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이는 지금이야 한글을 무난히 잘 읽지만 초등학교 때는 난독증이 심해서 한글을 잘 읽지 못했다. 특히 글밥이 많거나 글자가 작아지면 읽는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 영어는 5학년이 되어서도 잘 읽지 못했지만 그때즈음 한글은 꽤 잘 읽었던 걸로 생각하는데 그의 엄마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가끔 아이들에게 성경 읽기를 시키시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는 얼마나 가슴 졸이는지 몰라요. 그땐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제발 지훈이만 시키지 말아 달라고 기도할 정도라니까요. 에휴..."
지훈이의 엄마는 지훈이의 난독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수도권의 유명하다는 브레인 클리닉이며 상담이며 병원을 정말 많이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물론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고, 지훈이의 난독증을 대하는 접근법이 근본적으로 남편과 달라 종종 큰 부부싸움을 하곤 했다.
지훈이 엄마와 아빠는 모두 유명대학의 들어가기 어려운 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큰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런 그들은 도대체 지훈이가 이해가 되지도 않고, 따라서 남들에게 떳떳하게 말도 못 하는 것 같았다. 지훈엄마는 지훈이의 난독증을 온전히 스스로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지훈이에게는 자연을 사랑하는, 공부가 전부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멋진 아빠가 있다.
예린이는 고지능 난독증이다. 지능은 높으니 귀로 듣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이해가 되면 참 잘 이해하고 기억도 잘했다. 그리고 풍경이나 지난 일들에 대해 정말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잘 기억했다. 남들은 잘 기억하지 못할 많은 것들을 마치 사진을 찍은 듯이 잘 기억했다. 하지만 읽기를 할 때면 심하게 긴장하며 읽었고, 목소리도 아주 기어들어갔다. 자신 있게 읽을 수 없으니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린이의 엄마 지수는 경미한 난독증이 있었는데 예린이에게 난독증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지수는 오랜 '친구 같은' 지인에게 예린이가 난독증이 있다고 편하게 말했다. 그전에 예린이가 한글을 쓸 때 맞춤법을 틀리거나 하면 그녀는 귀엽다며 웃어줬던 참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난독증이 있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그걸 얘기한 사람이 누구야? 그 사람이 뭘 제대로 알고 한 소리래?......' 했고, 그에 지수가 실은 난독증이 유전되는데 자신도 예린이와 비슷한 특징이 있는 것도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지수의 '더 이상 친구 같지 않은' 지인이 "쯧쯧, 그런 장애가 있었는지 몰랐네... 그래서 그렇게 계속 맞춤법을 틀렸었던 거구나.." 했다. 갑작스레 바뀐 그녀의 태도와 자신의 아이에게 '장애'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을 보며 너무 속이 상했다.
채아는 경계성지능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 수반된 난독증상이 있다. 이제 5학년이 된 채아는 한글 맞춤법은 종종 틀리지만 읽기가 불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아직 영어는 거의 읽지 못한다. 그리고 작업기억도 좋지 않아서 센터에 다니면서 여러 가지 훈련을 받고 놀이도 한다.
그런 채아의 엄마는 (돌아가신 엄마와 나만 빼고 거의) 아무도 모르지만 실은 자신도 난독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도 없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니 일부로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렸을 때 자신의 엄마에게 맞아가면서 한글을 배웠다.
채아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선생님한테만 비밀로 얘기할 거니까 엄마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돼요..." 그렇게 채아는 반에서 자신을 자꾸 놀리는 한 남자아이에 대해 말해줬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얘기하면 엄마가 대판 싸움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채아엄마는 딸을 조금은 과보호했다. 하지만 자신이 어린 시절 당했을 법한 일을 딸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채아의 아빠는 여자는 한글만 읽을 줄 알고 시집만 잘 가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종종 딸아이의 학습 성적을 접할 때는 화부터 낸다. 채아의 눈빛에는 항상 불안이 가득하다.
템플그랜딘은 '비주얼 싱킹'에서 자폐와 난독증을 정상과 비정상이 아닌 선형적 사고와 시각적/패턴적 사고의 관점에서 썼다. 그녀에게는 자폐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항상 가르치고 지지해 주었던 엄마가 있었다.
'나는 사고뭉치였습니다'의 저자 토드로즈는 어린 시절 정말 많은 (위험한) 사고를 쳤는데 그는 지금까지도 ADHD로 힘든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가 하버드에서 강의를 하고 많은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을 믿어주고 낙인찍지 않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가 포기하지 않게 해 주셨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로는 대학의 한 교수가 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그를 다시 한번 바뀌고 포기하지 않도록 해줬다.
'Look me in the eye' (내 눈을 바라봐)의 존 엘더 로비슨은 중년이 되어서야 자신에게 고기능 아스퍼거(경미한 자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힘든 나날들을 이미 보낸 뒤였다. 그런 왕따 당하던 존을 지탱해 줬던 건 인자하고 늘 자신을 믿어준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난독증을 고백한 거의 최초의 자서전을 쓴 영국의 연극/영화배우인 수잔햄프셔는 자신의 엄마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힘든 어린 시절을 겪었을지, 어떤 어려움을 마주해야 했을지, 어떤 문제아가 되었을지 상상도 못 할 지경이라고 했다.
이들 네 명의 곁에는 그들을 격려해 주고 믿어주며, 무엇보다 이들을 부끄러워하거나 낙인찍는 어른들이 주위에 없었다. 아니, 그런 어른들이 있기도 했지만, 그들 사이에서 그 낙인보다 더 강력한 믿음을 주는 어른들이 있었다. 이 어른들은 이들이 '문제'가 있는 '비정상'이 아니라 다수와는 '다른 뇌'를 가지고 있음을 인지하고 그들의 '강점'을 더욱 강조하고 부각했다. 이 같은 훌륭한 보호자들이 없었다면 이런 대단한 동물학자, 사업가, 교수, 그리고 영화배우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말썽꾸러기, 문제아, 지진아, 그리고 범죄자만 만들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학생들에게, 나의 자녀에게, 친구의 자녀에게 어떠한 낙인을 찍고 있을까?
혹여 나는 내가 그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을까?
내가 내 아이를 과보호하여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그 아이가 난독증이 있다는 것을 '내'가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난독증 #dyslexia #학습 #장애 #부진 #어려움 #아스퍼거 #자폐 #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