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 : 타파스의 환상과 현실

당신의 스페인은 어떤 맛인가요?

by 윤해

스페인에 도착하면 타파스의 천국이 펼쳐질 줄 알았다. 타파스는 술을 시키면 작은 안주가 따라 나온다는 안달루시아식 문화이다. 애주가라면 공감할 거다. 한국에선 배가 불러서 안주를 여러 개 못 시키니까, 나는 특히 타파스를 기대했었다. 술 한 잔에 타파스 한 입. 낮술의 여유를 즐기는 상상을 하며 구글 맵이 핀으로 가득 찰 정도로 타파스 바를 골라뒀다.




그라나다에 도착해 첫 타파스 바에서 낮술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해산물로 유명하다는 한 프랜차이즈 타파스 바를 골랐다. 프랜차이즈라 그런지 햄버거 집 같은 굉장히 모던한 분위기였다. 그라나다의 로컬 맥주인 알함브라를 홀짝이며 나의 첫 타파스를 기다렸다. "조개나 새우가 나오면 좋겠다"라고 떠들던 찰나, 감자튀김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도착했다.


약 20마리의 생선 튀김이었다. 익숙한 생선가스와는 달리 정어리 같은 작은 생선을 통으로 튀긴 요리였다. 내가 기대한 타파스는 적은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는 거였는데, 이 생선 튀김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작은 한 입이 아닌 대용량 한 접시. 슬프게도 특별히 맛있지도 않았다. 생선 사이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오징어 링을 먹다가 다음 타파스 바를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술을 했으니 그라나다 광장을 설렁설렁 산책하다 마트에도 들렀다. 와인이 1유로부터 7유로까지 와인 전문점처럼 펼쳐져 있었다. 타파스 바에도 갈 거지만 혹시 숙소에서 와인을 마시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비상용 와인을 구매했다. 아주 혹시 모르니까. 다음날 아침으로 먹을 닭가슴살 치즈 샐러드도, 오렌지의 나라니까 오렌지도 담았다. 신나게 장을 보고 나오니 이미 해가 떨어져 있었다.




조금은 빠른 발걸음으로 다음 타파스 바를 향해 걸었다. 이번에 가려는 곳은 현지 느낌이 물씬 나는 인테리어의 타파스 집이었다. 꽤 유명한 집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미 가게 앞에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라나다에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사실은 유명한 관광지이니 당연한 건데, 막연히 스페인에 오면 여유가 펼쳐질 거라는 편견이 있었나 보다. 나는 한국에서도 줄 서는 맛집에 잘 가지 않는 편이다. 기다릴 시간에 한 잔 더 하는 것이 이득이니까. 결국 타파스는 포기하고 저녁과 와인을 파는 가게로 방향을 틀었다.


8시가 넘어서야 겨우 자리를 잡았다. 우선 뗌프라니요를 한 잔씩 시키고 메뉴를 골랐다. 이 시간이면 뭐든 맛있을 것 같았다. 김치 타코가 있길래 궁금해서 시켰다. 그리고 Granadian style sautéed breadcrumbs in olive oil이라는 메뉴가 있었는데, 그라나다에 왔으니 그라나다 스타일의 뭔가가 먹고 싶었고 내가 좋아하는 올리브 오일이라기에 주문했다. 잠시 후 요리가 도착했다. 내가 시켰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요리가.


김치 타코에서는 김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피클을 김치라고 부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김치의 향도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소 실망했지만 타코의 범주에서 벗어나진 않았기에 나름대로 맛있게 먹었다. 문제는 그라나다 스타일이었다.


큰 접시 가득한 빵 부스러기 위에 조금의 햄, 파프리카, 그리고 멜론이 나왔다. 그라나다 스타일과 올리브 오일에 눈이 멀어 빵 "부스러기"라는 단어를 읽지 못했던 것이다. 태어나서 빵 부스러기를 이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인데 떡고물 같기도 했다. 다만 맛은 전혀 달랐는데 눅눅하고 느끼했다. 입맛이 그리 까다로운 편은 아닌데, 오늘은 정말 어려운 날이었다.




앞으로 스페인 여행 동안 이 음식을 피하기 위해 메뉴 이름을 찾아보았다. 이 음식의 이름은 미가스. 스페인 농부들이 딱딱해진 빵을 물에 적셔서 부드럽게 만든 다음 볶아서 에너지 보충용으로 먹던 음식이라고 한다. 노동식이었다니 이 음식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미가스를 뒤로 하고 숙소에 돌아왔다. 그라나다 숙소는 무려 집시들이 살던 동굴을 숙소로 개조한 곳이었다. 다행히 동굴에는 아까 구매한 비상용 와인과 오렌지가 있었다. 조용한 동굴에서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여유를 되찾으니 괜히 타파스와 그라나다, 그리고 미가스를 내 멋대로 상상했던 점이 미안해졌다. 상상과는 달랐던 부분도 있었지만 이 또한 추억이지.


와인을 마시다가 새벽이 되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니 뜻밖에도 별이 보였다. 타파스는 아쉬웠지만 그라나다의 새벽은 상상보다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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