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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Oct 07. 2024

10_ 횡령이요?

여름이 다 지나가도록 회사는 여전히 문학관에서 지내는 세라를 내버려뒀다. 장원은 세라가 개점휴업에 들어가면서 일이 줄어들자, 서주희 대표를 직접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그는 세라가 문학관에서 지내는 동안 점점 예전 모습을 되찾는 걸 놓치지 않았다. 서 대표의 회사 일을 도우면서도 중간중간 세라의 복귀 타이밍을 조율하고 있었다. 장원은 그만큼 서 대표가 신임하는 사람이었다.


행간에는 윤 피디가 벌써 다음 드라마를 준비 중이고 연말쯤에는 윤곽이 드러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스캔들로 인한 악성 댓글을 빼면 윤 피디의 드라마에서 보인 세라의 연기만큼은 호평 일색이었다. 그래서 장원은 세라의 다음 작품도 윤 피디와 함께 할 수 있기를 내심 기대했다. 


아무리 좋은 감독, 작가를 만나도 사람 간의 궁합이 안 맞으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수두룩하게 봤다. 그는 녹록지 않은 회사 운영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주 전 주말에는 책방에 들러 이런 상황을 세라에게 넌지시 알려주기도 했다. 일이 많아서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겨우 짬을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못 보는 시간만큼 세라가 변하는 게 느껴졌다. 전직 프로 선수 출신으로서의 감이었다. 


처음엔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평안한 모습을 찾은 것으로만 보였다. 그러다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그 이상의 무언가 다른 변화가 생겼다. 세라가 배우로서 성숙해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세라를 보고 온 날 장원은 그 느낌에 확신을 갖게 됐다.


무엇 때문에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매니저로서 배우의 심정에 대한 변화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장원은 이젠 형님이 된 정서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뚱한 형님은 뭘 물어도 시원시원하게 답이 나오는 적이 없었다.


“작가들 글 봐주고 있는 거 말고는 다른 거 없는데…”

겨우 보채고 졸라대서 들은 한마디에 장원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세라는 개인 시간 외에 작품을 읽을 때는 마치 작가들처럼 방 안에 틀어박혀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자주는 아니었는데 그럴 때는 정서나 정은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세라를 방해할 수 없었다. 가끔은 테라스에서 작품 속 인물의 대사를 연기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본 사람도 있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모든 것을 파악한 장원이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자기가 더 신이 나 있었다.


장원은 사실 세라가 마냥 좌절하고 무기력하게 지내는 게 아닌가 싶어서 남몰래 걱정이 많았었다. 하지만 세라의 근황을 자세히 듣고 나서야 안심하게 됐다. 세라는 작가들이 써내는 온갖 장르들을 읽고 비평하면서 작품 이해력과 배역에 대한 몰입도가 저절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팀장급 매니저에 비해 경험과 경력은 짧아도 장담할 수 있었다. 서주희 대표가 왜 그렇게 세라를 믿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얼른 회사로 달려가서 서 대표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날 듯이 달려간 회사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확 가라앉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서 대표는 바깥 사람들에겐 칼같이 굴어도 직원들에겐 다정한 사람이었다. 평소 사무실 분위기도 쾌활한 편이었다. 그래서 장원은 항상 외부 업무를 보고 올 때마다 직원들에게 유들유들하게 인사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입사 후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엘리베이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항상 “어허이, 구 프로. 어디 갔다 왔어?”라고 너스레를 떨던 친한 동료도 말이 없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사무실 다른 직원들을 둘러보며 그에게 다가가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그는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더니 장원의 팔을 이끌고 사무실을 나왔다.


“왜? 무슨 일인데.”

복도로 끌려 나온 장원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


“쉿! 야, 말도 마라. 지금 분위기 장난 아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냐고. 또 남 실장이 헛짓거리했어?”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둘러본 다음 작게 말했다.


“동현이가 대표님이 회삿돈 횡령했다고 언론에 폭로했댄다.”

“…… 뭐?”


장원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뭐?’라고 물은 것도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회계팀에서 일하는 김동현은 장원보다 한 달 늦게 들어온 후배였다. 매니저인 장원과 완전히 다른 직무였는데도 같은 해에 입사했다는 이유만으로 동기 의식이 생겨 금방 친해졌다. 술 마시며 어울리다가 클럽도 같이 가고 코인이나 주식 좋은 정보가 생기면 슬쩍 알려주기도 했다. 


