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들어선 와인 박물관에서 배운 로제의 맛
사람 없는 곳에 가겠다면서, 공중파 방송에도 소개된 론다에 왔다니. 내가 어리석었다. 산 꼭대기의 외로운 마을 같아서 끌렸던 론다. 하지만 실제로 도착해 보니, 외로운 마을보다는 작지만 활기찬 관광 도시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론다에서도 별다른 일정은 없었다. 북적이는 관광객 사이를 빠져나와, 명물로 유명한 소꼬리찜 가게를 지나쳤다. 대신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는 와인 박물관으로 향했다.
와인 박물관은 구시가지의 메인 거리에서 조금 더 골목 안에 있었다. ‘VINOS’라고 쓰인 검은 철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폭 일 미터 남짓의 입구가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다소 소박해 보였다. 하지만 문 너머로 들어가니 생각이 달라졌다. 네모 모양으로 빙 둘러선 형태의 건물 가운데로 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정에는 와인을 만드는 데 쓰였던 우물과 급수기의 모형이 놓여있었고, 벽마다 와인의 역사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와인 박물관의 점원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는 술쟁이답게 각자 세 잔씩 테이스팅을 요청했다. 첫 잔으로는 서로 다른 화이트 와인을 한 잔씩 따라주셨다. 스페인에도 음식을 쉐어하는 문화가 있어서 그런지 우리가 와인을 나눠 마실 거라 생각하셨나 보다. 스페인 와인의 역사를 소개해줄 테니 편히 마시며 들어달라고 했다. 한 손에 와인을 든 채로 중정을 거닐며 와인 설명을 들었다. 따뜻한 햇살, 서로 다른 와인을 따라주신 센스, 편안한 와인 수업까지 환상적인 와인 박물관이었다.
다음으로는 로제, 레드를 시음할 차례였는데 점원분이 로제를 강력 추천하셨다. 평소 한국에서는 로제 와인을 잘 마시지 않아 반신반의하며 잔을 받았다. 로제 와인이 이렇게 맛있는지 몰랐다. 한국에는 달달한 로제 와인만 수입되는 걸까? 드라이하면서도 향은 화사해서 너무 맛있었다. 산미도 조금 있어서 입맛이 당기고 맛이 많이 달지는 않은데 머루 향이 솔솔 났다. 우리가 로제를 너무 맛있게 마시니까 로제 한 잔을 더 내어 주셨다. 덕분에 세 잔을 비교하며 마시고, 그중 최애 한 병을 바로 구매했다.
신나게 레드 와인까지 마저 마셨다. 나는 내향적인 편인데 술이 주제가 되면 말이 많아지는 편이다. 점원 분은 한국에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하셨다. 한국에 이런 맛있는 와인이 많이 들어오지 않음을 함께 한탄하고, 그렇지만 곁들일 매콤한 음식이 최고라는 얘길 나눴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채 다음 날 다시 올 거라고 내일 만나자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와인 박물관에 방문했지만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내일 다시 만나자”고 했잖아요. 로제의 천국에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터널을 빠져나온 치히로처럼, 반짝이는 팔찌 대신 어제 산 로제 와인만 남았다. 어제 가길 정말 잘했다. 언젠가 다시 론다에 온다면, 열린 문을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