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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나였다.

내가 모르는 고사리의 마음

by 정안

처음 글쓰기 수업을 받았을 때, 유독 '나'로 시작하는 문장이 많다는 평을 들었다. 특이할 정도로 '내가' '나는' '나에게' '나의' 같이 '나'로 초점이 맞추어진 문장이 많다고. 나의 감정에 천착하는 것이 내 글의 유일무이한 주제였으니 당연하다고 여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말이 오늘 몸 수련을 하며 둥실, 떠올라 묵직하게 가슴깨를 눌렀다. 전부, 전부 나였구나.


15분 간 무릎을 들고 있는 자세 자체는 힘들지 않았다. 약간의 불편감이 더해지니 오히려 산란하던 생각들이 잘 보였다. 펼쳐졌다 오므려졌다 하며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초점으로 산란하는 생각들. 어제에 이어서 '왜 내가 참아야 하는데?'라는 문장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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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지루해서 잠시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 둔 식물등의 불빛이 눈이 부셨다. 그 감각이 편안했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풍부한 애정, 칭찬, 사랑의 말들. 물을 준 다음 날 말갛고 통통한 잎을 뽐내는 근사한 수형의 식물, 빛을 독차지하며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이다. '나는 사랑받아야 해.'의 다른 말은 '나는 무시받아서는 안돼.' 나의 긍지는 나의 목숨. 빛은 나를 비추어야 한다. 빛은 따사롭고 좋은 것, 나만의 것. 덕분에 무럭무럭 자랐다.


방 안에 아무리 식물을 두어도 그늘진 곳이 생긴다. 빛을 좋아하는 식물을 광원 근처로 두고, 볕이 별로 없어도 묵묵히 자라는 고사리 같은 친구들은 그늘진 곳에 둔다. 빛을 좋아하는 몬스테라는 위로 쑥쑥 자라나고 고사리는 조용히 옆으로 펼쳐진다. 와아, 하고 펼쳐진 몬스테라 잎의 그늘에서 고사리는 살고 있다. 식물등은 해와 달라서 방향을 바꾸어 고루 비추지 않는데도 아무 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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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쑥 자라는 몬스테라에 비해 고사리는 느리고 조용하다. 몬스테라가 더 높이높이 뻗어 더 많은 볕을 움켜쥐러 갈수록 고사리의 자리는 더욱 그늘지다. 그리고 그 몬스테라마저 나중에 자라는

잎들은 아래의 잎들의 통풍과 광합성을 위해, 이파리가 갈라진 채로 자라난다. 빛과 바람을 나누기 위해.


광원의 바로 아래에 서있었다. 내가 빛날 때 다른 이들은 어떤 얼굴이었더라? 내가 어떤 그늘을 만들었더라? 내가 선 곳은 화려한 빛으로 눈이 부셔서 주변은 기억나지 않는다. 주변을 보기 위해서는 광원을 높여 올려 빛을 펼치거나, 광원의 방향을 바꿔 다른 쪽에 빛을 나누어야 한다. 빛을 나눈다,라는 생각만 해도 흡사 산소가 부족한 지하광산에 타인과 갇힌 기분이다. 타인이 숨을 쉴 때마다 내 몫의 산소가 사라진다.


고사리를 무시하고 뽐내며 웃자랐다. '내가 왜 참아야 하는데?'라고 질문은 결국 '나는 참을 수 없다. 내가 너무 커다랗다. 참고 인내하고 나눌 곳이 없다.'라는 발견의 다른 말이다. 나로 죽지 않고, 나의 긍지를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참아서는 안된다. 참는다는 건 내가 무시받는 것이니까.


가슴 한가운데가 엄청 아파왔다. 무척 단단하게 끈끈하게 붙은 생각. 고통을 참는다,라는 개념 이전에 참는다,라는 것 자체가 내게는 거대한 고통이자 생명의 위협이다. 내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타인을 무시했다. 나를 비추는 빛만 두고 모든 조명은 꺼버리고, 나를 더 크게 만들어서 그늘을 넓게 펼쳤다. 내 안에 그늘이 생기는 게 두려워서 타인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약하고 무능한 가족, 멍청한 사람들. 주변은 이렇게 그늘로써 정의되어 있었다. 내가 가득 차 있고 그 압력이 너무 커서 주변을 손쉽게 재단할 수 있었다. 멍청이들로 가득해.


"니가 제일 잘 났다는 아상을 내려놔야 한다."

"지들이 멍청한 걸 어떡해."


늘 세상에서 내가 가장 특별하다는 엄마도, 종종 내게 아상을 내려 놓으라는 말을 했다. 찬란한 나의 아상이 나를 살게 하는데 왜?


빛이 너무 강하면 식물도 잎 끝이 타들어간다. 나만을 비추던 찬란한 광원이 이제 나를 태운다. 온통, 온통 나였다. 나는 머리카락 한 올 들어올 틈 없이 나로 가득했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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