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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Aug 30. 2024

04_ 다음에 같이 버스 타 봐요.

윤담 장편소설

한 시간여를 달려 차가 멈췄다. 세라가 말한 책방은 신도시와 구도심 사이 적당한 경계에 있었다. 새까만 차창 너머로 보이는 책방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밖에서 보이는 책장과 테이블 말고도 안쪽에 공간이 더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손님은 없는 것 같아 혼자 들어가는 게 갑자기 겁이 났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도 애매한 상황에 세라는 조금 갈등했다. 백미러로 망설이는 그녀를 보고 의아한 장원이 무심코 말이 세라의 등을 떠밀었다.


“여기 아니야?”

“아, 맞아요. 그럼 저 잠깐 갔다 올게요.”


세라가 내리고 장원은 차 댈 곳을 찾으러 움직였다.

‘모르겠다… 책만 사고 나오자.’


가게 앞에서도 잠시 망설이던 세라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은은한 종소리가 울리고 카운터에 앉아 있던 효민이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세요. 저 그냥 책 좀 보려고…”

“아, 네. 처음이시죠?”


효민은 편하게 둘러보시라고 말했다. 맑게 웃으며 안내하는 효민 덕분에 세라는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효민은 처음 찾아온 손님도 부담 느끼지 않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내성적인 사람은 무관심보단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더 효과가 좋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 반면 살 사람은 내버려둬도 알아서 책을 사 가곤 했다. 효민은 그런 사람을 구별하는 직감이 있었다. 세라에겐 빠르게 안내하고 혼자 둘러볼 시간을 줄 참이었다.


“소설 찾으시면 이쪽 칸 보시면 되고요. 에세이는 이쪽…인데, 어? 혹시!”


효민은 이젠 습관처럼 나오는 멘트를 꺼내다가 가까이에서 세라를 보고 놀랐다. 아직 못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은데 기분이 조금 좋아진 세라가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세라님. 맞죠! 맞죠? 저희 작가님 드라마에 나오시는 분!”

효민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어머, 어머 요란을 떨었다.


“작가님. 나와보세요. 세라 배우님 오셨어요. 어머, 웬일이야!”

알아봐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다 효민의 말에 갑자기 긴장됐다. 세라는 책방에 정서가 없는 줄 알았다. 카운터 쪽을 돌아보니 고개를 내민 정서와 눈이 마주쳤다.     


반면 정서는 아까부터 손을 멈춘 채 귀가 쫑긋해 있었다. 손님은 늘 방문하는데 효민이 있을 때는 굳이 손님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 효민의 인사에 답한 목소리가 작업에 몰두한 정서를 일시 정지시켰다. ‘안녕하세요’ 다섯 글자에 그녀임을 알았다. 세라가 이곳을 오다니. 효민이 그녀를 안내할 때 지금이라도 나가봐야 하나 일어나던 차에 효민이 정서를 불렀다. 정서는 어정쩡하게 파티션 뒤로 고개만 내밀었다. 보다 못한 효민이 잽싸게 정서를 잡고 끌어냈다.


“어쩐 일로…”

바보 같은 말에 조금이라도 미소 지으려던 세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답답한 효민이 정서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손님한테. 그것도 엄청 특별한 손님한테! 하여튼 진짜.”

효민이 대신 사과하며 세라를 안쪽 테이블로 안내했다. 정서는 왜 혼났는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맞은 어깨를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마실 것을 내온 효민이 여전히 신난 듯 말했다.


“저 연예인 처음 봐요. 진짜 예쁘시다. 이쪽에서 촬영 있으셨어요?”

이십 대답게 발랄한 효민이 막냇동생처럼 느껴져 웃으며 말했다.


“네. 다른 촬영이 근처에 있었어요. 매니저 오빠가 작가님 책방 여기 있다더라고요. 작가님 책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른 책도 추천받고 싶어서 들렸어요.”


오는 내내 왜 왔는지에 대한 핑계를 생각하다가 매니저까지 팔아서 지어낸 말이었다. 사실 본심은 윤 피디와 정서가 어쩌다 함께하게 됐는지 궁금해서 온 것이었다. 아직 슬럼프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자신의 연기에 대해 윤 피디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도 싶었다.


