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담 장편소설
정서는 나른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소설가의 일상은 어떠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마치 무료함 그 자체라고 대답할 사람 같았다. 공간은 고요했다. 창가에 놓인 스피커에서 정서가 좋아하는 인디 음악만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옆에 놓인 하얀 찻잔 속의 새까만 커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출근 시간이 지나 인적도 드문 오전의 이 시간이 정서에겐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창 책에 집중하던 정서의 소확행을 무참히 박살내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평소 은은하게 울리던 종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가끔 이 시간에도 손님이 오긴 했지만, 조용히 책만 골라 계산하고 갈 뿐 자신의 시간 자체를 방해받을 일은 거의 없었다.
“한정서 작가님 맞으시지요?”
윤 피디는 거친 행동과는 다르게 의외로 겸손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을 채널 K의 드라마 감독이라고 밝힌 윤 피디는 정서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가타부타 배경 설명 없이 단도직입적인 말에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출판사랑 얘기하시면 될 텐데요. 전 드라마는 안 씁니다.”
정서가 쓴 소설은 예전에도 판권이 팔린 적이 있었다. 2차 저작물 계약은 출판사의 일이었기에 그때도 정서는 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제안은 달랐다.
“각색이야 제가 하면 되는데, 고문 역할로 모시고 싶어서요. 출판사에서도 작가님이 절대 안 하실 거라고 말해주긴 했는데 직접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싫습니다. 계약 문제는 출판사랑 얘기하시고 이만 돌아가시죠.”
조금의 고민도 없이 냉랭한 정서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윤 피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얻는다며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월요일과 목요일, 매주 두 번씩 정확히 오전 열 시 삼십 분에 찾아와 정서의 작은 행복을 ‘침해’했다. 세트장도 같은 파주에 있다고 꼬드기질 않나, 알바생과도 친해져 둘이 수다를 떨지 않나. 결국 정서는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번잡한 일은 질색이었지만 그나마 오전의 행복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 피디 놈은 한 달이 아니라 일 년이라도 그 짓을 반복할 만한 인간이었다. 이런 방송국 놈들 같으니라고. 대신 배우들의 연기나 스토리 진행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공기업을 다룬 원작 소설의 배경에 대한 조언만 구하고 싶었던 윤 피디도 만족했다. 녀석은 인터넷 어디선가 정서의 작가 프로필을 본 후로는 자기가 한 살 어리다며 대뜸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당신 같은 동생은 싫다고 차갑게 잘라내도 녀석은 매번 능글맞게 “에이 형님도 참”하며 대꾸하기 일상이었다. 이상한 녀석이었다. 한정된 대인관계만 추구하던 정서의 소수정예 울타리 안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놈이었다.
삼십 대 후반을 바라보는 정서는 별의별 인간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사람을 쳐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1. 누군가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며 접근한다. 2.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3. 호의에 무관심과 냉대로 대응한다(단답형이 최고다). 4. 그 사람이 알아서 떠난다.
창끝처럼 뾰족하고 차갑게 대화를 정리하는 데에는 당해내는 사람이 없었다. 끊어내고 싶은 사람이 울타리 안으로 발을 디디려 할 때 정서의 창은 공격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목적이 어찌 됐든 다들 알아서 떠나갔다. 그런데 이 피디란 작자는 달랐다. 마치 아지랑이 같은 녀석의 대응에 찌를 곳 없는 창은 승리할 수 없었다. 정서의 첫 패배였다. 방송국 사람들은 다 이런 건가 싶었다. 소확행을 추구하는 삶에 열대성 저기압처럼 제 마음대로 쳐들어와 마구 헤집어 놓은 놈. 이후 정서는 문 앞의 입간판 맨 아래에 빨간 분필로 ‘방송국놈 출입 금지’라고 적어놨다. 어차피 녀석이 상관하지 않을 건 정서도 알고 있었지만, 무엇이라도 복수는 하고 싶었다. 그걸 보더니 “이 형 꽤 귀여운 구석이 있네” 같은 징그러운 멘트를 날릴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당장 지워버리려다가 또 지는 기분이 들어 어쩔 수 없이 놔둔 입간판의 글자는 붉게 바래고 있었다.
