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의 불야성의 도심에서 퇴근해 오후 한 시의 그늘 한 점 없는 도심으로 다시 출근했다. 각성이 오래 이어지니 에스프레소 세 잔을 연거푸 마신 사람 마냥 고양되어 있었다. 피로했으나 기분은 맑았다.
몇 번씩은 맑은 기분에 잉크가 쏟아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15분 간의 명상을 다 채우지 못했다. 7분쯤 명상하는데 남자친구가 일회용 먼지떨이로 내 방 구석구석을 청소해 주고 거슬리는 흰머리를 한 가닥 뽑아주고, 자꾸 벗겨지던 에어팟 케이스 뚜껑을 붙여주었다. 훌륭한 메이드의 등장으로 명상은 7분 45초쯤에 멈췄다.
잉크는 여전히 가슴에 남아있다.
매주 수요일, 엄마가 혈액투석을 하는 날이다. 네 시간 동안 꼼짝없이 누워 온몸의 피를 걸러내는 시간이다. 하루 네 번의 복막투석을 십 년간 하던 엄마는, 작년부터 혈액투석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하루 네 번을 복막을 통해 노폐물을 걸러내는 것도 이제 한계가 온 것이다.
막내딸인 엄마는 특히 혈액투석을 하고 온 날이면 어리광쟁이가 된다. 가뜩이나 솔직한 양반이 더욱 솔직해진다.
"내 친구 경미는 청와대 보러 1박 2일 놀러 갔다는데, 나는 몸이 아파서 가지도 못하고 속상타."
"앞으로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혈투(혈액투석) 하게되믄 어째 살겠노."
고된 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쌓은 하찮은 고양감 위로 잉크가 와락 쏟아졌다. 엄마, 엄마는 또 엄마 힘든 얘기만 하는구나. 엄마는 내 마음은 생각하지 않는구나, 하고 잉크가 퍼져나갔다. 모진 말을 내뱉을까 봐 황급히 통화를 마무리했다. 내가 사랑받고 편안한 나의 세계로 빨리 돌아오고 싶었다.
명상을 하며 그 순간 왜 그렇게 억울하고 분했는지 더듬어본다. 그 장면을 다시 본다. 엄마가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내 마음은 비명을 지른다. 무대 위의 불이 다 꺼지고 나만 비춘다. 엄마가 그 무대 위에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만 있다. 나만 아프고 고통받고 발버둥 친다. 연극에서 대화를 나누던 장면에서 느닷없이 혼잣말로 돌변하는 장면처럼, 통화를 하는데 마음은 독백을 이어나간다.
나만 남아있었구나. 엄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대 위에는 나만 남았으니까. 엄마가 어떤 표정, 말투, 마음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저 키오스크처럼 무의미한 맞장구만 출력되고 있었다. 혼자 남은 무대에서 보이지 않는 상대방은 모두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인물이다. 내게 남은 것은 미움 밖에 없다.
미워하는 건 너무나 쉬운 선택이다. 밉다, 고 생각하고 마음을 닫아버리면 상대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조차 상태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잉크를 흩뿌린 또 다른 장면. 인사이동으로 새로 온 후배에게 업무를 인수인계 중이다. 인력이 충원되며 새롭게 업무분장을 했기 때문이다. 홍보 업무를 인수인계 하는데 개별 업무 설명이 끝날 때마다 똑같은 패턴의 질문이 돌아온다.
"원래 이게 홍보가 담당하는 업무인가요?"
"이것까지 홍보에 포함되는 건가요?"
그럼 내가 업무를 물타기라도 해서 준다는 말일까. 하고 꾹꾹 눌러 담으며 인수인계를 계속했다. 업무를 전달하다 빠진 파일을 카톡으로 넘기고 설명을 위해 그녀의 자리로 갔다. 파일 봐봐요, 하며 그녀가 카톡창에서 파일 다운로드를 누르는데 보이는 팝업창. '친구가 아닌 사용자가 보낸 파일은 위험할 수 있다'래나.
그러하다, 우리는 친구가 아니니까. 아무튼 파일에 포함된 내용을 설명해 주는데 또다시 돌아온 질문.
"지금 업무를 추가로 주시는 건가요?"
"아니죠. 자료를 추가로 주는 거죠."
잉크가 쏟아졌다. 미운 마음을 안고 자리로 돌아왔다. 미워! 밉다고 생각하니 한 없이 밉고 그렇게 생각하니 손쉬웠다. 나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건 늘 해오던 똑같고 쉬운 선택이다. 동기와 카톡방에서 그녀를 허공에 매달아 두고 조리돌림하거나 대놓고 그녀와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일 같은 것.
돌아보면 그렇다. 그 질문을 받을 때 내 마음에 잉크가 쏟아진 것 같았다면 그 질문을 하는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엄청나게 궁금한 건 아닌데, 멀리 있는 인물을 묘사한 그림처럼 그녀의 얼굴이 뭉개져있다. 아예 모르겠고 관심이 없었단 뜻이다. 그러니 내가 생각한 '저런 싹바가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정답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진 그녀에 관한 정보는 '내 감정', 단 하나이므로.
갈등이라고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광원은 바로 내 머리 위만 비추고 있었다. 다른 인물도 어떤 마음이 있을 거라고 빛을 비추고 바라본 적이 없다. 내 감정이 정답이 될 수밖에 없는 시야를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갑작스럽게 다른 인물의 마음이 궁금해진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다. 단 하나의 정답지를 갖고 미워하는 건 너무 쉬운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