아니, 그것도 핑계였다. 장원에게 이곳으로 오자고 했지만, 사실은 이 책방이 왜 오고 싶었는지 세라 자신도 잘 몰랐다.


정서는 매니저가 어떻게 이 책방을 알았는지 의문이 들었다…가, 책 추천이란 말에 금방 잊었다.

“어떤 책 좋아하세요?”


갑자기 분위기가 책 이야기로 흘러갔다. 애초에 그게 궁금해서 온 것도 아니어서 대화는 가볍다 못해 붕 뜬 것처럼 이어졌다. 효민은 답답함을 느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이건 제가 좋아하는 책인데 SF 장르는 이 작가가 최고예요. 이게 영화로도…”


정서는 책장으로 안내하며 이런저런 책을 소개했다. 그런데 정서의 말은 국어책을 읽는 것 같았고 세라는 ‘아, 네’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의 행동은 어색했다. 카운터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효민이 유심히 둘을 관찰했다. 그녀는 촉이 참 좋았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식사라도 같이하세요. 저희도 주말엔 문 일찍 닫거든요.”


어느덧 6시가 다 될 무렵 효민이 살갑게 말했다. 마침 토요일이었다. 문학관 작가들도 외출하는 일이 많은 주말엔 정서도 작가들의 저녁을 챙기지 않아도 되었다. 효민은 막힐 시간에 세라가 바로 서울로 출발하진 않을 것까지 계산했다.


마음 같아선 빠져주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저 바보 같은 작가가 애써 만든 저녁 자리를 망칠 게 뻔했다. 효민은 근처에 있을 매니저도 같이 밥 먹자고 말하며 아예 책방 문까지 닫아버리고 앞장섰다. 정서는 여전히 어벙한 채 효민에게 끌려갔다.


메뉴는 책방 근처에 있는 화덕 피자였다. 효민은 적당히 오래 먹을 수 있고 명색이 여배우인 세라를 고려해 너무 가볍지도 않은 메뉴를 순식간에 떠올렸다. 정서였다면 어떤 아재 냄새 물씬 나는 메뉴를 골랐을지 모를 일이었다. 효민이 단골이기도 한 화덕 피자집은 사장의 화려한 도우 돌리는 스킬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옛날얘기죠. 뭐.”

“진짜요? 야구 선수셨구나. 어쩐지 체격 좋으시더라. 근데 전 랜더스 팬인데.”

“에이, 야구는 히어로즈지! 고척 안 가봤어요? 팀 바꿔요. 얼른.”

“죽기 전엔 안 되거든요!”


피자가 나온 후 식사 자리에서 대화는 장원과 효민이 주도했다. 열 살 터울인데도 쾌활한 둘은 금방 친해졌다. 그 덕에 정서와 세라도 조금씩 편한 대화를 하게 됐다. 서울까지 운전해야 하는 장원만 빼고 맥주도 한 잔씩 시켰다.


“저희 작가님이 말은 별론데 글은 잘 쓰세요. 근데 책방 주인이면서 매출엔 관심이 없다니깐요? 요즘 시대에 SNS 홍보도 안 하고. 저 없었으면 지금쯤 파리만 날렸을 거예요.”

“그래서 시급 올려줬잖아.”

“문학관에 하는 것처럼 책방에도 신경 좀 쓰시라고요. 제가 여기 망할까 봐 못 그만두겠다니까요. 진짜.”

정서와 효민의 투덕거림에 웃기만 하던 세라가 물었다.

“문학관이요?”

“네. 작가님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문학관도 운영하고 계시거든요. 작가들 모여서 글 쓰는 곳.”

효민이 대신 대답했다.


“그냥 관리만 하는 거라니까. 작가들이 생계 걱정 없이 집필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정서가 효민의 말을 고쳐주고 세라에게 말했다.

“그러면 숙식이 다 공짜예요?”

“다는 아니고. 달에 5만 원씩 내는 사람도 있어요.”

“왜요? 돈 좀 버는 분들인가.”

“냉장고에 술도 항상 채워놓는데 술 마시는 사람들만 내요. 술까지 공짜였다간 감당 안 될 거 같아서.”

“그래도 돈 많이 들 것 같은데. 작가님 돈 많이 버시나 봐요.”

