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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01. 2016

타협을 모르는 여자

#2. 공기만 가득 찬 웃음소리


이름은 금봉순.


대학교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의문의 여성이다. 그녀는 틀림없는 김 씨이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을 소개할 때 뱉은 말이 아직도 또렷하다.  


"김봉순으로 부르는 사람은 입에 밤송이를 넣을 거예요."


그녀는 입은 건지 덮은 건지 모호할 만큼 두텁고 길게 늘어진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울 소재의 짙은 갈색인 그것은 마치 그녀의 몸을 숙주 삼아 뻗어오른 나무 괴물 같았다. 새벽 숲 첫눈처럼 하얀 얼굴은 그 아래와 극명하게 대비됐다. 얇은 이목구비 덕에 그나마의 음영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스산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나무 괴물 어딘가에 꽂아뒀던 손을 꺼냈고 그곳엔 밤송이가 놓여있었다. 주변은 적막으로 뒤덮였다. 종전까지 ‘김봉순!’, ‘노래해!’라며 소리치던 좌중들은 동작을 멈춘 채 눈만 깜빡였다. 몇몇 여학생은 그 고조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되뇌었다. 바, 밤송이?


타협을 모르는 여자 금봉순. 그녀가 금봉순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 이유, 굳이 ‘김’과 ‘금’을 구분하려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금(金), 즉 돈을 많이 벌고 싶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상과 이성을 좇을 대학생 시절부터 이미 돈에 대한 강력한 갈망이 있었다. (그것도 이상이라면 이상일까?) 그리고 가끔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해온다. 입버릇처럼 뱉던 그 말.


“내 꿈은 단출한 다방을 차려서 알부자가 되는 거야.”


뭔가 이상하다. 다방, 그것도 단출한 다방으로 어떻게 알부자가 될 수 있는 거지, 아직까지 미스터리.


비범한 분위기와는 반대로 그녀는 학교 내에서 그다지 튀지 않는 존재였다. 무리 중에 섞여 있으면 투명인간이 되기 일쑤,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다가와야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살갑지 않다 못해 직설적인 말투 덕에 가까운 친구도 없었다. 늘 혼자인 모습, 홀로 캠퍼스를 걸었고 밥을 먹을 때도 맞은편은 빈자리였다.


신기한 것은, 그녀가 마치 그런 상황을 일부러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여하튼 뭔가 대단한 장난감이라도 있는 아이처럼 혼자라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쁘다. 항상 뭔가로 바쁘다. 열중하고 있는 모습, 표정은 없지만 신중한 얼굴. 시끄러운 주변 환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음벽이 있는 듯 동요 없는 집중, 그런 분위기, 그런 느낌. 그것이 대학 시절 봉순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잘 알지는 못했다. 그리고 알게 될 것도 예감하지 못했다.


나는 신중하다 못해 소심한 성격 탓에 누군가에게 먼저 친구를 청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주변은 먼저 말을 걸어온 활기찬 성격이 대부분. 그렇다고 봉순처럼 서슬 퍼렇게 그들을 내친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빨리 알아채는 능력, 내가 그런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그때쯤 알게 되었다.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 보면 대략 그들이 원하는 대답과 반응들을 뱉어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성격 좋은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고, 주변에 사람도 많아졌다. 사실, 주변 사람이 많아질수록 나는 편치 않았던 것 같다. 속으로는 오만 잡다한 생각을 다 해도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건 (고르고 골라진) 극히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다.


나에겐 노트가 하나 있다. 짜내고 짜낸 마지막 한 방울들만 모아놓은 핵심 요약 노트. 시험 때가 되자 친구가 그 노트를 빌려달란다. ‘성격 좋은’ 나는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아니 그런 고민은 해본 적이 없다는 얼굴로 노트를 넘겼다. 넘기고 싶지 않았다. 한 학기 내내 팽팽 놀다가 시험 때만 친한 척 얼굴을 드미는 그 노무쉐리의 뻔스러움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영혼을 탈탈 털어 넣은 노트는, 못난 주인을 원망하며 그렇게 힘없이 떠나갔다.