이곳은 책방이었다. 이십 평 남짓한 공간에 월넛 표면의 책장이 내부를 둘러쌌고 가운데에는 큼직한 진열대가 자리했다. 정서는 햇빛이 잘 들길 원했고 그중에서도 노을을 좋아했다. 그래서 책방도 서향이었다. 비록 4~5시 이후에는 맞은편 건물이 햇빛을 가렸지만, 은은한 노을빛이 간접 등처럼 책방을 비추는 분위기가 좋았다. 조명도 온통 주광색 무드 등으로 꾸며 브라운 톤의 책장과 잘 어울리고 있었다. 카운터에서 책을 읽다 말고 가끔 고개를 들어 책방을 바라보면 더할 나위 없이 평안했다. 「운정책방」. 모든 게 완벽한 정서만의 공간이었다.
그때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잠시 떴다가 사라진 메시지의 발신인은 ‘피디(놈)’이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다음 주 촬영 일정 공지 어쩌고 하는 글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서는 무시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피디를 제외하면 소중한 오전의 정적을 깨는 것은 가끔 오는 손님과 주문한 책을 가져다주시는 배송 기사님뿐이었다. 그런데 요즘 유독 예상 밖의 인물들이 자꾸 나타났다.
현관문에 달린 종이 맑게 울렸다. 정서는 ‘띵동’ 하고 우는 전자 벨소리도 싫고 저렴한 종의 경박한 소리도 싫어했다. 그는 인터넷과 유튜브를 몇 날 며칠을 뒤지더니 결국 맘에 드는 종을 찾아냈다. 3개의 작고 짧은 종과 청동으로 된 잉어 장식이 길게 매달린 종이었다. 종이 흔들리며 내는 맑고 은은한 소리는 절에서 듣는 그것과도 같았다. 정서는 종이 울릴 때면 디자인과 소리가 모두 완벽한 제품을 고른 자신의 안목에 내심 만족하곤 했다.
그런 종을 시끄럽게 울리며 들어오는 사람이 누군가 싶어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들었다. 평화를 방해한 사람은 아는 얼굴이었다.
“너 드라마 촬영 나간다며?”
인사도 없이 대뜸 빨랫감 던지듯 말을 뱉으면서 등장한 사람은 오정은이었다. 찌푸려졌던 정서의 미간이 조금 풀어졌다. 익숙하다는 반응이었고 그 사람이 정서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알았대요?”
“효민이가 그러더라. 저번 주에 너 없길래 물었더니 촬영장 나갔다고 하던데.”
오전엔 책만 읽는 정서는 오후에는 본격적으로 노트북을 켜고 작업을 시작했다. 한창 글을 쓰는데 손님이 오면 신경이 쓰여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래서 고용한 오후 알바생이 효민이었다. 대학 4학년인 그녀는 잠시 휴학하고 자격증을 따며 스펙을 쌓는 중이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세상.
효민은 동네에서 작은 슈퍼를 운영하는 부모님께 부담드리기 싫다고 수십만 원의 인터넷 강의비를 스스로 벌기 위해 파트타임을 찾았다. 편의점보다 일도 훨씬 적고 손님이 없으면 공부해도 되는 책방 알바는 그녀에게 마침 딱 좋은 자리였다. 물론 정서에게도 작업에 집중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효민 덕에 정서는 카운터 뒤의 테이블에서 손님을 신경 쓰지 않고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오전의 독서, 오후의 작업 루틴을 깨지 않는 정서가 촬영장에 나가게 됐다고 했을 때 효민은 자기가 더 들떴었다. 효민은 눈보다 빠른 손으로 SNS와 인터넷을 뒤지며 드라마 관련 정보를 찾아보고는 배우들 이름을 줄줄이 읊었다. 노래도 인디 음악이나 옛날 노래만 듣는 정서가 요즘 배우를 알 턱이 없었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나섰던 길의 첫날에 정서는 세라를 보았다.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정은은 허락도 없이 카운터 앞으로 간이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양손으로 턱을 괴며 설명을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에 정서는 짧은 한숨을 쉬고 결국 책을 덮고 말했다. 오늘도 소확행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커피?”