“그냥 뭐…”


정서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피했다. 효민도 잘은 모르는 분위기였고 장원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이후 드라마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장원이 갑자기 걸려 온 다른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

“아우,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저도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눈치 빠른 효민이 일부러 자리를 비켜줬다. 세라는 앞에 있는 한정서라는 사람이 더 궁금해졌다. 둘만 남아 어색할 수도 있었는데 조금 마신 술의 힘인지 정서가 먼저 말했다.

“배우 재밌지 않아요? 의사든 사장이든 검사든 뭐든 될 수 있고.”


정은이나 효민에겐 단답형 일색이던 정서의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정서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무언가를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그녀들이 보면 놀랄 일이었다.


“그러는 작가님은 뭐든 쓸 수 있잖아요.”

“쓰는 게 쉽나요.”

“연기도 쉽지 않죠.”

“아, 그러네…”


대화가 묘하게 흘러갔다. 이 남자는 아까부터 반말을 조금씩 섞고 있었다. 딱히 티도 안 나고 불쾌하진 않았다. 세라 자신도 초면에 실례를 했던 전적이 있어서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괜히 이상하게 말로 지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엔 잠깐의 침묵이 어색했던 세라가 물었다.


“왜 글만 쓰세요? 유튜브 하시거나 방송에 나가셔도 될 것 같은데. 아님 드라마를 직접 쓰시지.”

세라는 아까부터 아무리 베스트셀러라도 책 인세만으로 책방과 문학관을 운영하는 게 가능한지 궁금했다. 책방은 딱 봐도 효민의 인건비만 겨우 감당할 것 같았는데 문학관이라니.

“드라마는 안 써요. 누가 제 글에 참견하는 거 질색이에요. 조용히 사는 게… 좋기도 하고.”


정서는 또 뒷말을 흐렸다. 원하던 답은 못 들었지만 말하기 싫은 답을 피할 때 나오는 습관 같았다. 그런데 또 궁금해졌다. 드라마 쓰는 건 그렇다 치고 조용히 사는 게 좋다며 말을 흐렸던 부분.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느낌이었다. 세라는 더 물어보려다 장원이 들어오는 바람에 말을 아꼈다.


이후에도 네 사람은 조금 더 먹고 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라는 모처럼 편하고 즐겁게 식사한 느낌이었다. 장원이 차를 가지러 간 사이 다음 촬영에서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헤어졌다.


서울로 향하는 세라의 손에는 낮에 얼결에 구매한 책 두 권과 식당에서 인사치레로 받은 정서의 명함이 쥐어져 있었다.     


* * *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정서와 세라는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가끔 윤 피디가 정서에게 조언을 구할 때 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증을 못 참고 문자를 보낸 게 시작이었다. 답은 의외로 싱거웠다.     

— 도대체 감독님이랑 무슨 대화하는 거예요? 내 연기 별로래요?

— 배경이 공기업인데 윤 피디가 각색한 대본이 현실에 맞는지 물어본 거예요. 그 인간이 현실성 없는 거 싫어하거든요.

— 뭐야…    

 

윤 피디와 정서 모두 완벽주의자였고 현실성과 개연성이 떨어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오해가 풀린 세라는 조금 자신이 생겼다. 윤 피디의 눈치도 보지 않게 되자 캐릭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정서가 쓴 소설 원작을 다 읽고 나니 더 쉬웠다. 비중 적은 조연이라도 세라는 최선을 다했다. 오늘 찍은 장면은 극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럼에도 주연보다 대사가 많은 장면이라 세라는 이날만 기다렸다.


큐 사인이 났다. 세라는 주인공인 남편을 조심스럽게 달래는 아내의 역할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대본에 있는 떨림 하나, 숨결 하나까지도 완벽한 감정선을 따라갔다. 이윽고 대사가 끝났다.

컷…트. 오케이!


윤 피디의 오케이 사인에 숨죽이고 지켜보던 스태프들이 박수를 보냈다. 짧은 시간에 그녀는 마치 캐릭터 그 자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라는 밝게 웃었다.


“이야, 오늘 완전 개쩌는데? 뭐야. 과외라도 받았어?”

세라가 싫어하는 상스러운 말이 들렸다. 방금 같은 신을 찍은 남주인공 기민서였다.

