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독증 중에는 실제로 음소인식이 어려워서 글 자체를 읽는 게 힘든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한국에서 보는 난독증은 이 경우보다는 읽은 내용이나 단어를 기억하거나 인출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 같다. 음소인식이 어려운 난독증의 경우는 앞에서 많이 얘기했으니 오늘은 이런 후자의 경우들에 대해 몇몇 예를 들어 얘기를 해 보려고 한다.
1. 시나리오를 수년간 쓰다 최근에 그만뒀다는 J.
그는 당연히 책도 많이 읽고 문해력도 뛰어나다. 그런데 종종 글을 보면 '글 뭉탱이'로 보인다고 했다. 즉, 문자가 눈에 쉽게 들어오지는 않는데, 그는 글보다는 그림이 더 쉽게 눈에 먼저 들어온다고 했다. 그는 글을 읽어야 할 경우엔 "자, 이제 한 번 읽어볼까"하면서 글을 맘 잡고 읽기 시작한다고 했다.
이런 그를 난독증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문자보다는 이미지가 더 편한 경우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읽기가 몸의 상태에 따라 좀 더 어렵거나 피하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문자보다는 이미지적인 사고가 더 편한 사람들이 J와 비슷한 얘기를 종종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이야기를 잘 쓰기도 한다.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완벽한 플롯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글을 있는 그대로 읽는 능력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명한 작가들 중에 단어 인출이 어려운 난독증이 많다고 한다.
2. 영재원에 발탁되어 미술 교육을 받고 있는 중학생인 H.
H를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최근에 그 아이에게 영어를 잠시 가르치게 되면서 특이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선 수업시간 주요 내용 정리가 글은 최소한으로 되어있고 단순한 스틱맨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중요 사항은 그 스틱맨 옆의 말풍선 안에 정리되어 있었다. 자신도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해왔다고 했다.
H는 한 달에 3~4권 이상씩은 책을 읽는데 거의 대부분이 소설책이라고 했다.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책을 읽으면 한 장을 몇 번씩 다시 읽는지 모를 정도로 읽은 내용이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 전 H의 과제는 문장 30개 외워오기였다. 늘 완전히 잘 외워왔었기에 그날도 분명 잘했을 거라 생각하고 나는 홀수 번호만 검사하고 넘어가겠다고 했다. 그때 H는 완전 멘붕에 빠졌다. 제발 모든 문장을 순서대로 다 검사해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회화를 위한 문법책을 10장 정도 풀어서 채점한 후 제출하기가 과제였는데 많이 틀렸음에도 틀렸다는 표시가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틀린 것을 물어봤을 때 다 알고 있었고 자신이 왜 그렇게 다르게 썼는지도 알지 못했다. 난독증은 '머릿속에 있는 글'과 '손으로 표현되는 글'이 다른데도 종종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난독증이 시각형 사고자는 아니지만, 시각형 사고자들 중 난독증이 종종 있다. 따라서 난독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사진이나 그림처럼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에 능하다. H도 어려운 개념이 있으면 글보다는 그림을 그려서 정리하는 편이 훨씬 더 기억 저장과 인출에 용이했던 것이었다. H가 소설류의 글을 읽을 때는 이야기의 이미지화가 아주 쉽기 때문에 '글을 읽는다'기 보다는 '글을 이용'해서 영화처럼 '이야기를 본다'는 표현이 좀 더 잘 맞지 않을까 싶다. 이런 경우 문맥에만 맞으면 글을 중간중간에 빼먹기도 하고, 단어가 틀린 게 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읽는다. '문맥'으로 글을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H의 성향을 알고 난 뒤 문맥 없이 그냥 문장만으로 30개씩 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힘들게 그 전체를 이미지처럼 외워두었는데 내가 중간중간에 한 줄씩 빼겠다고 했으니 멘붕이 왔을 법했다. 내가 기껏 머릿속에 저장해 둔 그림이 있는데 중간중간을 잘라내고 그리라고 한 것과 비슷한 꼴이 되었으니. 이런 H는 과목별로 정리를 할 때도 마인드맵핑으로 시각화해서 정리를 하면 훨씬 더 기억을 잘하고 인출도 쉬워질 것이라고 말해줬다.
3. 교수이면서 작가가 되겠다는 꿈으로 늘 소설을 쓰는 호주인 R.