고충이 있으면 누구 팀원, 누구 상사를 안주 삼아 씹어대며 서로 많이 챙겼다. 직장 동료와 나이 차이를 넘어 이제는 친구처럼 지내게 된 녀석이었다. 반면 지금 대화하는 동료는 서 대표의 일을 돕다가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사이였다. 회사 분위기가 좋아 죽을 맞추고 있을 뿐 관계의 깊이로 보면 동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에 치여 잠시 밀어둔 동현 생각이 났다. 녀석이 지난주에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었다. 전에도 몇 번 일이 힘들 때면 투덜거리듯 퇴사 얘기를 꺼내던 녀석이었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조만간 술 한잔하자며 타이르듯 전화를 끊었었다. 그런데 지금 말을 듣고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동현의 전화를 대충 끊은 게 후회됐다.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동현이 그럴 놈은 아니었다. 


동현은 술과 클럽을 좋아하고 코인으로 한탕 크게 벌어서 놀고먹겠다는 거창한 꿈이 있었다. 그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느 또래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는 녀석이었다. 철이 조금 없긴 했지만 그만큼 순박했다. 그런 동현이 서 대표의 비리를 폭로했다니. 아니 그전에 우선 서 대표가 횡령했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들었다. 아무리 연예계에서 ‘먹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더라도 서 대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에 잠겼던 장원이 물었다.


“대표님 지금 안에 계셔?”

“아니. 한 시간 전쯤 옥상 올라가시는 거 같던데.”


예상했던 장소였다. 서 대표는 머리 식힐 일이 생기면 옥상 정원에 올라가곤 했다. 아마 벤치에 앉아 담배 몇 대 태우고 있을 그녀가 그려졌다. 장원은 알겠다고 말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장원이 뒤돌아 물었다.


“동현이가 제보했다는 그 언론 어딘지 알아?”

“이슈팩트 일 걸?”


짧은 대답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장원의 손이 멈췄다. 소리는 안 나왔지만, 한국인이라면 입 모양만 봐도 알아들을 수 있는 욕지거리가 나왔다. 순간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장원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남건호 실장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아주 잠깐 장원과 시선이 교차했다. 건호는 잠깐 멈칫했다가 금방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나올 때 건호는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그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 같았다. 아주 잠시 고개를 돌려 장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이내 스쳐 지나갔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이 슬로비디오처럼 지나간 순간. 장원은 살짝 흔들린 건호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저벅저벅.

장원은 태연히 사무실로 들어가는 남건호 실장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 *     


세라는 초조하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방에서 보라의 글을 읽고 있었다. 이제는 세라가 작가들의 글을 봐줄 때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게 규칙처럼 되어 있었다. 그냥 읽고 비평만 하는 건데 작가처럼 대우해 주는 이들의 배려가 고마워 갈수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비평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녀는 아직 자신을 낮게 보는 습관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세라는 입주작가 중 유일한 드라마 작가인 보라의 대본을 읽는 게 가장 즐거웠다. 보라의 대본을 읽을 때면 다시 배우로 돌아가 촬영장이 저절로 그려졌다. 잠시 내려놓은 연기가 너무 하고 싶어서 몰래 연습한 적도 많았다. 보라도 배우인 세라에게 부탁하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 문학관에 입주한 드라마 작가와 여배우.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얼마 전엔 정은도 처음으로 비평을 부탁했었다. 보라보다 경험이 많은 정은의 대본은 확실히 깊이가 있었다. 정은의 작품이 나온다면 꼭 캐스팅해달라고 조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서는 여태 한 번도 자기 글을 부탁하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처음엔 아쉽다가 이내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저번에 막걸리를 마신 날 이후 괜히 그가 자신을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갔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장원이었다.     


— 난데… 대표님이 누명을 쓴 것 같아. 나도 같이 조사받아야 할 것 같고. 세라야 일단 조금 더 거기 있어. 당분간 연락 안 될 수도 있는데 사태 좀 정리되면 연락할게. 알았지? 끊는다.     


장원은 뜬금없이 자기 말만 속사포처럼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세라가 뭐라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서 대표와 함께 슬슬 세라의 다음 작품을 물색하고 있다더니 갑자기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랐다.


장원이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세라는 바로 인터넷을 켜고 회사 이름을 검색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검색 결과로 창이 넘어가는 짧은 순간에도 제발 별일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눈에 들어온 건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로 가득 찬 화면이었다.     