“아니에요. 그냥 중요한 장면이라 연습 많이 했어요.”


세라는 얼른 그와의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선배이긴 해도 여배우한테 추근대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몇 년 전 리나가 기민서와 광고를 찍고 질색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잘 몰라서 그냥 넘어갔다. 이번 드라마의 남주가 기민서인 것을 알았을 때도 설마 했다. 그런데 촬영할수록 그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지고 있었다.


기민서는 아이돌 출신 배우였다.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외모는 연예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런데 사생활이 문제였다. 특히 여자 연예인과의 스캔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이돌 때부터 이어진 엄청난 인기와 팬심 덕에 큰 문제로 번지진 않았다. 물론 소속사가 언론에 돈을 쥐여 준 덕분이었다. 그가 벌어다 주는 돈이 더 크니 회사도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다.


“아니야. 연기에 소질 있네. 나랑 이거 찍고 인기 오르면 내 덕인 줄 알아.”

“네… 감사해요.”

세라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얼른 자리를 피하려는데 또 말을 걸어왔다.

“오늘 끝나고 와인 한잔하자. 할 말도 있고. 스테이크 죽이는 데 있어.”


세라는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술은 잘 못 마셔도 술자리는 좋아했다. 그래도 촬영 기간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배우로서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는데 기민서는 아무렇지 않게 술 얘기를 꺼냈다. 그동안의 소문으로 봤을 때 그가 할 말이라는 게 뭔지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저 그럼 다음 촬영 때문에 가볼게요.”

거부감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세라는 겨우 말하고 뒤돌아섰다.

“주제에 튕기네?”


기민서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점점 멀어지는 세라의 뒷모습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윤 피디는 정서와 점심을 같이 먹었다. 두 사람은 촬영할 때 앉는 간이의자를 나무 그늘 밑으로 가져와 믹스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촬영이 이어지면서 두런두런 일 얘기를 하다가 생긴 둘만의 휴식 시간이었다.


“아, 오늘 촬영 좋다. 역시 세라가 연기 잘해. 형. 그치?”

윤 피디가 커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내가 만든 인물이 살아온 거 같더라.”


고문 역할 외에 다른 건 하지 않겠다던 정서도 어느새 촬영과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작가님이라고 부르라며 못 박은 처음과 달리 이젠 형, 동생도 자연스러웠다.

아까 세라는 연기를 잘 모르는 정서가 봐도 정말 좋았다. 마치 자기가 쓴 캐릭터가 그녀에게 실체화된 듯한 모습을 보고 온몸에 찌릿함까지 느껴졌다.


“그게 바로 극본의 묘미란 말이지. 배우가 어느 순간 캐릭터랑 물아일체가 된다고! 그러니까 형도 한번 써봐.”

“됐어…”

말은 됐다고 해도 아까 느낀 기분에 조금 솔깃한 건 사실이었다.


“누가 알아? 세라가 별로 안 위대한 우리 한정서 작가님의 위대한 페르소나가 될지? 다들 그 맛에 이 판에 있는 거라고.”

“시끄러.”


윤 피디의 장난 섞인 말에 다 마신 종이컵을 구겨 던졌다. 그는 종이컵을 맞고도 능글맞게 킥킥댔다. 분명히 한 살 어린 녀석인데 가끔 저렇게 형을 갖고 노는 느낌이었다.

페르소나라…


정서는 그 단어를 듣고 가슴에서 뭔가 쿵-하고 뛰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 세라의 연기는 그만큼 강렬했다. 싫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정서의 마음에 깃들었다.


사실 각색한 대본을 감수하는 정도로 이 드라마에서의 정서의 역할이 끝날 수도 있었다. 반면 윤 피디는 처음으로 자기가 쓴 작품이 아니다 보니 완성도를 위해 현장으로 정서를 끄집어낸 것이었다. 촬영을 지켜보면서 정서는 자신의 글이 어떻게 입체적인 영상으로 세상에 드러나는지 보았다. 촬영이 중반을 지나면서는 윤 피디가 정서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도 줄었다. 어느 순간 정서도 자기가 없어도 잘 진행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점점 촬영장에 오는 날을 기다리고 항상 참석했다. 세라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정서는 이 눈치 빠른 피디 동생에게 속마음을 들킬까 애써 말을 돌렸다.