동사가 빠진 짤막한 물음에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커피 향이 책방 안에 뭉근하게 퍼졌다. 정서는 머신을 쓰지 않고 항상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렸다. 정은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스무 살 코흘리개 때부터 봐온 녀석이 남자로 보이는 건 아니었다. 다만 글을 쓰고 책방을 운영하고 커피를 내리는 정서의 모습은 여자가 보기에 꽤 매력 있어 보였다. 자신은 지난 인연을 잊지 못해 사십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혼자였지만, 녀석은 아까웠다.
소개팅이라도 시켜줄지 진지하게 고민할 무렵 정서가 카키색 머그잔에 든 커피를 들고 왔다. 정서는 항상 스모키한 과테말라 원두를 썼다. 처음에는 너무 쓴맛에 질색했는데 정은도 어느새 이 맛에 길들어져 버렸다. 하지만 오늘 정은은 정서가 풀어내는 이야기에 커피 식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들었다.
정서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녀석은 기승전결을 순식간에 끝내 버리곤 해서 중간에 건너뛴 연결고리들은 질문으로 들어야 했다. 이래서야 여자랑 제대로 대화는 할는지 걱정이었다. 글을 세심하게 잘 쓰면서 말은 어쩜 이리 맥이 딱딱 끊기는지. 어쨌거나 겨우 사연을 짜깁기 해서 흐름을 파악한 정은이 말했다.
“별종이네. 뭐 원래 그쪽 사람들이 다 특이하긴 하지만.”
정은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간결하게 말했다. 중간에 말을 멈추고 그 피디라는 사람에 대해 검색해 보기도 했다. 나름 업계에서는 인지도가 있어 보였다. 작품에 작가를 따로 쓰지 않고 마치 영화감독처럼 자기가 직접 대본을 쓰는 걸로 유명했다.
입봉 작품부터 드라마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시청률이 꽤 나왔다. 보지는 않았지만, 정은도 들어본 제목이었다. 이후 두 작품을 더 찍었는데 또 반응이 꽤 좋은 편이었다. 인터뷰 기사도 보았다. 말에서도 인상에서도 자기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 묻어 나오는 캐릭터였다.
“이런 사람이 네 책에 꽂혔다? 대본 각색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고문 역할만 해달라?”
“응. 드라마 배경이 공기업인데 자기가 잘 모르니까. 현실에 맞는지 봐달라고.”
정서가 두 손 들고 항복했던 그날, 피디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원래 자기는 본인이 쓰고 본인이 찍어야 작품이 잘 나온다는 주의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원작이 마치 자기가 쓴 것 같다며 원칙을 깨고서라도 꼭 자기가 찍고 싶다고.
“내가 그렇게 해보라고 할 때는 싫다더니, 이렇게 하게 되네?”
정은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직접 하는 건 아니라니까… 그냥 고문 같은 거예요.”
정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머리를 거칠게 긁적이며 말했다. 정은은 그런 정서를 보고 피식 웃었다. 옛 생각이 났다.
- 정서야. 대본이나 시나리오 써볼 생각은 없어?
- 나는 내 글에 누가 참견하는 거 싫어서…
- 에이, 요즘 누가 책을 내? 등단 작가들도 굶는 세상에. 지금은 드라마나 웹소설을 써야 돈을 번다고. 내가 그쪽 인맥 연결해 줄게!
- 싫어요. 이리저리 휘둘려서 쓰고 싶은 글 못 쓰는 거 딱 질색이야. 책 안 팔리면 굶지, 뭐.
정은이 본 정서의 글은 냉철한 이성과 따스한 감성이 공존했고, 작은 일에서 얻은 영감을 주제로 글을 쉽게 써 내려갔다. 작법을 배운 적도 없이 문학 동아리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주제에 글을 신선하게 쓰는 재능이 있었다. 아마 여기서 그 피디라는 사람이 동질감을 느낀 것 같았다. 피디의 이력을 보니 그도 동일한 부류였다.
