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하 : 계절을 거스른 돌고래

겨울 바다에서 만난 행운

by 윤해

내 상상 속의 스페인은 네르하에 있었다. 마드리드는 와이너리 투어를 하느라 얼마 경험하지 못했다. 그라나다에서는 화려한 알함브라 궁전을 볼 수 있는 만큼 붐볐다. 이에 반해 네르하는 아주 한적한 점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곳곳에 아파트 임대 광고가 붙어 있었고, 긴 휴가나 은퇴 후 이곳에 머무는 유럽인들이 많았다. 실제로도 노부부를 자주 마주쳤다. 여기서 늙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래서 나도 계획을 비워두고 은퇴자처럼 지내보기로 했다.




가장 기대했건 건 바다 수영이었다. 따뜻한 지중해의 햇살을 받으며 내키는 대로 수영을 하고 와인을 마시는 여유. 간과한 것은 내가 2월 말의 여행객이라는 사실이다. 수온은 15도. 그래도 부리아나 해변을 눈앞에 두니 미련한 마음이 솟아났다. 원피스 아래 수영복을 입고, 슬리퍼도 없었지만 동글 몽글한 자갈 해변을 맨발로 내려갔다. 발 끝이 파도에 닿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련이 달아날 정도로 차가웠다. 수영을 단념하고 해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까만 그림자가 수면 위로 솟았다 사라졌다. 돌고래?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말 돌고래가 맞나? 지중해 연안에서 돌고래를 보는 게 이렇게 흔한 일이던가? 프리 다이버인 나도 좀처럼 만나지 못한 장면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줌을 당겼다. 비디오 판독을 하듯 영상을 돌려보니 반달 같은 몸과 선명한 지느러미가 찍혀있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였다. 돌고래들은 유유히 헤엄치다 사라졌고, 나도 한참을 바라봤다.




수영은 포기했지만 해변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스페인 사람처럼 올리브 오일을 넉넉히 두른 빵을 먹었다. 아침 식사 후에는 해변을 따라 걸어 코인 세탁소에 갔다. 그곳에서 장기 여행객으로 보이는 노부부를 만났다. 나도 익숙한 장기 여행객인양 불어로 된 세탁기를 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속으로는 사무치게 부러웠다.


세탁물을 기다리는 두어 시간 동안은 해변의 거대한 바위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었다. 하염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들으며 시간을 넉넉히 흘려보내는 것조차 즐거웠다. 점심에는 빠에야와 필필이라는 새우 요리를 맛보고, 장을 보듯 과일과 까바를 샀다. 저녁에는 안달루시아를 세련되게 해석한 미쉐린 식당에 갔다. 와인 페어링도 즐겼고, 이곳에서는 다시 만난 미가스조차 용서할 수 있었다.




이렇게 풀어놓으니 별것 아닌 일정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네르하는 내 여행 중 가장 마음에 남았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바다, 계획을 비운 여유, 뜻밖에 찾아온 돌고래까지.


나중에 찾아보니 스페인에서 돌고래가 자주 관찰되는 시기는 주로 봄과 여름이라고 한다. 계절을 거슬러 수영하고 싶던 내 마음이 닿았던 걸까. 추운 2월에 돌고래를 만난 건 분명 행운이었다. 언젠가 꼭 이곳에서 늙어가고 싶다. 따뜻한 계절에, 바다에 몸을 맡기고 돌고래와 함께 수영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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