“근데 저 남자 배우는 왜 쓰는 거야? 주연이라면서 연기는 세라 씨가 더 잘하더구먼.”

“누구?”

“쟤 말이야. 말은 안 했는데 맘에 안 들었어. 내 소설 속 주인공은 저런 캐릭터가 아니었다고. 미스 캐스팅이야.”

멀리서 기민서가 휴식 중인 정가현 피디와 다른 여자 스태프들 주위에서 치근덕대는 게 보였다.


“아, 기민서… 에휴. 나라고 저런 새끼 쓰고 싶겠어?”

“네가 캐스팅한 거 아냐?”

“나도 시청률 걱정하는 윗분들한테 사회생활 한 거지. 쟤가 그래도 인기가 어마무시하잖어. 스타 배우 마케팅 효과 무시 못 한다고.”

짧은 한숨을 뱉은 정서가 아니꼬운 눈으로 기민서를 주시하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세라였다.     


— 촬영 끝나고 뭐 해요? 약속 없으면 같이 저녁 먹을래요?


정서는 또 한 번 쿵쾅거림을 느꼈다.     


* * *     


두 사람은 지난번 왔던 피자집에서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요.”

“아뇨. 전 괜찮은데. 근데 여배우가 이렇게 남자랑 둘이 밥 먹어도 괜찮나요? 소문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조연 된 지도 얼마 안 돼서. 아직 알아보는 사람 별로 없어요.”

“그래도… 누가 봐도 연예인인데.”

“풉, 고맙네요.”


괜한 걱정을 해주는 정서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예전의 뚱한 표정에 비해 요즘 그의 표정이 다양해진 느낌이었다. 처음엔 촬영장에서 윤 피디랑만 말하던 정서는 지금은 다른 스태프들과 대화도 많이 나누고 있었다. 


그만의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난 건 대학 졸업 이후 처음이었다. 정서는 회사원일 때도 규정과 제도에 속박되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었다. 그래서 외로웠다.


윤 피디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정서의 닫힌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건 주변 사람들이 먼저 눈치채고 있었다.


“근데 장원 씨는 밥 어디서 먹어요?”

장원까지 같이 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밴에서 세라 혼자 내려서 적잖이 당황했던 정서였다.


“근처에 야구단이 있나 봐요. 독립야구인가? 뭐랬는데. 아무튼 시합 없는 날이라 예전 동기 만나서 밥 먹기로 했대요.”

정서는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챌린저스인가 하는 야구단이 있따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피자가 조금 오래 걸리자 뻘쭘해진 정서가 물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그래 보여요?”

“아니, 그냥. 왜 저랑 밥 먹자고 한 건지 궁금해서요.”

“여자랑 밥 먹는 거 되게 오랜만이신가 봐요.”

정서는 답은 안 하고 헛기침하며 딴청을 부렸다.


“진짜예요? 참, 행동에 다 드러나는 분이시네.”

“아니거든요. 효민이랑 자주 먹어요.”

“그건 고용 관계잖아요. 효민 씨는 같이 먹기 싫을 수도 있지.”

그 말에 정서는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반응이 재미있어서 세라는 자꾸 장난이 치고 싶었다.


“장난이에요. 사실 아까 촬영 끝나고 민서 선배가 저녁에 뭐 하냐고 자꾸 물어보더라고요. 약속 있다고 해도 계속… 서울 가서도 그럴 거 같아서 피신 온 거예요. 제가 친구가 별로 없어서. 미안해요.”

그가 사실을 알면 불쾌해할까 봐 최대한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그런 거면 언제든지 피신 와요.”


 그런데 정서는 의외로 고민도 없이 답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한 그의 표정을 보니 말만이라도 고마웠다. 세라로서는 오랜만에 느껴본 조건이나 대가 없는 친절이었다.

“고마워요…”

“뭘요. 나도 그 인간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기생오라비처럼 생겨 가지구.”

세라는 피식 웃었다. 곧 주문한 피자가 나왔고 둘은 촬영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즐겼다.     


“촬영장은 좀 적응됐어요? 감독님이랑도 친해지신 것 같던데.”

“나름요. 친하다기보단 그냥 비즈니스죠. 얄미운 놈이에요.”