그리고 어둡거나 무거운 다른 소설과 달리 퍽퍽한 요즘 세상에 힐링처럼 나타난 정서의 책은 꽤 잘 팔렸다. 마치 억울한 일을 당한 모든 이들의 대변이라도 하듯 철저히 권선징악의 플롯을 따랐다. 정서가 어쩌다가 이런 글만 쓰게 됐는지는 정은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금기어처럼 되어버린 옛 연인의 이름이 떠올랐다가 얼른 머릿속에서 지웠다.
요즘 정서의 글은 무언가 벽에 부딪힌 것 같았다. 작가라면 누구나 ‘내글구려’병을 달고 살지만, 정서의 경우는 달랐다. 비전공자일수록 좋은 코치가 필요하다. 발전이 없는 글은 독자들이 먼저 눈치채고 책을 집지 않는다. 누군가 곁에서 잡아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녀석은 다른 사람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이십 년 가까이 봐 온 자신조차도.
어쨌든 그래서 건넨 말이었다. 책도 좋은데 다른 사람과 공유도 하고 지적도 받으며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처음부터 소설만 쓴 정서와 달리 방송 작가로 시작했던 정은도 이미 겪어본 일이었다. 하지만 권유할 때마다 질색이라며 칼같이 잘라내는 통에 포기했었다. 정서는 싫다고 말한 일은 절대로 하는 법이 없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드라마에 참여하게 됐다니. 사실 정서의 첫 책도 판권 계약이 됐었다. 신인 작가로서는 엄청난 대박이었다. 그런데도 정서는 계약을 출판사에만 맡긴 채 영상화가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 효민이에게 소식을 접했을 때 순간 들떴다. 참고 참다가 주말이 지나고 오늘에서야 정서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래. 뭐, 고문이면 어떻고 작가면 어떻냐. 어쨌든 네 책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니까 됐다. 기왕 하는 거 잘 해봐.”
정은은 이 조용하고 까칠하고,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고집불통에게는 일단 이거라도 됐다 싶었다. 혹여라도 촬영 과정에서 매력을 느낀다면 언제든 정서가 드라마 작가로도 성공할 수 있을 녀석이라 믿었으니까.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정서는 수다 떨기에 좋은 상대는 아니었지만, 이런 침묵에는 정은도 익숙해져 있었다. 한동안 말 대신 커피만 입에서 맴돌았다. 침묵의 공간을 메우는 음악도 있었다. 계산대 옆에 인테리어 소품이 자리한 책장에는 겉이 목재로 된 스피커가 있었다. 커피 맛만큼이나 소리에도 예민한 정서는 스피커 고를 때도 청음숍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몇 주간 발품을 팔았다.
적당히 작게 틀어놓은 스피커에서 깊은 울림으로 ‘다린’이라는 인디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책방 분위기에 어울리는 잔잔한 노래에 정서는 조용히 흥얼거렸다. 책방 주제에 사람 나른하게 만든다고 속으로 생각하던 정은이 침묵을 깼다.
“촬영은 어땠니? 감독들이 일할 때는 또라이처럼 구는 사람 은근 많은데. 그 감독도 혹시 그런 거 아니야?”
방송계에 꽤 오래 일했던 정은은 그런 사람을 많이 봤다. 편집자를 잘 만나야 하는 출판계나 감독을 잘 만나야 하는 방송계나… 이 판이나 저 판이나 사람 잘 만나야 하는 건 같았다. 처음부터 어떤 사람과 일하느냐가 그만큼 중요했다. 걱정스레 물은 말에 정서는 그저 흥얼거리다 고개만 살짝 저었다.
“친절하던데요. 스태프들도 잘 따르는 것 같고.”
흔들흔들. 리듬 따라 정서의 고개가 까딱거렸다.
“의외네.”
“통제를 잘하는 듯.”
정서는 여전히 말하기 귀찮다는 듯 대화보단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불쾌했겠지만, 정서를 아는… 아니 정서와 친한 소수의 사람들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최소한 손님에게는 친절해서 다행이라고들 말했다.
“감독이 아무리 뛰어나도 연기도 중요한데, 배우들은 어때? ”
“응? 그럭… 저럭.”
