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을 위해 파워포인트에 눌러담은 노력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2010년만 해도,
이직을 많이 하는게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으며 평생직장 개념으로 회사를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퇴직금을 받아서 가게를 차린다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한 회사에 받을수 있는 퇴직금이 많다는 건 그만큼 근무연한이 길다는 뜻도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이미 경력 3년에 3번째 이직을 하게되었고, 결자해지(結者解之) 하는 심정으로 4번째 입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어렵게 차린 회사를 쉬운말로 말아먹은(?) 나로써는 이번 이직이 너무나 중요했고, 또 간절했다.
처음에는 이미 지저분한 내 경력이 취업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지가 걱정이었는데, 그보다 문제는 내 스스로 자신감이 없었다. 벤처에 투자한 돈을 날린 것 이상으로 힘든건, 많은 사람들에게 벤쳐회사를 하고 있다고 자랑했던 것에 대해 내 스스로 '실패'라는 인정을 해야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 스스로의 자존감은 더 많이 깎여 있었다.
스스로도 마음이 잡혀있지 않아 어떤 회사를 가야할지 모르다보니 그에 맞춰 이력서를 준비하기도 어려웠고 서류 통과율이 높지도 않았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잡코리아와 사람인의 이력서를 주로 사용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변곡점을 맞게 된 건 당시 운영하던 블로그 덕분이었다.
웹기획/모바일 기획에 대한 나의 레퍼런스와 생각들을 블로그에 정리해두고 있었는데, 이력서엔 담지 못했던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들, 벤쳐를 하고 접은 과정에 대한 회상 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썼다.
그러던 어느날 에이젼시 T의 대표님의 미팅 제안을 받았다. 소규모의 에이젼시 이지만, 탄탄한 업력을 가지고 있는 회사였다.
해당회사 대표와 면접과 미팅의 중간쯤되는 인터뷰 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내가 했던 일들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결과는 취업 제안으로 이어졌는데, 바로 선택을 하지는 못했다. 자취방의 월세/생활비 때문에라도 빨리 취업은 했어야 했지만, 그만큼 내 스스로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혼란스럽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 미팅이 나에게 정말 의미있었던 것은 '앞으로의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프로젝트에 대한 하나하나 작은 일부터 큰 성과( 이때까지의 큰 성과는 개인의 역량 보다는 프로젝트의 성과이지만 ) 까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회사의 면접관 혹은 파트너들은 어떤 부분들에 흥미가 있어하고, 또한 인정해주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내가 걸어온 방향들과 사상들이 틀리기만 하지 않았음을 조금은 느낄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소속과 연차를 떠나 업계의 동료 선배 기획자 들과의 미팅은 나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 현재는 그 회사 홈페이지가 확인되지 않는데, 기회가 된다면 해당 에이젼시에 어떤 방법으로라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발판삼아, 새로운 시작을 준비했다. 블로그에 썼었고, 앞선 미팅에서 얘기한 내용들을 파워포인트에 하나둘 눌러 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디자이너들은 포트폴리오가 어느정도 일반화 되었지만, 나같은 기획자들은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중심으로 취업을 하던 시기였고, 기획자가 굳이 포트폴리오를 쓰지는 않는시기였다.
하지만, 내가 얻은 경험과 생각들을 이력서라는 틀안에서 담기에는 어려웠고, 오히려 PPT에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이렇게 다시 '나라는 사람을 회사에 제안하기 위해' 나스스로에 대한 자료와 내가 했던 일과 생각 들을 담은 PPT를 30장 가량 만들었다.
이렇게 쓴 자기소개서(이자 포트폴리오)는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 3군데 정도 면접을 보게 됬다.
그리고 그 중 대기업이자 게임사인 N에 입사하게 되었다.
스타크래프트 외의 게임을 잘 하지 못했어도,
이 회사의 직무상 모바일로 전환한지 1년만에 다시 웹으로 전환해야 했어도,
회사가 집에서 조금 멀었어서 2번이나 갈아타고 출근해야했어도,
그 회사가 좋았고 절실했다.
앞으로 모바일 기획에 대한 니즈가 있어 나와 같은 경험자를 필요로 했다는 점도 좋았지만, 이 회사가 게임사이지만 대기업의 계열사 인점도 끌렸다.
과정이야 어쨋든 결론적으로 벤쳐를 말아먹고 난 다음이라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감을 회복하기엔, 그리고 내 주위에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자리를 잡았다고 보여주기엔 ( 어쩌면 벤쳐를 말아먹게 만든 그들에 대한 투쟁심과 복수심 때문에라도 더 ) 대기업 명함 만큼 좋은게 없었다.
대기업 생활이자, 게임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좋았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대기업 사원증을 메고 출퇴근 하며 복지를 누리는 것만도 즐거웠고, 1층 커피숍을 방문하면 계열사 덕분에 수시로 지나가는 연예인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또한 그 안에 어려운 경쟁을 뚫고 들어온 능력있는 많은 동료들과 함께 하는 것도 좋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내가 벤쳐를 할때는 만날수 없던 수준높은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협업도 재미있었고,
사적으로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끼리 같이 술을 마시고 노는 것 마저도 즐거웠다. 오죽했으면 내가 Project Manager를 했던 프로젝트 팀에게 내 사비로 회식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일을 할때마다 돈을 생각해야하는 것이 아닌 회사의 자본으로 일한다는 단순한 사실이, 부담없이 일하는 안정감을 느끼게 했던것 같다.
대기업 생활중에 가장 좋았던건 적응을 하면 할수록 인정 받는 재미였던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 노예 근성은 여기서 만들어 진것 같다. 첫 회사 입사 이후 3년동안 제대로된 평가를 받아본적이 없었는데( 나쁘게 받았다는게 아니라 평가 체계 자체에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음) 이 때부터 '평가'라는걸 받기 시작했고, 또 그 성과를 위해 올인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다 그 회사의 소속된 기획자로는 처음으로 자체인력으로 웹어워드에 출품해서 상을 받기도 했고
( 이때 찍은 사진이 아직도 포털 검색하면 나와서 가끔 엄청 부끄럽지만. )
그 회사의 많은 웹기획자 타이틀을 가진 사람들중 처음으로 '모바일 서비스 기획자' 타이틀을 달고, 소수의 인력만 진행하던 회사의 초기 모바일 프로젝트들에 참여하기도 했다.
벤처회사에서 포기했던 모바일 기획을 더 좋은 환경에서 수행할수 있게 되면서,
나의 첫번쨰 전성기라고 생각할만큼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지금 현재시점에도 괜찮다고 느껴지 정도로
아이디어도, 방향도, 결과물도 좋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성장하면서 '과장'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것이 안정되었다고 느낄때쯤, 또 다른 변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