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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니 코치 Aug 24. 2019

미국 워싱턴 생활기

시골 : 지루함과의 싸움

  내가 사는 곳은 워싱턴의 변두리다. 미국 시골에서 차 없이 생활해 본 사람들만이 이 오갈 데 없는 처지와 지루함을 이해할 것이다.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땅 크기와 그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사람 수까지 한국의 시골과도 많이 다르다. 늘 서울에서 살다가 여길 오니 고요하다 못해 이제는 무슨 관 짝 같이 느껴진다.

  일상에 큰 변화가 없다 보니 시간도 더 빠르게 흐른다. 지금이 벌써 월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많던 시간 다 어디에 썼지 자책도 해보지만 그렇다고 딱히 생산적인걸 하진 않는다. 이사 온 초창기에는 언어 교환 어플을 다운 받아서 하루에 많게는 15명씩이랑 연락했는데 나중엔 시들해져서 그중 친해진 몇 명만 남겨놓았다. 그때 영어가 많이 늘긴 했으나 미국에서 폰을 붙잡고 영어공부를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어서 내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나 신세한탄이 절로 나왔다.

  심심하기는 또 얼마나 심심한지. 항상 가족들과 북적북적하게 살고 또 부모님이 주말에 집을 비우시면 줄기차게 친구들을 불러서 먹이고 재우고 하던 내가 혈혈단신으로 이 곳에 떨어지니 정말이지 딱 죽을 맛이었다. 나빼고 전부 미국인인 직장 동료들은 사적으로 만나기는 좀 어려웠고 친구들은 다 포틀랜드에 있으니, 처음으로 마주한 무저갱의 끝을 모르는 외로움은 나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특히 포틀랜드에서 잘 놀다가 돌아온 날이면 더욱 심해졌다. 엄마의 말을 빌려, ‘가슴에 바람구멍이 난 것 같이’ 쓸쓸하고 허전했다. 같이 사는 나이 지긋하신 노부부는 내 슈퍼바이저의 부모님으로, 그의 간곡한 부탁으로 의무감에 방을 내줬을 뿐이라 내 외로움 해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에겐 여름밤의 상쾌한 공기도 좋은 자연환경도 같이 즐길 누군가가 있어야만 의미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요리와 넷플릭스로 그럭저럭 외로움을 견디고 있다. 그사이 내 한식 요리 실력은 나름대로 수준급이 되었다. 부족한 재료로 할 수 있는 요리는 다 한 것 같다. 가족이랑 같이 살 때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배고플 때마다 앱을 켜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따끈한 치킨이나 떡볶이가 달려왔는데 여기선 그렇게 배달해주는 곳도 많이 없는 데다 한국에서만큼 자주 시켜먹다간 거지 꼴을 못 면한다. 어쨌든 간에 나를 먹여 살릴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어쩌겠는가! 닥치면 다 하게 되어있다는 말은 역시 진리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가끔 집을 벗어나 여행할 때만 살아있음을 느끼고 나머진 죽은 동태처럼 축 늘어져서 조용히 집과 직장을 왕복한다. 직장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 없어서 도로를 따라 30분은 족히 걸어가야 하고 가는 길에 보이는 것은 산과 들과 느긋하게 풀을 뜯는 소들뿐이다. 차가 없으니 어딜 훌쩍 놀러 가지도 못하고 퇴근해서 집까지 돌아오는 것도 일이다. 이러니 카페나 레스토랑도 잘 들리는 일이 없고 미국까지 와서 방콕 집순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시골은 걸어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혼자 걸으면 좀 무섭다.)


  그러나 한 가지 기쁜 소식은 이제 곧 이사를 한다는 것이다. 노부부와 계약한 기간이 끝나가고 그분들이 손주를 돌보는 시간이 많아져서 아이들 낮잠이라도 재울 방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삿날이 다가옴에 친구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백방으로 집을 알아봤지만 도무지 차 없이 다닐 수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고 발견하더라도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환영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주일을 남겨놓고 슈퍼바이저에게 SOS를 요청하니 갑자기 자기를 따라오랜다. 얼떨결에 일어나서 운동 기구를 모아놓는 필드 하우스로 갔더니 그가 잽싸게 내 사진을 찍고 5초 만에 SNS에 포스팅을 올렸다 자기의 집 구하는 솜씨는 알아준다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어줬지만 속으로는 그게 과연 통할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통했다! 이틀도 채 안되어 한 사람이 연락해왔다. 자기 집이 내 직장이랑 가까우니 관심이 있으면 연락 달라는 것이었다.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답장을 보내고 이틀 뒤 버스정류장 근처 스타벅스에서 만났다. 그는 30대에 P.A라는 생소한 직업을 가지고 있고, 혼자 2층 집에서 개랑 산다고 했다. 일단 신원이 확보된 사람이고 인상이 좋아 보여서 1차로 안심했고 집세 빼면 남는 것도 없는 내 보잘것없는 인턴 월급을 듣더니 획기적인 월세 가격을 제시해서 2차로 안심이 되었다. 바로 근방에 있던 그의 집을 같이 둘러보고 방과 주방 크기라던가 직장과의 거리, 깨끗함까지 정말 나무랄 데가 없었기에 바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항상 커다란 2층 집에서 개와 함께 살아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곳을 찾게 되어 무척 기뻤다. 출퇴근 시간이 반으로 줄고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서 이제 어디든 더 쉽게 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가서 살아봐야 알겠지만, 식료품점을 자주 못 가서 왕창 사서 모조리 냉동고에 때려 넣고 조금씩 꺼내먹던 시절에 감히 작별을 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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