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난독증을 위한 단어학습을 염두에 두고 실험처럼 수업을 해 본 케이스가 몇 번 있었다. 한글은 잘 읽지만 영어를 거의 읽지 못하던 성인 A, 그리고 초등 고학년 B, 그리고 중학교 1학년 C를 대상으로 최근에 해 본 수업이었는데 그것을 이곳에 공유해 볼까 한다.
중년의 A는 지능이 뛰어났지만 처음엔 영어를 거의 읽지 못했고, 1년쯤 수업을 했을 무렵 글을 평균적인 수준으로 읽게 되었다. 초등학생 B도 마찬가지로 지능이 아주 뛰어났다. 하지만 5학년이 되도록 영어를 거의 읽지 못했다. C는 영어를 아주 잘 읽었지만 글을 사진처럼 통으로 외워서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A는 1년 간의 힘든 수업 후 이제 읽기는 되었으나 단어를 기억하지 못했다.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니 문장을 기억할 수 없고, 문장을 기억할 수 없으니 회화가 불가능했다. B는 이제 읽기가 수월해졌고, 문법지식도 또래만큼 가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단어가 턱없이 부족했다. C는 바로 이전 편에서 얘기했던 H의 경우인데 예술에 뛰어나고 창의적인 아이들이 많이 보이는 시각형 사고를 했다. (H의 경우는 이전 편을 참고하면 이해가 더 쉽겠다)
A와 B 모두 쉬운 단어를 아주 여러 번 반복해서 본 바 있었지만 신기하게 종종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즉, create, show, medicine... 같은 단어들을 A는 여러 번 하고 또 했지만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B는 랜덤으로 기억하기도 하고 못하기도 했다. B가 기억하는 단어가 항상 쉬운 단어만은 아니었다. 아주 어려운 단어를 기억하면서도 아주 쉬운 bring 같은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기도 했다. B는 학교에서 단어 시험도 매주 수 십 단어씩 봤는데 매 번 거의 만점을 받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험이 끝나고 나면 머릿속 단어도 함께 증발해 버리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 물론, 나와 공부를 조금 한 후부터는 단어들이 그래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보기로 했다.
글로 학습하는 것에 거부감이나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단어를 목록만으로 외우거나, 아니면 어원을 공부하며, 혹은 글을 읽고 문제를 풀며, 독해를 하며 익힌다. 이 경우에는 좋은 단어장이나 단어를 공부할 교재가 시중에 넘치도록 많다. 하지만 난독증 중에는,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주 많은 수가 시각적 사고를 하는데 이들에겐 그러한 교재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부터 얘기하는 방법은 선형적 사고가 무척 힘든, 이런 시각적 사고의 소유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런 시각적 사고에 강한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은 단어 목록으로 단어를 외웠을 땐 왜 단어를 잘 외울지 못할까? 간단히 얘기하면, 자의적인 문자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나, 이야기가 없어서 그렇다.
나는 실험적으로 A, B, C에게 같은 교재로 단어를 가르쳐보았다. 물론 이 교재가 맘에 안 드는 점도 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어 옆에 선명한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일일이 단어 하나하나당 이미지를 찾아서 연결시키는 건 너무 심한 노가다니까. 하하. 우선 A, B, C 모두에게 60개의 단어를 하루에 가르쳐보았다. 물론 시간은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결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이런 단어장을 사지 않더라도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미지를 단어에 연결시킨다. 챗GPT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도 되고, 자신이 그림을 그려도 되고, 구글 이미지를 찾아서 연결 지어도 된다. 이미 시각적인 학습자들은 알아서 머릿속에서 단어를 외울 때 이미지를 생성해서 연결시켜 외우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다음의 순서대로 가르쳤다.
1. 이미지를 본다. 머릿속에 이미지를 저장한다.
(나는 그 이미지를 가지고서 간단한 문장 하나 혹은 몇 개를 만들어 머릿속에 이미지가 잘 그려지도록 도왔다. "이 남자아이는 가방을 메고 학교에 도착했나 보네. 이 건물은 학교 건물인가? 어디지? 학교 같아. 아무튼 어떤 건물에 도착했군. 차를 타고 도착했네. 도착하다. arrive.")
2. 이미지를 보면서 오른쪽 단어를 읽는다. 여러 번 소리 내면서 읽는다. (영영 뜻풀이는 신경 쓰지 않고 한국어로 이미지를 그렸다)
3. 단어의 이미지가 충분히 그려졌다고 생각되면 추가로 그 단어가 들어간 간단한 문장을 읽으면서 기억을 강화한다.
4. 그다음 다시 돌아가 단어 테스트를 하는데, 단어는 가리고 대신 그림만 보여준다. 그림을 보면서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한다. 가령, "우와 사람들이 파도 위에서 보트 같은 걸 타고 무슨 신나는 모험을 떠나는 건가요? 아, 좀 위험해 보이기도 하는데... 자, 모험은 영어로?" 이런 식으로 테스트를 했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외우지 않도록 순서를 마구 섞어서 랜덤으로, 그리고 여러 번 물었다.
5. 그리고 나중에는 그림도 없이 단어만 그냥 물어본다. 가장 예상하고 있지 않을 것 같지 않은 순간, 잊어버렸을 것 같은 때 여러 번 물어보았다. 이쯤 되면 머릿속에 그림이 단어와 함께 저장되어 있을 테니까.
굳이 이렇게 이미지와 연관해서 단어를 외우게하는 이유는 단어를 외우는 것도 힘들지만 인출할 때도 자주 문제가 되는데, 이미지와 단어가 연결되어 있으면 기억은 물론 인출도 훨씬 용이하게 잘되는 듯했다.
1회 수업 후 60 단어를 외웠고, A와 B는 한 주가 지난 후에도 신기하게 모든 단어를 다 기억하고 있었다.
C의 경우는 단어가 부족하긴 했지만 단어를 못 외워서라기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많이 외울 수 있도록 이미지를 더해서 공부하도록 했다. C는 단어를 꽤 쉽게 외웠으므로 그 단어들을 사용해 만든 독해와 문제풀이까지도 하도록 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롭게도 C가 온통 검은색 글만 있었던 텍스트를 보기 쉽도록 검은색과 빨간색으로 색깔을 바꾸어, 한글과 영어로 나눴고, 시각적으로도 훨씬 보기 편하게 만들었다. 물론, 내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이렇게 하는 편이 더 깔끔하게 정리가 된다고 생각해서 한 것이다. C는 항상 이렇게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정리하거나 삽화, 이미지가 있어야 내용을 잘 이해하고 기억했다.
늘 얘기하지만 다시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을 한 번 더 하자면, 난독증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난독증이 왜 문자학습이 어려운지를 이해하고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서 학습법을 찾아주면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문자학습이 어느 정도 한계를 넘어 더 이상 쉬워지지 않거나, 계속해서 스펠링을 틀리고, 내용을 잘못 이해하거나, 단어를 잘 인출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모든 부분에서 똑같이 발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적으로 천재적이면 수학이 어려울 수 있고, 음악에 뛰어나면 스포츠에 재능이 전혀 없을 수도 있고, 이미지나 패턴 인식에 강하면 문자 인식은 어려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만 과도하게 문자학습에 치중되어 있는 사회에서 너무 힘들지 않도록 최대한 어릴 때 이러한 특징을 발견하고 도와줄 수 있으면 자신의 약점을 조금 더 보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정말이지 '평균'도 없고, '보통'도 없고, '정상'도 없다. 그러한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고를 모두가 빨리 벗어던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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