순간, 정서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정은은 놓치지 않았다. 단순한 녀석 같으니라고. 정은은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이런 반응을 본 적이 있었다. 정서의 전 여자친구가 손님으로 이 책방을 처음 찾았을 때. 오래전에 헤어졌지만, 모든 면에서 뚱한 정서가 다른 자극에 반응을 보인 건 지금까지 그때 한 번뿐이었다. 정서는 아마 연예인을 처음 봤을 테고 누군가 설레게 만든 사람이 있었겠지. 정은은 돌아가는 길에 출연진을 살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튼, 시작한 김에 잘해봐. 계약금 들어오면 한 턱 쏴라?”
더 있어봤자 얻을 것도 없고 들을 건 다 들었다고 생각한 정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턱 쏘라는 말에 모르쇠로 딴청을 피우는 정서의 표정이 얄미웠다.
“가요.”
정은이 떠난 책방. 정서는 노트북을 켰다. 당연히 아무도 없는 가게인데도 괜히 두리번거렸다. 인터넷 창을 띄우고 검색어를 눌렀다.
신의 직장 드라마.
자신의 책이 원작인데도 촬영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드라마를 검색했다. 아직 편성도 안 된 드라마 정보를 사람들이 왜 올리는지 이해하지 못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도움이 되었다. 정서는 드라마와 더불어 원작에 대한 평이 담긴 글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 그가 궁금한 건 딱 하나, 딱 한 명이었다. 마우스 휠이 거칠게 내려갔다. 출연진의 배역과 프로필이 소개되는 창에서 정서의 손이 멈췄다.
- ‘재은’ 역 : 백세라.
92년생이면, 서른하나… 둘인가?
데뷔한 지 11년 차. 지금까지 단역으로만 활동. 이번이 두 번째 조연 작품인가?
정서의 눈이 빠르게 텍스트를 훑었다. 정보는 금방 머릿속에 저장됐다. 시선은 곧 한곳에 머물렀다. 세라의 프로필 사진. 그 안에는 버건디 색 원피스를 입고 웃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세라는 예쁜 얼굴이었다. 그런데 아주 조금, 어떤 무언가가 부족해 보이기도 했다. 정서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에서 그 부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직 조연 배역만 들어오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조연 사이에서는 돋보이지만 그렇다고 정상급 주연으로 활약하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배우. 시장에서는 아직 그녀를 그렇게 평가했다.
전지현과 송혜교가 이 세상 같지 않은 미의 극치라면, 세라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빛이 나는 현실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 내면의 무언가. 정서는 그것에 더 이끌렸다.
버건디 원피스를 입고 지은 미소와 그녀의 눈을 통해 보인 그 무엇이, 한여름의 발간 노을처럼 다가와 정서의 마음에 새겨졌다.
하지만 그 ‘무엇’이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가면 속의 우울? 태양 속의 흑점? 딱히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정서는 그날 세라의 모습에서 그 내면을 확실히 보았다. 열정이 넘치는 척하지만, 자신감이 부족해 보이는… 말과는 다른 어떤 행동에서 예전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꾸 마음 쓰이게 하는 여자였다.
문이 딸랑거리며 오전에만 가끔 들리는 손님이 들어왔다. 덕분에 정서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동시에 자신이 왜 노트북을 급하게 닫았는지, 모니터를 덮은 제 손을 보면서 어리둥절했다. 눈에서는 피로감이 느껴지는 게 화면을 얼마나 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황한 티를 애써 누르며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잠시 딴청을 부렸다. 혼자 구경하고 고르다가 때 되면 알아서 계산하고 가는 손님이었다. 정서는 손님이 책장을 살피는 것을 보고 아까 피디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세라의 촬영일은 다음 주 화요일이었다.
재은 역할을 조금 더 늘리자고 해볼까…
정서는 다시 노트북을 열고 피디가 메일로 보낸 촬영 일정 파일을 열었다. 슬쩍 보니 손님은 이제 책 한 권을 집고 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겨보고 있었다.
고문 역할만 할 뿐이라던 정서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컷…트!
