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독증을 읽다: 다르게 읽는 사람들의 세계>>
난독증을 "글을 읽지 못하는 증상"이라고 대부분 알고 있다. 한국의 문맹률은 아주 낮은데, 그렇다면 한글을 잘 읽을 수 있는 대부분의 성인이라면 난독증일 수가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럴까?
아이들이 처음에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 유독 느리거나 힘들어하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할 것이고, 요즘은 '난독증' 진단을 받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20~30년 전만 해도 '난독증'이라는 말조차도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40~60대 분들과 영어 수업을 하다 보면 난독증이 있는 것 같은 경우가 있어도, 나는 "OO님은 난독증이 있으세요. 그러니 자꾸 글을 보고 읽으려고 하면 외우기가 힘드실 거예요. 귀로 듣고 자꾸 따라 하시고, 그래도 잘 안되면 이미지를 그리면서 공부하세요. 경험하지 못했거나 머릿속에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것들은 아무리 글로 그냥 외우려고 해도 잘 안되실 거예요...."라고 말을 했다간 아주 날벼락도 무슨 날벼락을 맞을지 모른다. 그 세대분들은 여전히 '난독증= 저능아'라는 공식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내 주위에 너무나 많은 난독증을 가진 성인분들을 보지만 그들 중 열에 아홉은 자신도 모르고 있다. 열에 아홉이 아니라 사실 다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나는 그분들이 학창시절 자신이 노력한 것에 비해 왜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지, 자신의 아이가 왜 문자 해독에 어려움을 겪는지, 내 글을 통해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내셨으면 한다.
우선, 난독증은 글을 못 읽는 것보다는 글을 읽는 방법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이 핵심이다. 문자와 소리의 대응관계가 한국어는 꽤 간단한 편이라 아무리 힘들어도 노력하면 대부분은 1~2년 안에는 한글을 읽게 된다. 그러면 한글을 쉽고 빠르게 읽고 쓰니까 난독증이 "치료"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난독증은 "치료"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 한글을 읽는데 어려움이 있었다면 인정하기 싫어도 그 사람은 평생 '난독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내 방에는 피카소의 그림이 한 점 걸려있는데, 나는 오랫동안 왜 피카소가 그렇게 유명한지, 피카소의 그림이 뭐 그리 대단한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피카소가 난독증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피카소가 어떻게 사물을 바라보았을지를 상상해 보았다. 난독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사물을 시각적으로, 입체적으로 인식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피카소는 어떤 인물을 보면서 옆, 위, 아래, 앞에서 본 모습과 멀리서 본 모습, 가까이서 본 모습 등을 아마도 앉은자리에서 동시에 떠올리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는 사물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I paint objects as I think them, not as I see them)라고 했다. 한 폭의 그림 속에 다양한 모습을 동시에 그려 넣는 것이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도 힘든 나는 코가 두 개고, 구도가 각각 다른 두 개의 눈을 가진 여성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의자에 앉은 그림이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난독증 연구가 훨씬 앞서있는 영국의 경우에도 난독증으로 의심되는 케이스의 대략 17%만이 진단을 받는다고 하니, 나머지 83%는 아예 모르거나, 심증만 있는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학교에서 여러 가지 혜택 (시험 시간 연장, 프린트물을 인쇄하는 다양한 종이의 색깔, 외국어 수업 면제, 객관식 시험 배제, 구두로 시험 응시...)을 받으려면 공식 인정되는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영국에서는 검사비가 백만원정도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돈이 없으면 받을 수 있는 혜택도 못 받는 거다. 그것도 만 18세가 되면 다시 한번 더 받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난독증 검사비가 얼마나 하는지, 진단을 받으면 여러 가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아시는 분은 댓글에 달아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자신이 성인이고, 글을 읽거나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혹시 다음과 같은 부분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지 한 번 보시라. 내 배우자와 나 중 한 명이라도 난독증이 있다면 내 아이들에게 난독증이 유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먼저 나에 대해 알면 내 아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종종 반대로 내 아이가 난독증이 있는 것을 보고 나 혹은 내 배우자, 혹은 내 부모가 난독증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1. 영어를 가르치다 보면 읽기를 지나치게 힘들어하시는 걸 가끔 본다. 심한 난독증이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학교 다닐 때 공부를 거의 안 했다고 하신다. 집안이 부유하여 (공부) 개인 과외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 요리, 음악, 미술... 등을 주로 하셨고 공부는 한 기억이 없다고 하신다. 난독증의 경중이나 노력한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40~50세가 넘은 경우에는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자신만의 방법을 이미 찾은 경우들도 많다. 아주 경미한 경우에는 영어로 글을 읽기는 읽는데 유창하게 빨리 읽기가 잘 안되고, 심한 경우에는 글 읽기가 처음부터 잘 안 되서 음소 규칙을 배우고 많은 훈련을 한 후에야 읽기가 가능해진다. 이런 성인분들이 꽤 많다. 그런 분들은 외국어 공부를 조금 하다가 빠르게 포기하거나, 처음부터 아예 할 생각을 하지 않으실 테니 난독증이 대부분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잘 모를 수밖에.
2. 읽기가 된 후, 수업을 하다 보면 외워야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단순한 목록, 예를 들어 불규칙 동사 20개 외우기라든가 지문을 보고 외우는 것을 못하신다. 글을 못 읽는 게 아니라 읽은 글이 머릿속에서 처리가 되지 않는 거다. 그리고 간혹 내가 경험하지 못했거나 익숙하지 않은 것이어서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거나 느낌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절대로 그 내용이나 문장을 못 외우신다. 신기하게도 똑같은 것을 들려주고 외우라고 하면 바로 외우신다. 아니면 그림을 그린 후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외우라면 또 잘 외우신다.
3. 지시사항을 따라 하는 것을 잘 못하신다. 요리법을 읽고 따라해야 하거나, 제품 설명서를 읽고 순서대로 조립해야 하거나, 지도를 보고 어딘가를 찾아가야 하거나, 물건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하면 아주 엉망으로 하거나 패닉상태에 빠지거나 한다. 하지만 성인은 오랜 경험이 쌓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처하고 있기에 그런 면이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고도로 몰입해서 하면 그것도 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말이다.
4. 시각화를 매우 잘하며, 종종 머릿속에 다양한 그림들을 그릴 수 있다. 많은 기억과 추억이 생생하고 입체적인 이미지로 머릿속에 살아있다.
물론, '난독증'이란 신경다양성의 한 측면이고, 그 다양성과 개인의 노력의 정도에 따라 예후가 많이 달라질 수 있는 것 같다. 영국의 어떤 젊은 사업가는 초등학교 때 난독증 진단을 받아서 대학원까지 꾸준히 난독증을 위한 혜택과 개인지도를 받았고, 자신도 토할 정도로 열심히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여전히 쉽지는 않지만 엄청난 양의 책을 읽어내고 글을 쓴다.
반면 60이 넘은 한 유명 미국 작가는 손자가 난독증 진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난독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당연히 그는 평생 자신은 글을 잘 못 읽는 바보라고 생각했고, 놀림도 받았고, 당연히 아무런 혜택이나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런 그는 평생 단 한 권의 책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너무 읽고 싶은 소설을 십 년째 들고 다니지만 도저히 그것을 어떻게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런 그가 엄청난 소설을 써내는 것은 머릿속에서 살아있는 듯한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는 능력 덕분일 것이다.
편견을 가지지 말고 자신이 혹은 자신의 아이가 '난독증'이 있는지 살펴보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만약 '난독증'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도움을 받는 것이 앞으로의 삶을 훨씬 더 수월하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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