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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눈 오는 날의 촬영장

윤담 장편소설

by 윤담

촬영장에 갑자기 함박눈이 쏟아져 내렸다.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경기도 북부의 날씨는 변화가 심했다. 몇 시간 이르게 내리기 시작한 눈 때문에 촬영이 중단됐다. 현장은 제 몸보다 장비를 우선 지키려 덮을 것을 손에 들고 뛰는 스태프들로 어수선했다.


“야! 여기 빨리 덮을 거 가져오라고!”


한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 사람이 마치 흑곰처럼 얼굴만 겨우 보이게 롱패딩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니, 그러게 왜 굳이 이런 날 야외 촬영을 한다고…”


곰 같은 사내는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마치 주변 사람 들으라는 듯 불평을 가득 털어놓으면서 침을 퉤 뱉었다. 그는 뒷말을 줄였지만,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욕설이 들리는 듯했다.


“아이, 감독님 미안해요. 이번 회 마지막 야외 신이라 욕심 좀 부렸는데 누가 이렇게 일찍 내릴 줄 알았나?”


몇 미터 옆에 서서 스태프들의 철수 장면을 지켜보던 남자가 말했다. 곰 같은 사내보다 열 살쯤 어려 보이는데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능글맞게 달래주는 모습이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윤 피디, 내가 말했잖아. 여기 날씨 장난 없다고. 딱 봐도 금방 쏟아질 거라니까… 내가 여기서 촬영 한두 번 하나. 에이씨, 이게 뭔 난리야.”


그새 수건과 비닐을 한 아름 들고 온 스태프가 곰 같은 사내에게 우산을 씌워주려 했다. 그는 스태프에게서 우산을 빼앗아 내팽개친 채 카메라부터 덮으라고 또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묵직한 카메라 위에 임시로 덮어놓은 천 쪼가리를 빼내 목에 둘렀다. 거무죽죽한 그 천의 정체는 목도리였다. 그 모습에 윤 피디도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거, 살살 하시지 좀… 아무튼 장 감독님 오늘은 여기서 접고 이틀 후에 뵐게요. 푹 쉬셔.”


장 감독은 대답도 하지 않고 뒤돌아 손만 흔들며 멀어졌다. 손에는 카드가 한 장 들려있었다. 그새 윤 피디가 조연출에게 시켜 카메라 팀 데리고 맛있는 거나 먹고 들어가라고 건네준 법인카드였다.


“역시 곰 감독 달래는 데는 먹는 게 최고지. 자, 우리도 들어갑시다. 제가 욕심낸 건데 헛고생시켜 죄송합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스태프들을 해산시키고도 윤 피디는 아직 촬영장을 떠나지 않았다. 조명과 오디오 등 다른 촬영 팀들도 모두 철수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윤 피디도 걸음을 옮겼다. 베이지색 패딩을 입은 그의 어깨 위에도 눈이 켜켜이 쌓여 몇 번 털어낸 후 승합차에 올랐다.


“고생했어.”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윤 피디가 먼저 차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던 남자가 반겼다. 그는 따뜻하게 데워놓은 차 안에서 몸이 녹았는지 조금 졸린 표정이었다.


“별말씀을. 작가님도 고생했어요. 아이, 아깝다. 1시간만 늦게 내리지.”

“촬영 일정은 괜찮아?”

“중요한 장면은 다 찍었으니까, 편집만 잘하면 돼. 걱정 마셔.”


그때 갑자기 다가온 한 여자 스태프가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을 내리고 뭐라 말을 주고받더니 금방 창문을 닫고 차를 출발시켰다.


“조연출이잖아. 먼저 가도 돼?”

“막내가 촬영장에 뭐 놓고 왔대서 먼저 가래. 뒤차로 온대요.”


윤 피디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말했다. 작가와 피디 두 사람은 겉보기에 또래로 보였다. 이윽고 승합차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한 피디는 잠시 대본과 촬영 일정표를 보며 무언가를 끄적였다. 작가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파주 외곽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풍경은 저 멀리 야트막한 산들까지 온통 새하얬다. 눈길에 차가 속도를 내지 못하는 덕분에 작가는 하얀 나라를 조금 더 오래 만끽할 수 있었다.


“형. 오늘 세라 어땠어?”

대본집을 덮은 피디가 침묵을 깼다.

“형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세라 씨 뭐가?”


작가는 시선은 논밭에 둔 채 말했다. 들개인지 알 수 없는 개 두 마리가 하얗게 내리는 것들이 신기했는지 텅 빈 논바닥에서 신나게 점프하며 놀고 있었다. 누렇고 하얀 것들이 뛰노는 게 더없이 평화로워 작가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백세라 캐스팅하고 나서 촬영은 오늘 처음 봤잖아. 어땠냐고.”

피디는 슬쩍 작가가 보는 시선을 따라갔다가 팔짱을 낀 상태로 말했다.

“…예쁘던데.”


작가는 잠시 멈칫했다가 말했다. 대답을 머뭇거리는 짧은 찰나에도 답답했던 피디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답답하다는 듯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치, 예쁘지. 그러니까 배우 하겠지! 연기하는 거 어땠냐고요, 이 형님아.”

“글쎄… 세라 씨 연기는 처음 봐서.”


작가는 여전히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논에서 노는 누렁개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무렵부터 작가의 시선은 더 이상 둘 곳이 없어졌다. 포근하고 평화로웠던 감상을 저 망할 놈의 피디가 망쳐버렸다. 하얀 배경마다 꽂히는 시선의 끝에는 이제 백세라라는 여배우의 모습이 투영되는 듯했다.


“하여튼 답답하다니까. 세라 씨 연기 괜찮지 않아? 근데 이상하게 아직 못 뜬단 말이지. 저래 봬도 열아홉에 데뷔했던데.”


피디는 작가와는 달리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느긋하다 못해 느려터진 작가와 성미 급하고 유들유들한 피디는 어느 한구석 맞는 부분이 없어 보였지만 묘하게 어울렸다. 거의 다 왔다는 기사의 말이 짧은 침묵을 메웠다.


“근데 배우들 연기는 피디님이 알아서 하기로 하지 않았나… 지금 선 넘는 거야? 나 집에 간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피디에게 타격감이 좋은 단어를 무기로 선택하고 장전한 후 방아쇠를 당겼다. 아니나 다를까, 피디는 손을 내저으며 질색했다.


“아이고, 알았어요. 알았어. 작.가.님! 툭하면 협박이라니까. 따끈하게 국밥이나 드십시다. 여기 맛있어요.”


작가는 새침한 표정을 지은 채 못 이기는 척 피디의 등쌀에 밀려 차에서 내렸다. 히터 바람에 녹았던 몸이 찬 바람을 맞자마자 다시 움츠러들었다. 식당은 왕복 2차선 지방도로에 있었다. 한적한 길가의 빛바랜 1층 건물. 가게 앞에 떡하니 자리 잡은 가마솥 세 개가 누가 봐도 오랜 맛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진하게 배어 나오는 사골국 끓이는 냄새에 금세 배고픔이 느껴졌다. 피디를 따라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멀리 조연출이 탄 회색 승합차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짙은 검은색 밴이 보였다. 세라가 탄 차였다.


작가는 얼른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신발장 앞에서 문틈으로 밖을 내다봤다. 회색 승합차는 곧 식당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조그만 기대였을까. 작가의 손이 꽉 쥐어졌다. 하지만 검정 밴은 속도를 높여 식당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작가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얀 세상에서 검은색 차는 유독 묵직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내 스태프들이 입구를 향해 걸어오자, 작가는 소리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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