윤 피디는 여느 다른 감독들처럼 확성기에 대고 호쾌한 ‘컷!’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커’와 ‘트’ 사이에 살짝 여운을 주어 말하는 게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와 함께한 다른 스태프들은 어색하다가도 묘하게 기대되는 그의 커트 소리를 내심 기다리곤 했다. 계속된 NG에 화가 나도, 한 번에 OK 사인이 떨어져도 그의 ‘컷…트!’ 소리는 한결같았다.
“잠깐만요… 염 감독님, 방금 오디오 살짝 씹혔죠?”
윤 피디의 뒤쪽에서 시커먼 음향 장비 앞에 앉아 헤드폰을 쓴 남자가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윤 피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자, 다시 갑시다. 서 과장, 반 템포만 늦춰서 다시요.”
서 과장 역을 맡은 남자 배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사를 되뇌었다. 오피스 드라마라 2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여느 사무실처럼 지어놓은 한 세트장. 오늘 촬영은 별다른 일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정서도 윤 피디의 근처에 앉아 뚱한 표정으로 촬영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전 촬영은 그다지 중요한 장면은 없어서 윤 피디도 웬만한 신은 대체로 한두 번에 넘기고 있었다. 처음엔 정서도 촬영이 신기했다. 스토리의 서사와 상관없이 촬영 장소, 복장, 등장인물에 맞는 장면들을 몰아서 찍고 나중에 편집하는 방식에 놀랐다.
앞뒤가 전혀 다른 장면을 찍는데도 대사와 감정에 순식간에 몰입하는 배우들도 멋있었다. 촬영장의 모든 상황을 기록하는 스크립터도, 이 모든 것을 나중에 편집실에서 눈이 충혈되도록 짜맞추는 윤 피디도 새삼 다르게 보였다. 무엇보다 온통 꼬인 시간의 흐름에도 막힘없이 착착 다음 장면을 세팅하는 스태프들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윤 피디의 지휘 아래 카메라 뒤 수십 명의 악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는, 하나의 오케스트라 같았다.
정서는 이게 정상인 건지 윤 피디가 잘하는 건지 나중에 정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자신이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윤 피디가 스태프들에게 자신을 소개해 줘서 사람들도 정서를 대우해 주고 있었지만, 가끔 이럴 때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아서 민망했다.
차에서 자다가 이따 올까…
괜히 일찍 왔다고 속으로 투덜댔다. 사실 윤 피디는 이날 오후에 오라고 했다. 그럼에도 일찍 온 이유는 세라 때문이었다. 세라의 연기를 제대로 보고 싶었는데 하필 다른 장면과 바꿔서 오후로 변경됐다니. 왜 일찍 왔냐는 윤 피디의 물음에 촬영장 재미를 느껴 왔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별말 없이 씩 웃는 윤 피디의 표정에 괜히 또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속으로 억울함을 감추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두 시간째 앉아서 지켜본 정서였다.
배우들은 대체로 정서가 소설을 쓸 때 이입했던 감정선을 잘 따라왔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쓴 원작에서 새로운 장면을 추가해 연결을 부드럽게 매조 짓는 윤 피디의 센스도 나쁘지 않았다. 떠오른 장면을 매끈한 활자로 써내는 정서의 재능과 활자를 장면으로 전환하는 윤 피디의 능력이 잘 맞아떨어졌다. 애초에 영상화는 아예 다른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정서는 자기도 모르게 점점 몰입하고 있었다.
처음 먹어본 촬영장의 밥차도 만족했다. 열악한 야외에서 만든 음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노부부의 음식은 맛있었다. 조연출인 정가현 피디는 요즘은 드라마 촬영은 그냥 근처 식당에서 먹는데 이곳 세트장은 너무 외진 곳이라 밥차를 불렀다고 했다. 널따란 뷔페 접시에 오늘 반찬으로 나온 불고기와 여러 반찬을 꾹꾹 담아와선 남김없이 해치웠다. 그런 정서를 윤 피디는 신기하게 쳐다봤다.
“오늘 무슨 바람이 부셨나?”
“뭐가.”
