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코기와 비계만 있는 세상, 삼겹살이 맛있는 건 둘이 같이 있어서인데.
느지막이 피자를 먹고 머리를 탈탈 털어 대충 말리고서, 양갱을 주문했다. 본부장님께 무례했던 일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데 도무지 불편하고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손편지라도 쓸 참이었다. 편지만 덜렁 들고 가기는 머쓱해서 양갱을 들고 가려고. 원래 쫀득한 약과를 주문할까 했는데 근래에 임플란트 하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보드라운 양갱으로 바꿨다.
양갱을 주문하는 데는 1분도 안 걸리고, 5시간 뒤면 양갱은 집 앞에 도착한다. 하지만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떨어지지 않는다. 내내 '미... 미... 미친놈아 니가 먼저 잘못했잖아!'라는 웃긴 만화만 떠오른다. 죄송하지 않은 건 아닌데, 왜 그럴까?
미적미적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다리를 들고서 명상을 시작했다.
'여전히 죄송하단 말이 안 나오다니 난 정말 싹퉁바가지야...'
'근데 죄송하긴 해. 근데 죄송하다고 말하는 상황이 너무 불편해.'
그래, 난 불편한 것이었다. 분명 내가 무례했다는 것도 죄송하다는 것도 전하고 싶은 그 마음은 있는데,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한 과정에서 일말의 불편함도 싫은 것이다. 대충 넘어가면 안 될까, 내가 죄송하다는 걸 텔레파시로 아실 순 없을까 이런 실없는 생각으로 표류하는 것도.
불편한 것은 모조리 피하고 싶다. 계단 대신 에스컬레이터, 요리 대신 배달, 사과 대신 회피. 좋아하고 좋은 것만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리를 들고 있는 이 단순한 동작도 실은 불편하다. 괜히 살짝 내려본다. 그런다고 대단히 편해지는가? 그것도 아니네. 다리를 더 힘든 각도로 올리고 불편하다는 감각에 집중해 봤다. 뻐근하고 불편하지만 어쩐지 뿌듯하고, 선풍기 바람이 선선해서 살짝 상쾌하기까지 하다.
불편함 속에서도 좋은 게 있잖아? 백 퍼센트의 불편함 같은 건 없는 거구나. 내가 불편함이 싫다는 것에만 집중하면 그것만이 200%의 진실이 된다. 그것 외에 이 현상에서 좋은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불편함 속에도 좋음이 있다.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백 퍼센트 나를 기쁘고 좋게만 했는가? 아이스크림을 하루에 열 개씩 먹고 배탈이 나거나 조금이라도 마음이 맞지 않는 친구는 투명인간 취급했다.
업무나 관계에서도 상대방과 불편함이 생기는 걸 극도로 크게 느꼈다. 불편한 게 너무 싫은 나머지, 미처 보지 못하고 놓쳐버린 좋은 것들도 있지 않을까? 다리를 들고 있으면 뻐근하지만 시원한 것처럼, 이 관계가 껄끄럽지만 배울 게 있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편안함과 불편함 밖에 없던 이분법의 세계였구나. 나는 정육 하듯 거침없이 사람도 상황도 딱 두 가지로만 서걱서걱 썰어내고 있었구나.
다리를 내린다고 마냥 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