궁금해하는 세라의 눈치에 정서는 윤 피디가 자신을 괴롭히며 설득한 과정을 들려줬다. 입간판에 ‘방송국놈 출입금지’라고 적어 놨다는 얘기에 세라가 빵 터졌다.


“재밌네요. 그래서 지내보니까 어때요? 감독님 생각보다 좋은 분 같던데.”

“뭐. 저도 걱정하긴 했는데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정서가 말을 이었다.


“정가현 피디한테 나중에 들은 건데 스태프들이 윤 피디랑 한번 일하면 오래간대요. 왜 그런지 물어보니까 이 인간이 안 어울리게 꼼꼼하면서도 부드럽게 일하기도 하고 여느 감독처럼 쌍욕 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자기 방식에 동화되게끔 자연스럽게 만드는 그런 리더십이 있다나. 옆에서 보니까 맞는 것 같더라고요.”

세라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그렇다 치고. 진짜 감독님이 괴롭혀서 참여하게 된 거 맞아요? 정서 씨는 아무리 그래도 싫은 건 절대 안 할 것 같은데.”

세라는 순간 ‘작가님’이 아닌 ‘정서 씨’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서는 술을 마시고 흥이 오른 덕인지 그 호칭 차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맞아요. 경찰에 신고했으면 했지. 사실 윤 피디가 이주일 째 저 괴롭히고 있을 때 주말에 그 사람이 찍었다는 드라마를 봤어요. 얼마나 잘 만들었나 보자. 안 그래도 하기 싫은데 작품도 마음에 안 들면 진짜 딱 잘라낸다는 생각으로 봤죠.”

“재밌게 봤나 보네요. 지금 하고 계신 것 보면.”


“그럭저럭 볼만 했어요.”

“그럭저럭 이요?”

세라가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남들 다 재밌다는데 당연히 재미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재미보다는 뭔가 특별한 걸 기대하고 본 것 같아요. 근데 그걸 찾았고, 그래서 촬영장에 가는 거고.”

“그게 뭔데요?”

어느덧 세라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정서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드라마 끝나고 스태프들 이름나오는 거. 엔딩 크레딧이요.”

“엔딩 크레딧? 그게 왜요? 그거 누가 보나…”

“잘 안 보죠. 저도 안 봤고. 출연자나 제작진 이름을 읽을 수도 없게 빨리 지나가 버리니까.”

“그러니까요. 그래서 감독님 거는 뭐가 특별했는데요?”


“다른 드라마가 자막이 휙휙 지나가거나 광고만 나온다면… 윤 피디 작품에는 예고 나올 때 밑에 스태프들 이름을 고정 자막으로 오래 띄우더라고요.”

“음, 근데 그게 사실… 그렇게 중요하진 않잖아요.”

“백팔십육… 명.”

정서가 목이 탔는지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네?”

“그 드라마에 나오는 출연진과 제작진이 백팔십육 명이더라고요. 방송국 관계자들까지 합치면 이백 명은 그냥 넘었고.”

“그걸 다 세어봤어요?”

세라가 놀라면서도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론 이름은 다 기억 못 하죠. 그래도 한 작품에 카메라 감독이 몇 명인지, 피디가 몇 명인지, 오디오, 소품, 조명 등등 얼마나 많은 사람이 카메라 뒤에서 일하고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심지어 주연 배우들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들 이름까지 넣을 줄은 몰랐죠. 아! 밥차 사장님도 계셨다.”

밥차 사장님 이야기에 세라는 풉 하고 웃었다.


“그때 느꼈죠. 촬영장에서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배우나 스태프들 함부로 대하진 않겠구나. 아무도 안 보는 엔딩 크레딧이라도 내 가족, 친구, 지인들, 그리고 내가 보는데… 내가 스태프라면 거기에 내 이름이 잘 보이면 자부심이 느껴질 것 같았어요. 이 사람은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챙기는 사람인 것 같다고 느껴졌어요. 실제로 보니까 그랬고.”

“그랬구나…”


정서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단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세심한 구석이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같이하는 거예요. 이런 감독이면 적어도… 사람 뒤통수는 안 치겠구나 싶어서.”