다 먹고 먼 산을 보며 딴청을 부리던 정서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루틴이 그렇게 중요하신 분이 오전 독서 루틴을 접고 여길 오셨다? 분명히 내가 오후에 와도 된다고 했는데?”
윤 피디가 능글거리면서 말했다.
“저도 놀랐어요. 오시긴 해도 졸거나 구석에 가서 빈둥거리실 줄 알았는데… 오전 촬영 내내 끝까지 계시다 밥까지 같이 드시네요.”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가현까지 거들었다. 웃는 표정에 말도 존대인데 은근히 구석구석 절묘한 단어로 정서를 휙휙 찌르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정서는 갑자기 관자놀이 부분이 아파져 오는 듯했다.
“말했잖아… 촬영 재밌더라고.”
“아, 그러셔요? 그러면 앞으로 사내 장면 오전에 더 찍는다?”
윤 피디와 가현이 장난기 넘치는 눈으로 정서를 쳐다봤다.
“한 번 일찍 온 것 가지고 되게 뭐라고 하네. 아, 몰라! 나 먼저 일어난다.”
괜한 성질을 부리고 일어나는 정서의 뒷모습을 보고 두 사람은 킥킥대며 웃었다.
“분명 뭐가 있는데… 가현아.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잖냐? 저 인간이 괜히 저럴 사람이 아니거든? 잘 살펴봐.”
“그럴게요.”
두 사람은 마저 식사를 이었다. 윤 피디는 식사가 느린 가현에게 속도를 맞추며 그녀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런데요 감독님. 한 작가님 꼭 촬영까지 같이할 필요는 없지 않았어요? 감독님이 각색한 대본에 조언만 받고 끝냈어도 되는 거였잖아요.”
중간에 물을 떠 온 가현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왜? 한 작가 싫어?”
“아니, 작가님이 싫은 게 아니라 감독님 여태 직접 쓰셨는데. 궁금해서요.”
윤 피디는 피식 웃더니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답했다.
“나랑 비슷해서.”
“어디가요? 완전 다른데.”
가현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똘끼 있는 거.”
“아… 인정.”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현에게 윤 피디는 한 대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글 보면 알아. 권선징악도 나랑 비슷하고. 알고 보니 한 작가 경영학 전공했더라고. 그런 사람이 장편을 세 편이나 냈어. 뭔가 정형적이지 않으면서 신선하고, 세상에 도전하는 느낌이랄까.”
“피디님도 심리학 전공인데 드라마 만드시고. 비슷하긴 하네요.”
고개를 끄덕인 가현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집중했다.
“문체 화려하게만 꾸미려는 다른 작가들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등단도 안 한 사람이. 그래서 책이 잘 팔렸나. 아무튼, 내 말은 기존 체제에 반항하는 똘끼가 있다는 거야. ‘나는 나만의 글을 쓰겠다.’ 이런 거?”
“그게 감독님이랑 비슷하다?”
“응. 나 입봉할 때 봤잖아. CP랑 싸우기도 벅찬데 카메라 장 감독이랑 신경전에다가 배우들 달래느라 난리였잖아.”
가현이 그때가 생각난 듯 손사래를 쳤다. 윤 피디는 정서의 원작을 읽기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이 작품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었다. 직접 원작자를 찾아내서 한 달 넘게 쫓아다니며, 다른 말로는 괴롭히면서까지 정서를 참여시킬 줄은 몰랐지만. 가현은 윤 피디와 같이 일하고 그의 스타일에 물들면서 윤 피디를 완전히 신뢰하게 된 사람이었다. 원작자라고 어디서 뚱하게 생긴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이해가 갔다.
“그러고 보니 원작을 안 봤네요. 시간 내서 읽어봐야겠네.”
“한 작가한테 내가 한 권 뺏어다 줄게. 오후 촬영 시작하기 전에 잠깐 쉬자.”
둘은 일어나서 잔반을 정리하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소나무 숲이 둘러싼 세트장 사이에 큰 느티나무가 운치를 더했다. 아직 추운 날씨에 제 몸을 가릴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한 모습이었지만 곧 연둣빛 새싹을 틔울 터였다. 두 사람은 그 아래 나무에 기대어 세트장 출입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서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