달았다. 같이 입사했던 두 살 어린 유도 선출 녀석은 반년을 채 못 버티고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장원은 물러날 곳이 없었다. 여기서도 버티지 못하면 끝장이었다. 체력은 자신 있었다. 스프링 캠프에서도 성적은 민망했지만, 지옥 훈련만큼은 항상 끝까지 버텨냈다. 야구는 스포츠 중에서 난이도로 치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종목이다. 경기 중에는 가만히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아 보여도 뒤에서 갈고 닦는 시간은 축구, 농구보다 많다고 자부했다.
버티고 버티다 보니 금방 적응했다. 배고픈 건 야구할 때도 늘 겪던 일이라 견딜 만했다. 그마저도 리나가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하자 상황이 나아졌다. 몰래 김밥 한 줄 먹기도 스태프들 눈치를 보던 시절에 비해 여유가 생겼다. 시간적 여유라기보다는 심적인 여유였다. 담당 배우가 잘나가니까 장원도 괜히 자부심이 생겼다. 거기다 예쁜 연예인들을 직접 보는 건 덤이었다.
매니저 3년 차에 리나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가 OTT를 통해 글로벌 대박이 났다. 덕분에 뉴욕, 런던, 파리, 도쿄에 두바이까지 유명한 도시에 유명한 호텔은 원 없이 다녀봤다. 신인 시절 함께 울고 웃던 리나는 점점 다른 세상 사람이 되어갔다. 리나와 오래 일하고 싶었는데 회사에서는 담당 매니저를 바꾼다는 결정이 내려왔다. 그놈의 외국어가 문제였다. 아쉬웠지만 한계에 부딪혔을 때 물러나는 게 처음이 아니니 금방 받아들였다.
경력이 아예 끝나는 건 아니었다. 이 회사에서는 3~4년만 잘 버티면 팀장급 매니저가 될 수 있었다. 거기다 리나라는 초대박 스타를 담당했던 장원에게 팀장 자리는 이미 따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리나의 매니저가 교체되면서 장원에겐 잠시 휴식이 생겼다. 매니저 일을 시작하고 휴가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했던 터라 꿀맛 같은 시간이었다. 서 대표가 어떤 일을 맡길지 기대하며 오랜만에 맘껏 놀았다. 리나가 그동안 고마웠다며 따로 챙겨준 용돈도 두둑했다. 몇 년 만에 내려간 고향에서 부모님께 좋은 옷도 사드리고 친구들에게도 기분 좋게 한 턱 쐈다. 혼자 제주도로 여행 가서 친구들은 이미 한 번씩 가봤다는 게스트하우스 파티도 즐겼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대표의 전화가 걸려 왔다. 며칠 더 쉬고 싶었지만, 다음 일을 맡기려 한다는 말에 바로 회사로 달려갔다. 태어나서 누군가 자신을 신뢰한다는 느낌을 2년 차 때 서 대표에게서 처음 느꼈다. 낮술이나 하자며 일식집으로 데려간 대표는 생각지도 못 한 말을 꺼냈다.
“장원야. 한 번만 더… 아니, 딱 한 명만 더 맡아서 로드 뛰어줄래?”
장원이 알기로 서주희 대표는 일개 매니저와 단둘이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그런 대표가 자기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부탁하고 있었다.
놀라긴 했지만, 장원은 사실 나쁘지 않았다. 팀장급이 되면 현장보다는 사무실에서 매니저들과 전화로 일을 해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자신은 아직 삼십 대 중반에 체력도 괜찮았고 현장이 더 좋았다. 페이와 다른 조건도 팀장급으로 맞춰주고 잡일 없이 한 명만 전담하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담당 배우는 리나와 예고 시절부터 친했던 백세라였다. 인사만 몇 번 했었지만, 그녀라면 크게 불편해할 것도 없어 보였다. 리나가 아무나 친하게 지내진 않았으니까.
소식을 들은 리나에게 먼저 전화가 왔다. 어렸을 때부터 정말 친한 친구고 좋은 배우이니 자기한테 신경 써준 것처럼 잘 도와 달라고. 일본 일정이 끝나자마자 헐리우드 영화 출연 때문에 미국에서 정신없을 텐데도, 친구 챙기는 마음 씀씀이가 예뻤다.
이미 리나에겐 자기보다 경험 많고 외국어도 잘하는 매니저 두 명이 붙어 있었는데 자기만큼 리나를 잘 챙길지 괜한 걱정을 했다. 동시에 리나 같은 대스타를 한 명 더 자기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매니저 일이 특별한 건 없었지만 장원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는 편이었다.
세라가 또 한순간에 무너질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가볍게 한강이나 가서 바람이나 쐬자는 말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왜 하필 한정서라는, 정체가 밝혀진 그 작가의 책방인지 의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세라는 말렸지만, 일본에 있는 서 대표에게 먼저 말할지, 백미러로 보이는 세라의 상태는 어떤지가 더 중요했다. 장원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세라의 눈치를 살피며 묵묵히 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