세라는 정서가 말끝을 흐릴 때마다 뭔가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번 넷이 왔을 때 조용하게 사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와, 특히 남자와 단둘이 이렇게 밥을 먹고 일상 대화를 나누는 건 세라도 오랜만이었다.

두 사람은 조금 더 오래 대화를 나눴다.     


장원은 지난 촬영 이후 세라가 조금 달라졌음을 느꼈다. 생기가 느껴지고 성격도 조금 외향적인 모습이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건 참 다행인데 회사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한 달 전쯤 남 실장이 세라를 권 작가 작품에 넣으려던 일이 무산된 이후였다. 그 일이 있고 이틀 후 서 대표가 귀국했다. 안 그래도 들어오면 세라와 면담할 생각이었던 주희는 세라에게 남 실장과의 일을 들었다. 주희는 크게 노했다. 남편 건호가 하는 일이 딱히 탐탁지는 않았다.


누구를 데려오건 투자를 하건, 받건 건호는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가 데려온 배우가 주희의 마음에 들었으면 모를까, 그런 적은 거의 없었다. 남 실장이 데려온 배우들은 전적으로 그에게만 맡겼다. 어쨌든 여태 뭔 일을 하든 적어도 회사에 해가 되는 일은 아니어서 내버려 뒀다. 그런데 이번엔 선을 넘었다. 특히 주희가 직접 관리하는 배우를 건드린 건 아무리 건호가 기획실장이고 주희의 남편이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대표실에서 서 대표와 남 실장은 크게 싸웠다. 장원은 그동안 서 대표가 소리치는 걸 몇 번 봤다. 그래도 회사 직원들에게 소리친 적은 없었다. 거기다 저 부부가 싸우는 것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날 이후 일은 정리됐다. 최하늘 작가의 드라마도 서 대표가 원래 넣으려던 세라가 맡게 되었다.


예지가 계약 위반이라는 둥 난리를 피웠지만 서 대표는 요지부동이었다. 애초에 남 실장이 독단적으로 저지르고 구두로 말한 것들이라 문서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남 실장은 한동안 뭐 씹은 표정을 하고 다니다가 아예 며칠씩 출근을 안 하기도 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두 사람이 별거 중이란 소문도 돌았다.


그즈음 남 실장은 박성우 감독의 작업실로 발 도장을 찍고 있었다. 골프 모임의 아지트이기도 했던 작업실엔 권종선 작가와 다른 멤버가 모여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에는 ‘기민서’와 ‘언론’ 같은 단어가 나왔고 세라의 소속사인 PEARL 엔터테인먼트도 거론되고 있었다.     


한편 세라와 정서는 촬영이 없는 날 종종 연락하며 지냈다.     


— (세라) 뭐해요?

— (정서) 버스 타요.

— (세라) 무슨 버스?

— (정서) 시내버스.

— (세라) 왜요?

— (정서) 그냥 바람도 쐬고 

             구경도 하고 머리도 식힐 겸요.

— (세라) 차 있잖아요.

— (정서) 운전할 때 안 보이던 것들이

             버스 타면 보이는 게 좋아서요.

— (세라) 어디 가는데요?

— (정서) 일산이요.

— (세라) 거긴 왜요.

— (정서) 그냥… 아무거나 탐.

— (세라) 특이하시네.

— (정서) 취향입니다… 

             세라 씨는 뭐 하는데요.

— (세라) 책 다 읽었어요. 

             다른 거 추천해 줘요.     


버스 좌석에서 창밖 경치를 즐기던 정서는 씩 웃으며 뭐라고 답장할지 고민했다.     

 

— (정서) 님이 오실래요?

             제가 갈ㄲ     


장난처럼 써서 보내려다가 며칠 전에 세라가 다음 작품도 확정돼서 당분간 바쁠 거라던 말이 기억났다. 촬영도 얼마 안 남았는데 괜히 발걸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며 답장 내용을 생각한 정서는 적었던 글을 얼른 지우고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     


— (정서) 다음 촬영 때 몇 권 들고 갈게요.

             이번엔 선물!     


세라는 생각 없이 ‘다음에 같이 버스 타 봐요’라고 적었다가 흠칫 놀랐다. 왜? 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문구가 떠오르다가 결국 짧은 답장만 보냈다.     


— (세라)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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