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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Jan 01. 2016

똥인지 된장인지

#1. 찍어 먹어보는 수밖에


7년 만에 걸려온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 전화를 계기로 잘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아니, 공손히 놓았다. 김 부장은 미리 말을 해야지 대뜸 봉투부터 들고 오는 경우가 어딨냐며 역정을 냈다. 내 사직서 때문인지 혹은 그냥 열 뻗치는 일이 있는 건지 평소의 괴팍함 이상으로 씩씩거렸다. 부장실은 금세 뜨거워졌다. 손마디 끝이 불에 닿은 듯 아렸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갈라지는 성대 어렵사리 적시며 공고한 결심을 드러냈다. 김 부장은 한 동안 허으, 으허 하면서 분을 뱉은 후에야 수화기를 들었다.


"박 과장. 이 사람 회사 관둔다네? 인수인계 진행하고, 지금 맡은 프로젝트들 알아서 후임 찾고, 뭐, 말 안 해도 잘 알지?"


그가 나의 갑작스러운 이탈이 남는 사람들에게 어떤 피로를 주는지 공유했다. 박 과장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식을 전한 김 부장은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았다. 모니터에 고정한 눈동자의 떨림과 거친 날숨. 그 뒤로 분노를 머금은 칼춤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날 부장실의 유리문 너머로 본 사무실 풍경은 아직까지 또렷하다. 팩스기 앞의 김 대리도, 서류를 바삐 넘기며 수화기 저편과 대화하는 박 계장도, 그리고 자신의 영역에서 분주하게 혹은 고요하게 일하는 다른 직원들도, 그 관심은 모두 어느 한 곳에 쏠려 있었다. 큰 소리가 난 부장실에, 소리가 나기 전 그곳으로 들어간 나에게.


연구실의 건조한 공기를 마시며 십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심리학자로서의 모양새가 갖춰질 때쯤, 색다른 경험이 필요했다. 울타리 너머 실전 무대에서 그 이론들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방 끈 길게 늘어진 학자를 원하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연구실에서 오랜 기간 몸에 밴 합리적이되 협소한 사고를 비합리적이되 효율이 강조되는 실무 환경으로 녹이기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 결국 연구소장의 학연에 기대어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나 역시 그들이 우려한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새파란 신입사원들도 기본으로 알고 오는 것들을 몰라 허우적거렸다. 동료들은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에게 회사생활의 기본 규칙과 업무 방식을 알려주었다. 침착하게 내 적응의 시간을 기다려줬다. 아마도 그건 무척 인내가 요구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나는 학자의 안경을 벗고 그곳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따스한 봄날 저녁에 배신의 창을 던졌다.


부장실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귀를 곤두세웠다면 바람 오가는 기척쯤은 있었을까. 사무실은 슬레이트의 큐 사인을 기다리는 촬영장처럼 고요했다. 뜬금없는 적막 때문인지 통화하던 박 계장이 힐끗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어디에선가 ‘왜 그런 건데?’라는 속삭임도 들렸다. 어색하고 불쾌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럴 만도 하다. 갑자기 툭 나타난 놈, 그래도 잘해보자 정주고 열심히 가르쳐놨더니 어느 날 어쭙잖은 사표 내밀며 ‘세이 굿바이’를 못 박은 셈이다. 그곳의 도덕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날의 난, 확실히 나쁜 놈이다.


남은 짐을 품고 위태로이 사무실을 빠져나오던 순간, 내가 더 이상 그곳의 일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는 인사 비슷한 뭔가를 하려 했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양 눈인사로 답했다. 나에겐 눈인사, 그들에겐 비열한 조소로 보였을까. 집에 오는 내내 그 큰 사단을 만든 전화의 내용을 곱씹었다.


"부자 되게 해줄게.” 당첨된 복권을 손에 쥔 사람처럼 확신에 찬 말투. “인생에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아.”


졸업 후 7년 만의 전화였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날 움직인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의 비범한 대학생활, 그 단편적인 장면들이 내 선택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이다. 어쨌든 일은 싸질러졌다. 그날의 선택은 말 그대로 ‘충동’이었을지 모른다. 지속되던 삶의 타성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일 수도. 어쩌면 기억 속 드라마의 주인공을 흉내 내본 것이리라. 그렇다면 남는 건 사표와 실직뿐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손가락으로 찔러본 셈이다. 초조한 맘 달래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5분만 늦게 전화했어도 기회를 놓칠 뻔했어.”


언제부터 존재했던 5분이었을까. 그녀에게 '내가 찍은 것이 똥인지 아니면 된장인지, 만약 똥이라면 그건 네 똥인지 내 것인지' 물었다. 그녀는 내 작은 심장에 화가 났는지 당장 만나자고 했다.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남는 게 시간.




파마의 흔적이 남아있는 단발머리, 헐렁한 원피스, 나무늘보처럼 늘어진 가방과 커다란 액세서리들. 이 모든 게 가녀린 듯 탄탄해 보이는 그녀의 몸에 매달려 있었다. 7년 전과 마찬가지로 집시 같은 차림새.


선 네 개만 그으면 완성될 것 같은 눈코입은 계단을 서둘러 오른 탓인지 너도나도 들썩이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선들이 한껏 격앙됐다. 팔다리에 힘이 바짝, 두 주먹은 불끈. 어디 카페에 들어갈 만도 한데 그녀는 대뜸 말 주머니부터 던졌다. 사람이 끊임없이 오가는 역전이었다.


“네가 날 못 믿으면 어떡해!" 게다가 인사도 한마디 없었다. "넌 봤잖아, 미니 트리 사업의 성과.”


글쎄, 그 사업에 '성과'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 단어를 시작으로 기억 속 켭켭이 쟁여놓았던 사건들이 떠올랐다. 그녀의 괴상하고, 기발한 시도들. 어쩌면 내 선택의 기원이 된 그 무엇.


불길한 예감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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