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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즈 May 29. 2024

우울증 이후의 세상

우울증 완화 후 느끼는 새로운 평범한 감각들

우울증 치료 과정에 대한 브런치 글을 발행한 적이 있다. (읽지 않아도 된다.) https://brunch.co.kr/@raxustory/11 

이번엔 그 이후에 일상을 살아가며 우울증이 아닌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각자 다양한 사정으로 우울증을 겪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있던 기질이 10대 후반부터 심각해진 것이었다. 사춘기 무렵부터 항상 우울하고 생각이 너무 많고 그 생각은 자괴감으로 빠지고 자기 파괴적으로 흐르는 상태였다. 자아가 생길 무렵부터 모든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지쳐있고 우울해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의 삶의 대부분을 우울증인 정신상태로 지냈던 것이다. 

치료 전에는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그리고 다들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느끼면서 사는 줄 알았다. 


그 때문에 내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걸 자각하고 병원에 가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우울증으로 인한 부분과 본래 내 성격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반적인 편안한 상태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이를 고치는데 정말 긴 시간이 걸렸다. 상담과 훈련으로 오래된 잘못된 사고 구조와 생각의 흐름을 뜯어고쳐야 했고, 생각을 멈추기 위해 항정신성 약물을 병행해야 했다. 잠시 약을 먹고 정신 상태가 한층 나아졌다고 생각한 무렵에도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그 상태가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멘탈이 나아질만할 무렵 또 해외에서 긴 공부를 하게 되면서 만성 스트레스 상태에서 불안 증세와 강박 증세도 심해지곤 했다. 


다행히 지금은 공부도 끝나고 스트레스 요인도 많이 사라진 상태에서 약물치료도 효과가 좋아서, 나름대로 이 정도면 보통 사람의 상태라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 지금의 평화로운 내면의 상태는, 살면서 거의 처음 겪는 것이다. 이 우울증 이후의 멘탈이 평화로운 상태가 너무나 신기하고 소중하다. 보통 사람들은 정말 이렇게 평안한 상태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지난 내 삶들이 억울하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의 언행이나 행동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




내가 처음으로 느낀 유의미한 정신적 변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 나는 뭔가 새로운 것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면, 단순하게 그를 위해 필요한 일들을 파악하고 할 수 있는 일인 경우 바로 실행에 옮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 같지만, 옛날에는 나에게 이 과정이 너무나 힘들었다. 


과거의 나는 몸은 일상을 살아가도 생각은 항상 내면의 어두운 부분에 늘 잠겨있었다. 보통 나 자신의 한심과 스스로에 대한 반성, 그리고 어린 시절의 일을 곱씹거나 상처받은 일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에 사고가 잠식당하는 상태였다. 이를테면 생각은 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의식의 어떤 사고의 늪지대에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거기서 헤어 나오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다시 그 생각으로 돌아갔다. 생각의 한쪽이 진창에 빠진 상태로 생활했다.


그러다 보니 미래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일 자체가 굉장히 힘들었다. 뭔가를 해보자,라고 생각해도 내가 그럴 자격은 되는지, 내가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결국 생각은 과거의 어떤 시점으로 이어지고 결국 나는 못할 거라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혹은 미래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도 내 인생은 이미 망했는데 뭘 하겠다는 건지, 이런 생각으로 빠져들어서 결국엔 어린 시절까지 생각이 거슬러 올라가서 자신을 자책하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의지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그런 사고의 흐름이 거의 없다. 자제가 되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아예 들지도 않는다. 내가 원할 때만 그런 생각에 잠길 수 있는데, 이제 그다지 원하지도 않고 그런 생각이 불필요하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그 덕분에 현재에 대해서 생각할 때, 예전보다 훨씬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 쓸데없이 우울한 생각에 빠져있지 않기 때문에, 생각의 공간에도 여유가 생겼다. 좀 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이제 나는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하고 바라볼 수 있다. 좀 더 현재를 살아가는 기분이 들고, 미래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과거에 진창으로 계속 빨려 들어가던 기분이 더 이상 없다. 


우울증이 없는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살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젊은 시절의 많은 시간을 괴로운 생각에 잠겨있느라 손해 본 것 같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다시 나아가면 된다고 결심하는 일조차 이젠 단순하다. 






또 다른 변화는, 생각이 이렇게 단순하게 줄어들어도 의외로 감각의 예민함이나 감수성 등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예술의 세계를 보면, 많은 예술가들이 예민한 감각으로 작업을 하고, 우울증 등으로 비롯된 감성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창작하는 글을 쓰는 취미가 있기 때문에, 우울증에 깊게 빠져있던 시기에도 나의 생각들과 예민한 감성들을 버거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소중히 여겼다. 나의 예민함과 사고 과정을 다른 사람들에겐 없는 나만의 감성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비록 그 때문에 감정적으로 힘겨워서 허덕일지라도 말이다. 만약 우울증 치료를 하게 되어, 이러한 감성을 잃게 된다면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려 좋은 글을 쓰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사실 그런 생각조차 우울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울증 상태가 나아지는 것과 글 쓰는 일은 다행히도 큰 상관이 없었다. 약물치료까지 안정기에 접어들고 난 후에도 창작이 어렵진 않았다. 오히려 잡생각이 사라져, 이제 글감을 정하고 나면 글쓰기에 집중이 더 잘 되는 듯하다. 그리고 상상력의 영역에도 약물이나 생각의 변화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약을 먹고 생각이 단순해진 지금도 엉뚱한 생각들은 잘만 떠오른다. 오히려 그걸 글감으로 만들 실행력이 더 늘어서 생산성이 증가한 것처럼 느껴진다. 또 묘사 등을 위해 주변의 것들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도 그것을 글로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 그 능력이 감퇴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감에 맡길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훈련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 정도다. 우울증과 감수성은 별개의 영역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울증이 나아졌다고 해서 감수성이 둔감해지거나 하진 않은 것 같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으로부터 예전보다 밝아졌다는 말을 듣는 일은 종종 있다. 그러나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나이고 내 생각들은 여전히 나를 만들어간다. 그렇다고 과거의 시간들이 후회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생각으로 힘들어하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고 지금의 순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힘들었던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과거의 나처럼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공감해 줄 수 있는 힘이 되고, 또 때로는 그 시절의 어떤 상흔을 바탕으로 지금의 내가 뭔가를 만들어낼 수도 있을 테니까. 







주의: 나는 우울증이라고 알고 있어서 그렇게 적었지만, 의사가 진단한 내 상태가 정확하게 우울증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불안증 등 포함) 그리고 지금도 우울증이 완치된 상태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 단지 '나아진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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