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잔의 여유, 내가 고른 스페인의 기록
“바르셀로나 대성당 봤어?”
스페인을 다녀왔다 하면 누구나 묻는 첫 질문이다. 나는 그 질문을 기꺼이 실망시킬 용기가 있었다. 내 연차는 소중하니까.
어딘가 햇살 좋은 발코니에서 술이나 홀짝이면 좋겠다. 2024년 말의 나는 여유로운 여행지를 찾고 있었다. 나는 술을 사랑하니까, 아무래도 술 마시기 좋은 나라가 좋겠지. 안주는 조금만, 술은 왕창 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기왕이면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파도소리를 안주 삼아 마셔도 좋겠고. 스페인이 떠올랐다. 스페인에 다녀온 사람들에게 물으면, 다들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구체적인 설명 대신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좋았다”라고만 한다. 뭐가 그렇게 나른한 기억인지, 직접 확인할 차례였다.
마드리드행 티켓을 끊었다.
직장인에게 가까스로 허락된 일정은 10박 11일. 한국에서 쉬어도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질 시간이다. 알고리즘은 이미 내 피드를 스페인 여행으로 채워놓았다. 말라가에서 네르하로 가는 버스가 오는 정류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버스가 몇 시에 출발하는지까지 방구석에서 알 수 있는 세상이다. 하도 영상을 보다 보니 이미 다녀온 것도 같았다.
누군가가 공유해 준 일정을 따라 여행할 수도 있겠지만 신중하게 나만의 스페인을 상상해 본다.
도착한 후에는 시차적응이 필요하니 누군가 나를 이끌어줬으면 해. 이럴 땐 역시 투어를 신청해야지. 마드리드에서 출발할 수 있는 와인 투어를 알아봤다. 도시의 역사를 배우는 것보다는 최대한 다양한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쪽이 더 끌렸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살짝 졸면서 자동으로 리필되는 와인을 마시겠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네르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수영, 술, 해산물을 모두 즐길 수 있는 도시다. 근처의 해안 도시인 말라가보다 한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지중해 햇살 아래 수영을 하고,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에서 와인을 마시는 나를 상상했다.
외딴 중세도시 같은 분위기에 반했던 론다, 내 주변 술꾼들이 입을 모아 칭찬한 세비야에도 들러야지. 나만의 단골 타바스 바를 만날 수 있을까? 내 입맛에 딱 맞는 와인을 추천해 줬으면. 멋진 수영장과 바를 가진 세비야의 호텔을 발견했다. 최고의 마지막을 보내게 되겠군.
'머무른다'는 표현을 몇 번이나 쓰고 지웠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만큼 어딘가에 머무르고 싶었나 보나. 내 맘에 든 도시들에게 넉넉히 일정을 나눠주니 10박 11일을 다 쓰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스페인 남부 여행이 되어버린 나의 여행. 바르셀로나 대성당은? 가우디 투어는? 미술 대학 졸업장이 울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학은 졸업한 지 오래요, 술은 어제도 나와 함께였으니. 지금의 나에게 충실한 여행을 하고 싶다. 햇살 아래서 마시고, 수영하고, 화면 너머 영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여행을 해야지.
내 여행의 여유가 무너질 바에는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술과 햇살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