『기민서-백세라 스캔들 조용해지나 싶더니… 

백세라의 소속사 ‘PEARL 엔터테인먼트’ 대표. 소속 배우들 정산금 횡령 의혹 불거져』     


자기 이름까지 들어간 마당에 기사를 읽을 엄두도 나지 않았다. 방금 들은 장원의 말만 계속 맴돌았다. 세라 역시도 장원처럼 기사를 믿지 않았다. 서 대표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세라가 아는 서 대표는 소속 배우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유명 피디, 작가와도 맞서는 사람이었다. 


리나의 신인 시절 회사 자금이 여유롭지 않아 정산해 주기 힘들었을 때 서 대표는 사비로 정산금을 먼저 지급했었다. 사기와 먹튀가 넘쳐나는 연예계에서 신용을 지킨 서 대표와 PEARL 엔터는 그렇게 성장했다. 그래서 소속 배우들의 재계약률도 높았기에 세라는 더욱 기사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스캔들이 이제 좀 조용해졌는데 왜 또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기 싫은데 눈가에 저절로 눈물이 고이는 게 느껴졌다.


세라는 책상에 고개를 묻고 숨죽여 울었다.     


세라 소속사에 관한 기사가 메인 화면까지 장식할 지경이라 문학관 작가들도 금방 내용을 알게 됐다. 이제는 세라와 친해진 그들도 이번 일을 궁금해했다. 요 며칠은 세라 얼굴을 보기도 힘들어져서 내심 걱정이었다. 보라의 대본을 마지막으로 지금 그녀의 상황에 비평을 부탁하기도 어려워서 사태가 빨리 해결되길 바랐다.     


『PEARL 엔터. 서주희 대표. 횡령 사실로 밝혀지나. 회계 직원도 모르는 출처 불명의 법인계좌 발견돼』     

조금 더 세부적인 기사가 떴다.


기사 내용은 PEARL 엔터 서 대표의 횡령은 회계 직원의 내부고발로 알려졌다고 했다. 그 회계 직원은 몇 년 전부터 관리되지 않는 법인계좌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점점 그 계좌의 금액이 커지자 수상함을 느꼈다고 했다. 


서 대표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며칠 후 해고 통보를 들었고, 억울함에 언론에 제보했다는 인터뷰도 담겨 있었다. 기사는 본인이 해고된 문제의 그 계좌 금액의 출처가 바로 소속 배우들의 미정산금인 것 같다는 인터뷰를 주로 다루고 있었다.


“이게 진짜일까요?”


혜리가 말했다. 그녀는 저녁 먹은 후 티타임 자리에서 그날 그린 그림을 점검하곤 했었다. 오늘 혜리의 태블릿엔 그림 대신 PEARL 엔터테인먼트에 관한 기사가 떠 있었다.


세라는 없었다. 장원의 전화를 받은 날 이후 세라는 하루에 한두 번 밖에 나올까 말까 했다. 끼니도 휴게실의 컵라면만 먹는 것 같아서 세라와 부쩍 친해진 혜리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세라는 그림은 잘 몰라도 호응이 좋아서 그림을 보여줄 맛이 났다. 처음엔 ‘세라님’이라 부르며 쑥스러워하던 혜리는 금세 ‘언니, 언니’ 하면서 강아지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


“제보한 당사자만 알겠지마는… 언론에서 이렇게 때려대면 일반인들이야 이게 진실인 줄 알지. 쯧.”


선호가 낮게 말했다. 마치 남 일이라는 듯한 그의 말투가 거슬린 혜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장 작가님 T예요? 세라 언니도 그랬고 한 작가님이랑 오 작가님도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줬잖아요!”


혜리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띠동갑 넘게 차이 나는 혜리가 화를 내는데도 선호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입주작가 중 막내인 그녀를 볼 때마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딸을 보는 것 같아서 허허 웃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T는 맞긴 한데… 허허, 미안 미안. 나도 세라 씨 걱정되지.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판이 이러면 세라 씨 회사가 불리한 건 맞잖아. 다른 뜻은 없었어. 나도 믿어.”


이해는 한 듯한 혜리가 말없이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또 마냥 귀여워서 선호는 허허 웃었다. 딸과 비슷한 구석이 많은 친구였다.


“크흠, 음… 그나저나 구 프로가 걱정이네.”


