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라 델 두에로 : 와이너리 도장 깨기

테이스팅 노트는 잊어도 템프라니요는 외웠지

by 윤해

학습은 역시 현장 학습이다. 술을 공부하고 마시는 데에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직접 마셔보는 게 가장 좋다. 주류 박람회나 양조장 투어처럼 한 자리에서 다양한 술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순간이 특히 좋다. 기록하려 애쓰지만 신이 날수록 메모는 잊히고 만다. 꼭 모든 걸 기억해야 할까? ‘아, 그 와인 좋았지’ 하고 떠올릴 수 있다면 된 거다.


와이너리 투어에 출발하는 길은 등원길을 서두르는 가족들로 붐볐다. 출발 지점에 도착해 보니 오늘 팀은 모두 불어를 구사했고, 나와 짝꿍만 예외였다. 가이드는 불어와 영어를 번갈아 해 주셨는데, 그 어느 영어 듣기보다도 귀에 잘 들어왔다. 마치 읽을거리가 한정된 비행기에서 책이 술술 읽히듯이 말이다.


리베라 델 두에로의 포도밭은 해발 천 미터 고원에 자리해 있다. 극심한 일교차 덕분에 포도는 껍질을 두껍게 키우고, 낮은 밤기온은 산도를 지켜 와인에 묵직함과 상쾌함을 동시에 남긴다고 한다. 산도가 살아있는 레드 와인은 얼마나 맛있을까. 기대 속에서 첫 번째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첫 번째 와이너리는 스페인에서 주목받는 신예였다. 악기를 만드는 장인처럼 정교하게 와인을 다룬다는 신념답게, 배럴마다 새겨진 현악기를 닮은 로고가 눈에 띄었다. 우리를 맞이한 와인 메이커는 콘크리트 발효조 앞에 섰다. 발효 방식과 숙성 철학, 그리고 이곳에서만 쓴다는 물 이야기를 간결하게 전했다. 설명은 채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역시 떠오르는 신예는 다르다. 사실 모두가 기다린 건 그다음 순간이었을 것이다.


일곱 명 남짓 둘러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있는 시음 공간. 그 위엔 치즈와 새하얀 시음지가 놓여있었고, 햇살에 비친 먼지가 허공에서 반짝였다. 포근한 분위기 속에서 세 종류의 와인을 차근차근 시음했다. 마지막 레드 와인이 특히 인상 깊었다. 오크 숙성의 은은한 향, 맛은 진한데 부드러웠다. 게다가 내게 특별한 해의 빈티지라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와이너리는 리오하에서 이미 성공한 와이너리를 운영하던 가문이 확장해서 세운 곳이었다. 건물 외관부터 세련미가 느껴졌고 로비에 들어서자 스탠딩 테이블마다 시음지와 잔이 놓여 있었다. 혹시 시음을 먼저 할까 봐 살짝 설렜지만 집중해서 발효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어떤 와인은 콘크리트 탱크에서만 발효시켜 산도를 살렸고, 또 어떤 와인은 프렌치 오크 탱크에서 숙성해 과일향 위에 볼륨감을 더했다고 했다.


설명이 끝나고 수많은 탱크 중 한 탱크의 문을 갑자기 여는 것이 아닌가? 문이 열리자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계단이 드러났다! 어른을 위한 마법의 성에 입장한다면 아마 이런 기분일 것이다.


"템프라니요일까요, 메를로일까요?"

지하로 내려가자 수백 개의 오크 배럴이 쌓여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두 잔의 와인을 차례로 마시며 품종을 맞히는 퀴즈를 했다. 두 잔 모두 과실향을 품고 있었지만, 템프라니요는 확실히 더 단단하고 바디감이 강했다. 스페인의 붉은 토양을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투어 동료들은 모두 템프라니요를 정확히 맞춰냈다. 서로 다른 대륙에서 찾아왔지만 애주가끼리의 유대감이 샘솟는 순간.




세 번째 와이너리는 중세시대의 지하 동굴 셀러를 가진 아주 오래된 와이너리였다. 온도와 습도가 자연적으로 유지되는 거대한 와인 셀러라니. 누군가 와인을 몰래 마실까 봐 배럴에 달아둔 자물쇠와 열쇠까지, 동굴 안에는 과거의 순간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살짝 취한 채로 동굴을 따라 걸으니 과거의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술을 빚는 쪽이었을까, 몰래 마시는 쪽이었을까.


동굴의 끝에는 역시 시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투어 동료들과 꽤나 친해져 영어로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맞은 편의 동료는 나와 짝꿍이 나란히 얼큰하게 취한 사진도 찍어주었다. 한국에 이 술이 없을까 봐 굉장히 아쉬워하자, 와인 메이커가 한 권의 책자를 꺼내왔다. 수많은 거래처의 연락처와 주소가 적힌 종이가 담긴 책자였는데 그 안에서 어느 한국 수입사를 찾아내 보여주었다. 주소로 미루어보아 소매로 구매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내가 한국에서도 당신의 와인을 맛볼 수 있게 안내해 준 마음이 따스했다.




와이너리 투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취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 불어와 영어가 뒤섞여도, 맛있는 술을 함께 마실 때의 눈빛만큼은 또렷하게 통했다. 좋아하는 것을 서로 권하고 웃는 경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오늘 마신 와인의 아로마는 메모하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투어 동료가 찍어 준 사진 속 진짜 웃음을 짓고 있는 내가 남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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