그는 글을 정말 엄청나게 빨리 읽었다. 마치 한 페이지를 이미지를 찍고 넘어가듯이 빠른 속도로 글을 읽어내지만 주로 문맥적으로 읽었다. 문맥적으로 크게 필요하지 않은 내용은 쉽게 지나치기도 하며 한 문장에서 가끔 단어를 빠뜨리고 읽기도 했다. 또한 그는 종종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단어를 잘 생각해내지 못했다. 즉, 필요한 단어의 인출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거 그거 뭐더라...' 'OOO 하는 그걸 뭐라고 부르더라...'같은 말을 자주 했다. 그래도 요즘은 컴퓨터에 유의어사전이 있어서 그걸 잘 이용한다고 했다. 영어를 읽을 때는 단어의 길이가 비슷하고 모음이 비슷한 게 있으면 쉽게 헷갈려했다. 예를 들어 volcano와 tornado 같은 단어는 아주 헷갈린다고 했다.
그는 난독증에 종종 수반된다는 많은 어려움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 신발끈 묶기, 왼쪽 오른쪽 구별하기, 양말 같은 짝 찾기, 앞에 사람을 보면서 따라 하는 운동이나 춤추기 등. 물론 성인이 되면서 신발끈은 없거나 자동으로 돌리면 되는 다이얼 운동화만 신고, 왼쪽은 종종 왼쪽 엄지와 검지를 직각으로 펴 들고 Left의 L을 만들어 확인하기도 하고, 양말은 여전히 종종 뒤집어 신거나 짝이 안 맞아도 신는다고 했다. 그리고 운동은 아주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것들을 반복적으로 한다고 했다.
4. 학교 다닐 때 수학, 물리, 화학은 쉬웠지만 영어는 너무 어려웠던 약사 K
K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전에는 그녀가 언어학습을 어려워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무척 학교 공부를 잘했고 영어 글 읽기나 듣기를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지 몰랐으니까. 영어를 대부분이 못하던 시절에 학교를 다닌 게 참 다행이다.^^ 문장을 외우려면 발음이 되어야 하는데 연음이 그다지 빠르지 않은데도 도무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청각적으로 음소인식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K도 그랬다. 말을 듣고도 종종 "뭐라고?..."라고 했고, 전화로 통화를 할 때는 귀를 쫑긋하고 신경 써서 들었으며, 영어의 문장이 당최 뭐라는 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영어를 너무 잘하고 싶었던 K는 한 문장을 출퇴근, 점심시간에 거의 100번 이상씩 듣고 또 들으며 외웠다. 그러자 조금씩 들릴까 말까 하게 되었다고 했다.
K가 수업을 마치고 바로 했던 일은 항상 수업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자신이 다시 도표나 목록 등을 이용해서 정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를 해 두지 않으면 다 날아가버리고 기억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K는 영어 회화는 그리 쉽게 배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거의 드러나지 않는 난독증'을 가진 사람들의 모두는 절대 아니지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시각적 사고'를 했다. 그들에게 머릿속에 떠올린 사과를 최대한 자세히 묘사해 보라고 하면 대부분 표면부터 묘사했다. '표면이 좀 거칠고...' 하면서. 그리고 정말 자세하게 꼭지가 말라 끝이 굽어있는 것까지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종종 그림이나 글을 잘 쓰거나 좋아했다. 어원으로 공부하는 것보다는 이미지가 옆에 있거나 문맥 속에서 단어를 공부하는 편을 선호했고 더 효율적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경미한 난독이 있는 고등학생 W는 유치원 때 레고로 우주선을 만들었는데, 선생님이 그의 엄마에게 '이 아이의 레고는 너무나 엄청나다'라고 할 정도로 제대로 된 우주선을 만들었다고 했다. 레고는 H도 어렸을 때 아주 특이하게 잘 만들어 선생님이 사진까지 찍어 집으로 보낼 정도였다 했고, R도 레고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고 했다. 입체적인 모양을 만드는 레고와 시각적 사고를 하는 것이 연관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W와 K는 이미지로 사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들은 공간적/패턴적 사고를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나는 이처럼 문해력에 큰 지장이 없지만 글자보다는 이미지 혹은 패턴적, 공간적 사고가 더 편한 이들에게 '난독증'이 있다고 하기보다는 '시각적 사고'를 한다고 한다. 시각적인 사고는 선형적인 사고에 비해 문자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 조금 더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알면 '영상, 이미지, 청각, 경험' 등 자신에게 더 잘 맞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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