그런데 이 악마 같은 노무쉐리가 노트의 복사본을 다른 친구에게 넘겼고, 그렇게 바통은 손에 손을 타며 ‘한 학기 팽팽 족’을 넘어 ‘요약 노트 수집 족’, 그리고 ‘수업시간엔 수업에만 집중한다. 누군가 필기를 할 테니 족’까지, 극악무도한 쉐리란 쉐리는 전부 나의 요약 노트를 보고 있었다.


뒷등을 타고 싸늘한 부아가 쳐 올라왔다. 그들의 무임승차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최초에 노트를 앗아간 그 악마 쉐리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나의 상태를 알리려는 듯 큰 동작으로 일어나 그 쉐리 자리로 성큼성큼, 분노를 끌어모아 한 마디 하려는 찰나, 극악무도 집단 중 몇몇이 말을 던졌다.


 “너 노트 정리 진짜 잘한다!”


 “그르게. 이거 이렇게 우리가 봐도 되는 건가.”


 “진짜, 이건 돈 내고라도 보겠다. 장난 아니네!”


 순간, 나는 그들에게 성격 좋은 미소를 던지며, 그래? 고마워. 그냥 뭐 틈틈이 한 거야. 그리고 가장 나쁜 그 쉐리를 보며,


 “네 덕에 내 노트가 유명세를 타네. 하핫!”


그렇게 영혼은 없고 공기만 가득 찬 웃음소리까지 더해 정반대의 말을 뱉어버렸다. 노트는 소리 없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하지만 어쩌겠냐. 그냥, 그게 나다. 억울하지만 그렇다. 겉이 빛날수록 속은 앓아가는 그런 성격인 거다. 몸에 힘을 빼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대화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사람 틈바구니에서 피로를 쌓아가던 나보다, 홀로 유유히 떠가던 봉순의 일상이 더 평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접근 금지’ 간판으로 첩첩 벽을 쌓은 봉순과 친구 넘치는 나 사이에 그 어떤 인연이 생길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어느 날 교문 앞에 서 있던 그녀의 ‘어떤’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그 일로 인해 그녀의 이름이 금봉순이며 나와 같은 과에, 그것도 나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문 앞의 그녀는 자신만큼 커다란 팻말과 함께였다. 팻말에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정확히 여섯 글자가 정돈되지 않은 필체로 적혀있었다.


 < 남은 꽃 삽니다. >


스승의 날이었다. 교문에는 꽃을 파는 아주머니와 젊은 청년들로 공급초과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팻말 하나를 세워놓고 낚시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봉순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학생들이 모두 귀가하고 한산해지자, 대부분의 꽃 판매자가 봉순에게 남은 꽃을 되팔기 시작했다. 현대판 허생전인가!! 봉순은 "시장 가격 그대로 삽니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 크게 동요하지 않으며 꽃을 사들였고 자신의 덩치만 한 꽃 무더기를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어제 너 참 멋있더라. 발상의 전환! 많이 벌었어?”


다음 날, 통성명도 없이 그녀에게 던진 첫마디였다. 머뭇거림도 쭈뼛거림도 없었다. 소심한 성격을 뒤집게 하는 궁금증이 있었기 때문.


그녀는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놀란 듯 고개를 들더니, 첫 대면이라고 하기엔 좀 긴 시간 동안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황스러운 침묵의 3초. 평소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어서,라고 생각했었지만 되돌아 생각해보니 이미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간밤에 이상화했던 그녀의 이미지를 상당히 균열시켰다.


 “응. 5000원 벌었어.”


그녀는 백 다발 정도의 꽃을 사들였고 한 다발 당 50원을 남겼다고 한다. 그렇다. 그것이 봉순이었다. 뭔가 특별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부족한, 부싯돌은 좋지만 가스는 들어있지 않은 라이터랄까.


봉순은 그 이후로도 ―드라마 속 이야기를 현실로 꺼내는 실험을 하려는 듯― 몇몇 인상 깊은 시도를 하였고, 나는 재채기하듯 던졌던 질문을 계기로 그녀의 '실패 노선'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녀와의 인연이 시작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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