선호가 장원을 떠올리며 말했다. 30년 넘는 베어스 팬이자 야구 에세이를 쓰는 사람답게 장원을 한 번에 알아봤었다. 장원이 대차게 실수했던 개막전이 바로 베어스와의 경기였다. 이겨서 기분은 좋았지만 한편으론 신인이 개막전에서 저런 실수를 해서 안쓰러운 마음에 이름을 기억했다. 


물론 장원 앞에서 그 얘길 꺼내지는 않았다. 세라를 보러 문학관에 몇 번 왔던 장원과 술을 마시며 야구 얘기를 하다 보면 죽이 참 잘 맞았다. 선수로선 안타까웠으나 그래도 나름 자기 길을 잘 찾아가는 것 같아 인생 선배로서 그가 대견하기도 했다. 선호도 젊을 적 혈기 넘칠 때였다면 아마 지금 혜리보다도 더 격해졌을지도 몰랐다. 


연륜이 뭐라고 조금 여유를 갖게 되어 전체를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젠 세라와 장원 모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아니게 된 사람들이니 속으로는 그들에 대한 근심이 컸다.


작가들 사이에서 여러 가정과 추측이 나왔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 * *     


장원은 며칠째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세라가 쉬었던 최근 몇 달간 서 대표의 최측근에서 일한 장원이라면 분명히 사실을 알 텐데 왜 아무런 연락이 없는지 답답한 날이 이어졌다. 처음엔 극구 부인했던 세라도 점점 반신반의해졌다. 미국에서 영화 촬영 중인 리나와도 간신히 연락이 닿았으나 그녀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새 또 다른 기사들이 나왔다.     


『서주희 대표. 사실 아니라고 밝혔으나… PEARL 엔터 측. 임시 이사회 열어 서 대표 제명 의결할 듯』

     

오늘 날짜의 기사였다. 서 대표는 어제 회사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번에도 득달같이 달려든 기자들 앞에서 서 대표는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회사 다른 배우들도 서 대표를 두둔하는 성명을 내고 SNS에 입장을 올렸다. 리나도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 그녀가 입장을 밝혔다면 확실한 지원사격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촬영 중에 그럴 겨를이 없는지 리나의 SNS는 조용했다.


회사 임시 이사회에서는 다음 회의에서 서 대표의 제명을 의결하기로 했다. 배우들이 나섰음에도 여론을 의식했던 것 같았다. 사태는 이사회에서의 서 대표 제명까지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자기들이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앉아 이득을 보고 있는데. 아직 의심 정도의 여론 임에도 서주희 대표를 이렇게 한순간에 내치려 하고 있었다.


세라는 몇 달 전 스캔들 기사가 났을 때 자신이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진득한 어둠이 세상을 잠식해 무기력해지는 기분을 누가 알까. 우울증의 문턱을 밟아본 것 같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냉혹한 모습을 보이는 이사들의 태도에도 몸서리가 쳐졌다.


서 대표가 20년 동안 쌓아온 신뢰와 믿음이 안팎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의 지금 기분이 어떨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답답함에 2층 테라스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하릴없이 먼 산을 보다가 세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장원의 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신호는 가도 받지 않았던 것과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로…     


한국말에 이어 영어가 들리는데도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멍한 상태가 되면 주변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슨 일인지 의문도 들지 않았다. 그럴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 상황에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끈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다시 한번 어둠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어둠에서 어슴푸레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넌 절대로 안락할 수 없어’

‘넌 절대로 성공할 수 없어’

‘넌 안 돼.’

‘이 정도면 배우 포기하고 고향에 가서 편의점 알바나 하지 그래?’


숨이 막혔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어둠에 둘러싸여 가만히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끼익하며 거칠게 열리는 문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쾅. 뒤늦게 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그제야 들렸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몸이 놀라 고개가 돌아갔다. 어느새 주변에 가득했던 어둠이 사라졌다.

테라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정서였다. 아직 오후 5시. 그는 아직 책방에서 작업할 시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놀란 세라에게 정서는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말했다.


“세라 씨. 지금 저랑 같이 좀 가시죠.”


정서는 무작정 세라의 손을 잡고 달려 내려와 차에 올라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세라를 보지도 않고 정서가 차 시동을 걸며 말했다. 평소의 뚱한 표정과 다르게 작업 중에만 나오는 진지한 표정을 한 채.


정서는 지금 장원을 찾으러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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